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슐츠·로더람이 아군 참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는 130킬로미터 떨어진 바들라이 요새에 집단군 최전선 방어 여단의 공격 계획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시간 뒤, 동이 트자마자 출발할 예정이었고, 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담배 있어? 아니면 술도 좋아.
슐츠가 옆에 있는 야간 경계 병사의 팔꿈치를 툭 쳤다. 그러고는 손에 든 백랍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렇게 깊은 밤인데도 금속광택은 모닥불 조명 아래서 유독 빛났다.
쳇... 뭐?
야간 경계 병사는 슐츠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와 간단히 살펴본 뒤 뒤쪽에 있는 허름한 가방에 넣었다.
이제 반 병 남았어. 뭔진 나도 몰라. 네가 알아서 해.
병사는 돌아서서 갈색 액체가 반 정도 들어 있는 라벨 없는 유리병을 슐츠에게 건넸다.
싸구려 캐러멜 냄새와 강한 알코올 향이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냄새 덕분에 슐츠는 이것이 추운 겨울밤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음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슐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마개를 뽑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차가운 참호에 등을 기대고 야간 경계 병사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제기랄.
이게 뭐야. 술인지 휘발유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네. 뭐, 그래도 따뜻해지긴 했어.
담배도 필요해?
됐어. 난 내 몸에 불 붙이고 싶지 않아.
그럼, 내가 피우지 뭐.
야간 경계 병사는 주머니를 뒤져 종이 주머니를 꺼낸 뒤,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빼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자신의 것 같지 않은 반짝이는 은색 라이터를 꺼내 옷으로 바람을 막으며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그러자 모닥불 곁에 어슴푸레한 붉은 불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
응?
이 브랜디 맛 정말 별로야.
응.
담배 한 대 줘.
너도 피우게?
야간 경계 병사가 종이 주머니를 슐츠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사주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 몸에 불 붙이지 않게 조심해.
걱정하지 마. 입에 물고만 있을 거야.
슐츠는 종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저기, 헨리...
윌리엄.
응?
내 이름은 헨리가 아니고 윌리엄이야.
오늘 헨리가 보초 서는 거 아니었어?
헨리는 아침 돌격 때 죽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겠지.
입맛을 다신 슐츠는 침을 뱉은 뒤, 아직 입안에 남은 담뱃잎을 연이어 뱉어냈다.
그럼, 조슈아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윌리엄은 눈앞의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고, 입가의 어두운 붉은 빛이 소리 없이 깜빡였다.
슐츠는 여러 가지 죽음의 모습을 목격해 왔다. 헨리는 아마도 아침 돌격 중에 총에 맞아 어느 참호 밖에서 전사했을 것이고, 조슈아는 아마도 152mm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며칠 전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을 때, 얼어붙은 땅에 참호를 파던 슐츠가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눈 속에 묻힌 작은 요한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철 장마 때, 퀴닌을 군의관에게 보여주지 못했다면, 벤처럼 몸을 떨며 조용히 진흙탕 속에 쓰러져 참호에 있는 쥐들에게 야금야금 갉아 먹히는 처지가 됐을 것이다.
그래도 겨울에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쥐라 해도 추운 참호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삐삐]. 추워.
맞아. 조슈아를 기관총 총열에서 떼어내는 데 꽤 고생했지.
날 밝으면 좀 나아질 거야.
응.
또 한 번의 침묵이 이어졌다.
알코올이 슐츠의 위장을 자극하자, 바들라이 요새의 따뜻한 커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온수로 샤워할 수 있는 욕실과 침대가 상상됐다.
전쟁 중이라 해도 도시의 생활이 최전선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운 최전선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는 탄약이 부족하고, 때로는 인원이 부족했지만, 가장 부족한 것은 후방에서 오는 전보였다.
바들라이 요새의 고위 인사들은 병력 배치만 하면 됐다. 그리고 슐츠가 속한 집단군은 남쪽으로 육군 항공단 3부대와 기갑 사단 2부대를 나눠서 보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나흘 전 전투에서 그들의 무전 전신이 폭격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남은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슐츠가 속한 지상 부대는 20킬로미터나 되는 방어선에서 70시간 이상 고립된 채로 버티고 있었다..
슐츠는 돌격한다는 공격 계획을 바들라이 요새 지휘부로 반드시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여기서 버티고 있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다시 입맛을 다신 뒤, 입안에 남은 담뱃잎을 뱉은 슐츠는 얼마 남지 않은 브랜디 병을 윌리엄에게 돌려줬다.
