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27 비석으로 세운 척량 / Story
켈리 포셉... 유압기 주의.
……
눈을 뜨고 싶었지만, 아주 작은 틈새만 열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온 시야를 가득 채운 하얀 빛뿐이었다.
몸이 절개되며 교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고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귀에 간간이 들리는 말들이 이게 꿈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수술톱... 의식의 바다는 어떤가요?
정상이에요.
의식의 바다...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와타나베의 앞에 정말로 바다가 나타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 바다는 죽은 물웅덩이처럼, 요동도, 흐름도 없었다.
바다...
고요한 시야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마치 바다 위에 등대가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등대는 바다 중앙에 굳건히 서서 행방을 모르는 배들을 이끌고 있었다.
길을 잃은 배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물속에서 조금씩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의식이 다시 불안정해졌어요!
연결을 더 강화해야 해요! 우리는 반드시 그를 다시 깨울 수 있어요!
두 사람이 또 뭔가를 말했지만, 와타나베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기억의 소용돌이는 점점 더 강하게 그를 빨아들였다.
그의 의식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으윽......
다시 눈을 떴을 때, 와타나베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몸에 연결된 것은 흔히 보는 종합 의료 기기나 주사관이 아니었다.
와타나베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이한 로봇 몇 대가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가벼운 현기증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와타나베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하지만 울려 퍼지는 것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
의아한 듯 손을 바라본 와타나베는 그것이 금속으로 구성된 것을 확인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리자, 구형 관절로 된 로봇 구조가 와타나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 같군?
익숙한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밸러드... 정말 당신인가요?
그럼, 누가 있겠어?
하지만 모습이...
금속과 인조 피부로 이루어진 인간 형태가 병상 옆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지만,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고 두려움마저 불러일으켰다.
먼저 거울을 한 번 봐.
와타나베는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거울이 현재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로봇이 된 신체, 이마에 새겨진 바코드 그리고 각기 다른 색깔의 눈동자.
상황이 급해서 기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어.
지금 네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설명할게.
너의 부하들이 보급품을 기지로 옮긴 후, 너희가 돌아오지 않자 지휘소에 너희 실종을 보고했어.
그 전에 175호 도시에서 큰 폭발이 발생했었는데, 참모부는 너희가 폭동을 일으킨 침식체들에 의해 175호 도시에 갇혔다고 판단했어.
내가 마침 본부로 돌아가는 길에 175호 도시 주변을 지나고 있었지.
그래서 구조 임무가 자연스럽게 내게 떨어졌어.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 그 아이는 이미 후방 안전 구역으로 보내졌고, 나머지 사람들의 유해도 전부 찾아서 며칠 전에 화장했어.
와타나베가 말을 꺼내려는 것을 눈치챈 밸러드는 미리 와타나베가 묻고자 하는 질문에 답했다.
이제 본론이야. 당시 너의 부상은 너무 심각해서 구조조차 어려운 상태였어.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해 더 높은 생존 확률을 가진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바로 구조체 개조야.
구조체요? 어떤 의체 개조 방식인가요?
비슷하지만 달라.
밸러드는 와타나베와 같은 금속으로 된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의체 개조를 하더라도 최소한 대뇌와 일부 신경 세포 같은 중요한 생물 부위는 남겨두지.
하지만 구조체 개조는 달라. 몸 전체가 금속 장치로 교체돼.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건 여전히 전기 신호지만, 신호를 보내는 부품은 대뇌가 아니라 "의식의 바다"라는 복잡한 구조로 대체됐어.
대략적인 내용은 이래. 구체적인 건 나도 잘 몰라. 나는 과학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된 제가 진정한 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와타나베는 자연스럽게 그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떠올렸다.
배의 모든 목재가 교체되었을 때, 그것이 과연 원래의 배일까?
쓸데없는 걱정이야.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피와 살이 아니라는 이유로 달라지니? 네가 구한 사람들이 너에게 감사하지 않고, 해체된 육신을 그리워할 것 같아?
밸러드는 와타나베의 어깨를 잡고, 그의 눈을 바라보게 했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일들이 개조되었다고 해서 부정될 수 없어. 추구하던 미래도 마찬가지로 바뀌지 않아.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경험이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시간 속에서 남긴 발자취들이지. 개조는 그저 그중 하나일 뿐이야.
누군가가 네 미래를 방해할 수는 있어도, 과거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
……
철학은 언제 또 배우셨어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너보다 적응할 시간과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뿐이야.
내 몸으로 성공한 적이 있는 검증된 개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동의서에 대리 서명을 하진 않았을 거야.
좀 나아졌어?
네.
그럼, 이제 두 번째 얘기를 시작할게.
밸러드는 와타나베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병상 옆 의자에 앉았다.
나는 구조체들로만 구성된 정보 부서를 준비 중이야. 네가 그 팀에 합류했으면 해.
교관님은 안전 정보국의 본부장이었잖아요.
밸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전 정보국은 재난 초기 인력 손실로 지금은 껍데기만 남았어.
