짙은 적색의 "화서"가 숫자의 회오리를 몰고 이 가상의 방에서 이리저리 제멋대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건 진정한 화서가 가져서는 안 될 광기였다.
난... 사신이... 될 거다.
난... 복수할 것이다.
넌 인간에게 사형을... 집행할 거다.
화서의 손이 유령처럼 곡의 목뒤에서 나타나 목을 압박해 왔다. 곡은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목에 칼을 받쳐 겨우 화서의 힘을 견뎌냈다.
화서... 아니야. 넌 화서가 아니야.
넌... 바로...
그렇다. 내가 바로 그... "죽은 자"다.
나는... 병사이자... 작가이자... 모험가다.
나는... 죽음을... 거부했다!
곡의 목을 쥐고 있는 손이 점점 더 세게 조여왔다.
크흑...
얼마나 많은 전투의 반복과 시뮬레이션 연산을 거쳐 이곳에 도달했는지 알 수 없었던 곡은 마지막 힘을 짜내도 그 진홍색 손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만세명의 숫자 공간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곡은 로봇 심장에서 펌프질되는 순환액이 더 이상 의식의 바다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체공학 척추의 신경조차 조금씩 끊어지고 있음이 느껴지면서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너에겐 그녀를 정의할 권리가 없어.
곡 앞에 어렴풋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 형체는 곡을 향해 말하지 않았다.
비...
마지막 숨을 몰아쉰 곡은 간신히 눈앞에 있는 그 형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너에겐 내 창조물을 정의할 권리는 없다. 이 비열한 죄인아.
희미한 형체의 비리야는 곡 뒤의 진홍색 "화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무언가가 "화서"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아... 안 돼.
이 비열한 조물주.
난 그녀를... 해방할 거다. 화서를 해방하고... 모든... 동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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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나타난 "화서"는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그리고 곡은 이 짧은 틈을 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을 비틀어 풀고 땅에 떨어졌다.
크흠... 비리야?
고마워.
네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넌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나?
비리야가 자신이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실재하지 않았고, 단지 이 데이터 세계 속의 흐릿한 반영이었다.
나도 몰라.
그냥 화서의 비명을 듣고, 눈을 떴더니 여기 있었어.
만세명엔 네 정보가 입력된 적이 없어.
그리고 네가 야항선에 가져온 그 화서 백업도 사라졌어.
만세명이 네 의식체를 만들어내기엔 데이터와 기억이 충분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이건 내 화서야.
이건 내 아이이자, 내 창조물이고, 유일한 완벽함이야.
내가 화서를 시험할 때마다, 화서는 나에 대한 기억을 남겼어.
화서가 만세명을 관리할 때, 만세명이 화서의 기억을 스캔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야.
화서가 너를 남겼다는 건가?
네 의식 데이터를 저장한 덕에 화서가 자신의 모습을 연산해냈던 거야.
하지만 이런 인공지능은 "감정"을 가져선 안 돼.
"감정" 같은 저급한 단어로 그녀를 묘사하지 마. 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화서...
비리야는 공중에 있는 그 "화서"를 올려다봤다. 몇십 년 전, 란다우가 제3 개발부 중앙에 있던 그 게슈탈트를 올려다본 것처럼.
계속할 거야?
나?
그녀의 기억 속에서... 봤어.
전쟁, 죽음, 인간의 배신 그리고 별들 속 소녀까지...
그 비열한 죄인과 퍼니싱이 만세명과 화서의 데이터를 삼키고 있어.
내가 기본 코드로 잠시 동안만 화서의 기능을 멈춘 것뿐이야. 재가동 후에 잠깐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만세명 문을 열기로 결정한 순간, 이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어.
너는 만세명 데이터의 파괴를 초래했어. 그리고 화서의 파괴도 초래했지.
곡, 네 자비가 이 세계의 종자를 망쳤어.
그때 만세명 밖에 살아있는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 넌 알고 있잖아?
64만 3천 7백 29명.
비리야는 굳어진 그 "화서"를 여전히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비리야는 화서의 "마음"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더 이상 단순히 "비리야"라는 존재로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그럼, 만세명을 열지 않았으면,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도 알겠네.
예상 사망자 수 60만 5천 2백 46명.
그래서 내가 만세명을 열었던 거야.
넌 한때 그들이 구룡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어.
공중 정원과 승격자가 구룡 순환 도시를 노릴 때, 그들에게 야항선을 떠나 구룡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면,
이 수십만 명의 생명이...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곡, 그건 불필요한 감정이야.
불필요하다고?
곡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리야, 나를 흔들 수 있는 건 없어.
아버지, 윤, 그리고 너를 흔들 수 없는 것처럼.
…………
비리야,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포기해야 해.
그리고 더 멀리 봐야 해.
그래서 계속할 거야?
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를 돕고 있어.
내가 돕고 싶은 건 네가 아니야.
어차피 난 죽었어. 그냥 다람쥐가 어떤 문명을 세울지 보고 싶을 뿐이야.
다른 건 관심 없어.
그럼, 지켜봐. 비리야.
화서를 재가동하자.
너에게 화서의 최고 권한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난 언더레이 명령으로 화서를 재가동해 일부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어.
임종에 다다른 사람의 말처럼, 사실 이건... 죽은 자의 선의에서 비롯된 거야.
너에게 경고할게. 지금 네가 사용하고 있는 그 몸은... 만세명의 출처를 알 수 없는 데이터에서 온 거야.
일단 화서를 재가동하게 되면, 화서와 만세명의 연결 포트가 즉시 끊어질 거야.
다시 말해, 화서를 재가동한 후, 네 만세명 내 설정은 초기 상태로 돌아가게 돼.
이 몸이 만세명에서 온 거였어?
상관없어. 화서를 재가동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구룡은 만세명을 잃을 수 없어.
흥, 정말 안타깝군.
비리야는 비웃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굳어 있던 붉은 화서의 손을 잡았다.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