난 이만 가볼게.
차가운 공기가 폐렴을 앓았던 폐로 빨려 들어갔다가, 진한 알코올 향과 섞여서 뜨겁게 변한 뒤, 다시 참호 속으로 흩어졌다.
이봐, 있잖아.
뭐?
우리 이제 돌파해야 하지 않을까?
응.
난 바들라이에 있는 장관에게 전보를 전하러 가는 길이야.
슐츠는 가슴 속에서 진홍색 밀랍 도장으로 봉인한 편지를 꺼냈다. 여단장이 그에게 이 임무를 줄 때 돌파 계획에 대해 설명해줬다. 하지만 문서의 기밀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랬구나.
흔들리는 모닥불에 비친 진홍색의 밀랍이 더욱 붉어 보였다.
음... 잠깐.
저게... 뭐야?
슐츠는 미간을 누르며, 멀리 보이는 흐릿한 검은 그림자와 공중에 천천히 떠오르는 적색 별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신호탄...
신호탄!!
습격이다!!!!!
분노에 찬 포효가 겨울밤의 침묵을 찢어버렸고, 곧이어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알이 발사되는 사격음이 울려 퍼졌다.
슐츠는 이런 날카로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총알이 슐츠의 곁을 스치며,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 크고 작은 구멍을 냈다.
윌리엄!!!
하지만 윌리엄은 슐츠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옆에 있는 소총을 들고 참호에서 몰려나오는 전우들과 함께 기습해 온 적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슐츠는 사격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틀 후, 그의 부대는 곧바로 외곽으로 돌파해야 했고, 지휘부는 외곽에서 지원할 계획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전멸할 것이었다.
이건 적의 야간 매복 공격이 틀림없었다. 이번 공격이 2시간 30분 동안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슐츠는 곧바로 출발해야 했다.
그는 부대의 돌파 계획을 지휘부가 있는 바들라이 요새로 전달해야 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가, 얼른 가.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윌리엄!!!
슐츠는 다시 한번 윌리엄을 불렀으나, 그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고, 이 외침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시간이 없어.
슐츠는 자신의 탄약과 보급품을 급히 점검한 뒤, 가슴 주머니에 있는 여단장의 이름이 적힌 돌격 계획서를 움켜쥐었다.
어서 가!
그는 실제로 적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는 포화와 총성이 그의 머릿속을 울렸고, 이는 슐츠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이곳에서 피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전우들이 참호를 뛰쳐나와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슐츠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고, 어깨와 개머리판에 부딪혀 아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도 그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를 사살하기 위해 독전대를 부르는 이도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비좁은 참호 속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전쟁이라는 이름의 무덤으로 향하는 줄처럼 보였다.
**! 비켜.
세상이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상한 속도로 그의 시야에 회전하며 들어오더니 그를 땅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얼굴 아래에는 한 짝의 부츠가 있었고, 그 부츠 위는 무릎이었다. 무릎 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슐츠는 뭔가를 집으려고 손을 더듬었다. 그러자 따뜻하고 끈적이면서 조금 주름진 무언가가 만져졌다. 하지만 좋은 지렛대로 쓰기에는 부적합했다. 결국 슐츠는 여기저기 손을 휘저으며 짚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았다.
그것은 부츠의 다른 한쪽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모양상 무릎 부근이 아닌 부분이었다.
슐츠가 몸부림치며 일어났다. 그러자 포탄이 터져 얼어붙은 흙들이 얼굴 위에 튀었고, 빠르게 녹아 흙탕물이 됐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피와 섞였다.
슐츠는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평지가 아닌 참호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습! 공습이다!
쏴라! 저 개자식들을 쏴서 떨어뜨려!
엎드려!!!
이것은 슐츠·로더람이 포로수용소의 병원에서 후자극제로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때 또 다른 포탄이 10미터 떨어진 포탄 구멍에서 터지면서 그 충격파가 그를 다시 땅에 내팽개쳤다.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운 좋게 전장에 누워서 별들을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슐츠는 여전히 차가운 땅에 얼굴을 맞대고 파묻혀 있었다.
게다가 그날 밤, 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수술... 했어.
필요... 하지만... 우리는... 보내...
당시 폭발의 여운이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소리로 변환된 것 같았다. 슐츠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떤 텐트 안에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적...
우리... 보낼... 그곳 사람들이... 그...
적... 전우... 흥미로워.
다 네 덕분에... 된 거야.
2년... 네가...
물론이지...
전쟁... 끝낼...
아니... 시작...