게다가 난 인력을 보충할 생각도 없어.
적합한 인재를 찾지 못한 거 아닌가요?
시대가 변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을 뿐이야.
반드시 직시해야 할 것은 구조체의 여러 기능적 수준이 이미 인간을 훨씬 초과했다는 점이야.
물론, 나는 단순히 능력 향상만을 본 것이 아니야.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 이 재난이 끝나지 않는 한, 구조체는 점점 더 많아지게 될 거야.
잠재적인 적은 변화하고 있어. 우리가 제자리걸음만 한다면, 결국 침투당할 수밖에 없어.
적이라니...
밸러드는 와타나베의 미묘한 어조를 눈치챘지만,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의심이 많다고 생각하나?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의견 차이가 있는 한 적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야.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그리고 내부에 숨어있는 적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어.
특별한 적에게는 특별한 대처 방법이 필요하지. 그래서 구조체들로만 구성된 정보 부서를 만들고 싶은 거야.
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
와타나베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기억의 마지막 부분에서 텅 빈 그 자리는 이제 로봇 심장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 심장은 강하고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자신이 왜 이 심장을 가지게 되었는지 잊지 않았다.
저는 어머니처럼 빈 비석 하나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어머니가 남긴 것을 이제야 찾은 것 같아요. 교관님.
와타나베를 괴롭히던 재가 날리는 깊은 구덩이와 떨쳐낼 수 없던 지옥의 환상도 사라졌다.
와타나베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묘 앞에 다시 섰고, 이번에는 짧은 묘비명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전쟁과 함께 이곳에 잠들었고, 평화를 선물로 남겼다.
교관님, 브루스, 코아테스, 에베르트, 카자... 그리고 오아시스 소대의 구성원들이 저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어주었어요.
믿음으로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했고, 그 믿음으로 그들은 저에게 미래를 맡겼어요.
그래서 저는 최전선이 저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주신 선물, 아버지의 기대, 밸러드 교관님과 훈련소 교관님의 훈련 그리고 전우들이 저에게 준 것들...
오직 최전선에서만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 있어요.
저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재난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고 싶어요.
……
허풍 떨지 마. 이런 일이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니?
자리에서 일어난 밸러드는 와타나베가 자신의 신념을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 설득하려 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전선으로 나가기 전에 몸의 적응성 테스트가 우선인 건 알고 있겠지?
이 기회에 그 색깔이 맞지 않는 눈 센서도 교체 신청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요. 시야에 지장은 없으니까요.
몸에 큰 변화도 받아들였는데, 눈동자 색이 변한 것에 신경이나 쓰이겠어요?
그리고 이거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
밸러드가 건네준 것은 와타나베가 18번째 생일에 받았던 산탄총이었다.
와타나베는 손을 뻗어 총신을 잡았다. 그러다가 문득 밸러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아직도 아마추어인가요?
밸러드는 잠시 멍해지더니 총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니. 합격이야.
밸러드는 문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남겼다.
병상에 너무 오래 누워있지 마. 지상과 우주의 통신이 곧 복구될 테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곧 올 테니까.
컨스텔레이션의 공사 인원을 G111선으로 철수시켜 이송해야 한다. 아딜레 상업 연맹의 차량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구룡 상회에서 남하하는 침식체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전술 지도에 업데이트해 주세요. 방어선을 다시 계획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대를 169호 도시에 배치하세요. 그곳에는 대서양 경제 공동체가 기증한 피난처가 많습니다.
한때 세계 정부 대회의 회의 장소였던 이곳은 이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통신이 끊겼던 짧은 혼란이 끝난 후, 이곳은 퍼니싱과의 전투를 위한 지휘 센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뜻밖의 재난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다른 논의할 안건이 없었다.
……
한스는 중앙 홀 상부에 있는 세계 투영 지도를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붉은 역병은 이미 전 세계 육지의 4분의 1과 해양의 10분의 1을 점령해 버렸다.
다시 연결된 인간들은 침식체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병력과 장비의 소모 속도가 생산 속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최신 도입된 구조체들이 일부 전투 구역에서 꽤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체적인 상황에서는 여전히 한참 미치지 못하는 미미한 영향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과학 기술과 군사력의 최고 결정체인 성함 전투군이 지금까지도 연락 두절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성함 전투군의 통제 여부가 인간의 생사를 가를 것이었다.
지난주 북극 항로 연합에서 공동으로 건설한 초고에너지 발사 안테나가 완공된 이후, 세계 정부는 멀리 우주에 있는 함대와의 연락을 계속 시도하고 있었다.
새로운 위성 통신 네트워크를 구축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 안테나는 우주와 연결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 신호가 성함 전투군에 의해 수신될지 혹은 그들이 수신 기능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주가 지상보다 먼저 함락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총지휘자님, 고에너지 안테나 청취소입니다. 대기권 외부에서 신호를 받았습니다.