흰옷을 입은 사람이 슐츠의 눈을 벌리고,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었다.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텐트 밖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슐츠는 그 이후로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그 장소로 다시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슐츠의 눈에 손전등을 비추던 의사의 목소리도 다시 듣지 못했다.
슐츠는 천을 뒤집어쓰고 묶인 채, 방에서 끌려 나와 사방이 뚫린 차에 던져졌다. 그가 다시 빛을 보았을 때 그는 거의 얼어 죽을 뻔했다.
하지만 전쟁 포로수용소의 "따스함"이 금세 그를 감쌌다.
처음에 슐츠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최전선으로 보내져 지뢰를 밟기 위한 "도구"로 쓰일까 봐 걱정했지만, 곧 이 수용소가 예상보다 훨씬 인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의 점호와 몇 가지 필수 집합 외에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슐츠는 <전쟁 포로 처우에 관한 공약>을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대의 돌파 작전이 담긴 밀랍 도장으로 봉인한 편지도 다행히 초병에게 압수되지 않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2달 동안 전우를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담배 있어? 아니면 술도 좋아.
햇볕이 쨍쨍한 날,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슐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얼굴에 패인 자국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레보비츠 부참모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딱 봐도 직책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슐츠는 그가 피우는 담배의 품질로 신분을 판단했다. 담배 끝은 정교했고, 담뱃잎의 향도 좋았다.
없어.
왜인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전우를 한 명도 본 적이 없어.
응?
이 전쟁 포로수용소는 크잖아.
너 같이 높은 사람도 잡혀 왔다면, 나 같은 평범한 병사도 여기 잡혀왔을 거 아냐?
그런데 왜 전우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거지?
어느 부대 소속이냐?
슐츠는 경계하며 레보비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레보비츠의 정교한 담배를 믿기로 했다.
바들라이 요새 동쪽 방어선의 제57 보병사단 기계화 보병 2여단.
음...
음!?
왜?
제3 집단군, 제57 보병사단?
어.
그럴리가...
그 부대는... 3년 전에 해체됐을 건데?
3년 전? 그럴 리가 없어!
난 이 포로수용소에 갇힌 지 두 달밖에 안 됐어! 우리 여단은 2달 전까지도 사단 본부와 돌파를 고민하고 있었다고!
우리 둘 중에 누가 부참모장이냐?
네가 제57 보병사단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봐, 거기!
포로수용소의 경비병이 총을 들고 레보비츠와 슐츠 쪽을 향해 외쳤다.
수군대지 마!
레보비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슐츠에게 눈짓을 보낸 뒤 앉아 있던 자리에서 화를 내며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슐츠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어나서 바지를 털고는 다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떻게 된 거지?)
(3년 전에 부대가 해체됐다고? 난 분명 2달 전까지만 해도 여단장이 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눈을 가늘게 뜬 슐츠는 태양빛에 흐릿해진 높은 벽 위 철조망을 바라보며, 평생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
하지만 누군가가 시곗바늘을 돌리는 것처럼, 시간을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날 이후, 슐츠는 레보비츠를 다시는 보지 못했고, 그 노인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금세 잊혔다.
슐츠는 여기서 동료들과 함께 브리지 놀이, 축구, 권투 등을 배웠다. 심지어 크고 작은 운동회를 열기도 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장교 및 병사 수첩에 적힌 사항에 따라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중 일부는 총살당했고 일부는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슐츠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총을 든 병사로서 여러 군 고위 장교들과 함께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굳이 탈출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돌파가 성공했다면?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위로"하면서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특정 시점에 반드시 전달돼야 했던 편지 위 진홍색 밀랍 봉인처럼 끊임없이 그를 아프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슐츠?
헉... 요한.
요한이 책상 쪽으로 걸어오기 전에 슐츠는 그 편지를 눈에 띄지 않게 다시 옷 속에 숨겼다.
가자. 점호 시간이야.
넌 어떻게 나보다 더 굼뜨냐?
일이 좀 있어서...
공습이다!!!!
300킬로그램에 달하는 고폭탄이 떨어지기 전의 날카로운 소리는 포로수용소에서 울려 퍼지는 조그마한 수동 공습경보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이 소리가 지나가자마자 귀청이 터질 듯한 폭발이 뒤따랐다.
사전 경고가 없었기에, 방폭 테이프가 붙어있지 않은 포로수용소의 목제 창문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머리를 급히 감싼 그의 팔을 베었다. 그러면서 어제 막 꽂은 설구화 꽃병마저도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아남아야 해!
빨리 도망쳐!
슐츠는 얼이 빠진 청년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간신히 판잣집을 빠져나왔다.
폭탄은 슐츠와 요한이 있던 판잣집 바깥 100미터 거리에 떨어진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디에 떨어졌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더 많은 폭탄들이 하늘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슐츠와 요한이 판잣집을 빠져나오자마자, 3대의 폭격기가 그들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슐츠는 그 폭격기의 폭탄창에서 떨어지는 몇 킬로그램의 "작은 병"들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염 탄이다!!!
몇 초 만에 그들이 뛰쳐나온 집은 화염에 휩싸였다.
내장된 폭탄이 마그네슘과 알루미늄의 혼합 입자를 점화시키면서, 혼합된 휘발유와 백린을 사방에 튀게 했다.
목조 판잣집, 땅, 철조망, 기관총 구멍, 불에 타서 드러난 붉은 진피층과 노란색 지방, 그리고 구워진 피와 고기 위로 섭씨 1200도의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1차 폭격에 불과했다.
이건... 이건...
밖으로 뛰어! 어서!
고폭탄과 화염 탄들이 전쟁 포로수용소 자체를 목표로 한다면, 이 불과 피의 강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또 다른 고폭탄이 포로수용소의 벽 쪽을 강타하자, 거대한 돌담이 잔해로 변했다.
2차 폭격이 시작되었다.
밖으로 나가. 멍청아!
사람들, 폭탄, 비행기의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임시로 설치된 방공 기관포의 소리가 뒤섞인 가운데, 슐츠는 요한에게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게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슐츠는 왜 자신이 요한이라는 이제 막 알게 된 녀석의 생사에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 명 더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 려줘.
주름지고 하얗게 질린 손이 슐츠의 부츠를 붙잡았다.
땅에 엎드리고 있는 경비병의 군복은 기름과 피로 완전히 더럽혀져 이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한 쪽 다리는 이미 사라져 흰 뼈가 드러나 있으면서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들렸다.
쳇...
신경 쓰지 마!
어서 가!
슐츠는 이를 악물고 경비병의 손을 걷어찼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발로 경비병을 뒤집은 뒤, 그의 몸 아래 반쯤 잘린 손에 들린 총을 집어 들었다.
슐츠의 부츠에 남아 있는 것은 피가 아니라, 녹아내린 지방에서 나온 기름이었다.
가자!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끓어오르는 불길의 강을 헤치며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경비병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두개골을 관통한 총알 하나가 경비병의 얼굴이 맞닿은 땅에 박혀 있었다.
깼네.
슐츠는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를 묶고 있는 밧줄은 엉성했지만, 그를 의자에 단단히 묶어 놓는 데엔 부족함이 없었다.
강렬한 주황색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가 다시 그 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삐삐]. 이게 다 뭐야?
슐츠는 자신이 공포 때문에 떨리는지 아니면 분노 때문에 떨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물론, 추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슐츠는 그저 무력한 고통을 견디며 조명을 향해 욕설만 퍼부을 수 있었다.
이름.
여긴 어디지?
이름.
너희들 대체 누구야!
이름.
……
강렬한 조명 뒤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어떤 질문도 그 목소리의 흐름을 방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절대 아군일 리가 없었다.
슐츠는 단지 총을 들고 싸우는 병사에 불과했고, 누구에게도 해를 가한 적이 없는 병사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폐렴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징병관에게 이론적으로 자신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해 따지지도 않았다.
이름.
슐츠·로더람.
소속 부대.
[삐삐]...
소속 부대.
슐츠는 입을 다물었다.
슐츠는 이런 냉혹한 질문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자신이 적에게 잡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슐츠의 머릿속 마지막 기억은 요한이라는 신참과 함께 습하고 어두운 숲을 힘겹게 헤쳐나가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주운 마체테로 길을 뚫고 있었고, 요한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 이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정보!)
"본부와 지휘부가 연락이 끊긴 지 80시간 이상 경과했고, 어떠한 돌파나 방어 명령도 받지 못했다. 생존 인력을 보존하기 위해, 1월 18일 새벽 3시 남쪽으로 돌파를 시도한다."
아니다.
돌파의 정확한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시효가 지난 정보에 집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소속 부대.
그렇지 않다면... 요한 그놈이 슐츠를 배신했을 수도 있었다.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
앞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이어서 나이 든 목소리가 같은 위치에서 들려왔다.
네가 자백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아낼 방법이 있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야.
너희들 같은 개자식들이랑 할 말은 없어.
너는 그냥 평범한 병사야. 이 정도로 고집부리지 않아도 돼.
우리는 네 소속 부대와 이 파일에 대한 상황을 알고 싶을 뿐이야.
덩치가 큰 그림자가 슐츠의 곁으로 다가와, 종이처럼 보이지만 분간할 수 없는 물건을 슐츠 앞 테이블 위에 세심하게 펼쳐 놓았다.
슐츠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몰라.
그 봉투에 열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봉투 위 붉은 밀랍 봉인이 조명 아래서 빛났다.
이 파일은 네 몸에서 발견된 거야.
나는 몰라.
우리가 알아낼 거야.
그럼, 너희가 직접 열어보면 되잖아?
하지만 넌 이 편지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
너희가 죽지 않아도 돼.
병사.
또 다른 누군가가 방 밖에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들의 몸에서 무기와 총기 오일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그들도 군인인 듯했다.
그들은 슐츠를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줬고, 묶고 있던 수갑도 풀어줬다. 그런 다음 일렬로 방을 나갔다.
방금 슐츠 앞에 봉투를 두었던 남자가 다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직접 선택할 수 있어.
그 후 그 남자는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손짓하며 함께 나가자고 했다.
경첩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자, 철로 된 이 방 안에 슐츠만 남게 됐다.
(어떻게 된 거지?)
슐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지옥으로 가라앉아 버린 포로수용소나 지난 며칠 동안 요한이라는 신병과 산속에서 동쪽으로 힘겹게 나아갔던 일은 지금 슐츠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요한이 날 배신했을 리가 없어. 적에게 날 팔았을까?
그렇지 않아. 요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으니, 그 역시 적에게 잡혀 온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슐츠는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를 응시했다.
하지만 벌써 2년이 넘었어.
제3 집단군, 제57 보병사단?
돌파했겠지.
그 부대는... 3년 전에 해체됐을 건데?
절대 그럴 리 없어.
자신을 레보비츠라고 소개한 하얀 수염의 노인이 한 말이 슐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편지에서 기묘한 시선이 뿜어져 나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젠장.
슐츠는 침을 뱉은 뒤, 붉은 밀랍 봉인을 뜯기 시작했다.
수술 끝났어.
사실 검증해 볼 시간이 더 필요하긴 한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준비되는 대로 그를 보내자.
그가 해야 일은 적들이 알아서 정할 거야.
그는 우리의 정보원으로 보내지게 될 거고, 그곳 사람들이 그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과거의 적이 전우가 되고, 과거의 전우가 적이 된다라... 흥미롭네.
이 모든 게 네 수술에 달렸어.
그의 지난 2년간의 기억을 잘라냈어. 모든 일이 어제 일어난 일처럼 느껴질 거야.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네가 결정해야 해.
좋아. 문제없어.
그가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아니. 이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어.
흰옷을 입은 사람이 슐츠의 눈을 벌리고,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었다.
술 있어? 아니면 담배도 좋아.
상공의 날씨는 양호하며, 시야도 좋습니다.
무선 전신 측정은 정상입니다. "다가"는 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다가", 귀환해도 됩니다.
문제없습니다. 정리 부탁합니다. 여러분.
산기슭 아래 평원이 보입니다! 아직 20킬로미터 남았습니다!
낮추십시오. 하강하십시오!
예정된 순서대로, "다이오드"가 먼저 출발하세요.
저 배신자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버립시다.
2년이... 지난 건가?
전쟁은 이미 끝난 건가?
내가 적이라면, 내 동료들이 나의 적인 건가?
그게 아니면, 내 적들이 진짜 적인 건가?
그럼, 나는 뭐지?
잠깐...
봉투는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어.
슐츠가 손에 쥔 붉은 밀랍이 비틀리고 녹아내리더니 피처럼 슐츠의 손을 타고 내려가 편지에 스며들어갔다.
악마한테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밀랍에 데인 듯 손이 아파도, 슐츠는 계속해서 그 붉은 "피" 속에서 편지를 끄집어냈다.
네가 와야 해!
전쟁
굶주림
역병
죽음
그 갈릴리인이 올 때, 누가 서 있을 수 있을까?
가라. 아이야.
가서 내 의지를 실현하거라.
이건 슐츠·로더람이 아군 참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는 130킬로미터 떨어진 바들라이 요새에 집단군 최전선 방어 여단의 공격 계획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시간 뒤, 동이 트자마자 출발할 예정이었고, 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담배 있어? 아니면 술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