신호의 강도와 특성으로 보아, 분석팀은 이 신호가 기함 "기적호"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수신하고 응답할지 지시해 주십시오!
즉시 접속해!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전파 너머의 응답을 기다렸다.
저쪽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가 인간의 이후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짧은 몇 초였지만, 마치 몇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기는 세계 정부 소속 성함 전투군 기함 "기적호". 나는 지휘관 신이다.
당신의 소속을 밝혀라. 반복한다. 소속을 밝혀라.
온화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지휘 센터의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돌렸다.
우주는 여전히 인간의 통제 속에 있으며, 머리 위에 드리워진 다모클레스의 검으로 변하지 않았다.
나는 군부 총지휘자 한스다. 지상의 구체적인 상황은 이후에 전달하겠다.
지금은 우주 상황 보고가 먼저다.
알겠습니다!
현재 성함 30척, 국제 우주 정거장, 에덴 Ⅱ형 식민함선 그리고 달 기지가 아군 통제하에 있습니다.
물자는 각 부문에서 6개월 이상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축량이 충분합니다.
통신이 중단된 지 3일째 되는 날, 국제 우주 정거장, 에덴 Ⅱ형 그리고 달 기지의 주둔 인원들과 연락이 닿았고,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무인기를 보내 정찰한 결과, 궤도 위에 있던 240개의 위성은 모두 자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우주 항의 코어 부품 생산 라인이 부족하여 복구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무인기가 대기권으로 진입하자, 방공 화력망의 공격을 받아 추락했습니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서, 강제 돌파나 방공 화력망을 파괴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습니다.
기술 부문에서 임시로 여러 대의 안테나를 제작하였고, 통신부는 24시간 교대로 청취하면서 지상으로부터의 어떤 정보도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통신이 연결된 것을 보니, 이 계획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수고 많았네. 이제 지상의 상황을 알려 주겠다.
3개월 전 점화 의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1호 원자로의 노심에서 발생했다.
이 바이러스는 논리 전기회로에 놀라운 침식성을 보였고, 인체에 강한 부식성을 나타냈다. 원리는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의 보고서를 추후에 전달하겠다.
통신이 부분적으로 복구된 후, 우리는 게슈탈트를 배치한 깊은 우물 역시 바이러스가 발생한 당일 폐쇄된 것을 확인했다.
탈출한 과학 이사회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깊은 우물의 방위 시스템도 바이러스에 침식되었다고 한다. 이는 우주군이 겪은 방공 화력망과 유사한 상황이다.
지능형 무기는 침식되기 전에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과학 이사회가 방화벽을 개선하기 전까지는 그 방어 어레이에 대해 딱히 효과적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주군과 연락이 닿았으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함에서 지상을 효과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건 미사일뿐입니다. 하지만 탑재된 제어 시스템 역시 해킹 위험이 큽니다. 혹시 에덴 Ⅱ형의 우주 무기를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보고를 듣고 나서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선택지라면... 설마 폐기된 위성들을...
그래. 폐기된 그 위성들이야말로 "신의 막대기"의 원재료로 적합하다.
지상 부대는 우주군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침식된 방어 어레이를 파괴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우주와 지상을 잇는 통로가 다시 연결되면, 인간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그 후 한 달 동안, 우주군은 지상의 명령으로 침식된 방어 어레이에 총 115개의 폐기된 위성으로 만든 고밀도 금속 막대를 발사했다.
이 중 21개는 요격당했고, 7개는 예정된 낙하지점을 벗어나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나머지 87개는 목표를 직접 타격하여 침식된 방어 어레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신의 막대기"로 변한 유성들이 차례차례 큰 성과를 올리자, 인간은 마침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우주와 지상 사이의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자, 4차원 타격 체계가 재건되었다.
각지에서 만연하던 종말론, 인신매매, 불법 거래 심지어 세계 정부의 이름으로 설립된 비인도적인 실험 조직들까지 새로 설립된 정화 부대에 의해 하나하나 제거되었다.
세계 정부는 퍼니싱 폭발로 인해 잃어버린 신뢰를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퍼니싱 전투 전체 회의
첫 번째 퍼니싱 전투 전체 회의
퍼니싱이 처음 영점 에너지 원자로에서 나타난 이후, 통신이 두절되면서 우리는 각자 싸워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연락을 재개했으며, 같은 깃발 아래 다시 한번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번 회의는 이후 퍼니싱과의 전투 전략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의견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 의원이 회의실 한쪽 구석을 바라보았다.
과학 이사회 대표님, 이 재난에 대해 어떻게 아무런 말씀도 없으십니까? 당신들로 인해 발생한 일이 아닙니까?
의원님. 오늘 회의는 책임 추궁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
어떤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유감의 표현? 아니면 사죄의 표현입니까?
저희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니트 연구원...
니트의 말에 주위에서 여러 속삭임이 들려왔다. 과학 이사회에 대한 존경심과 추궁해 봐야 소용없다는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화약통에 일단 불이 붙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제가 알려드리죠!
퍼니싱 폭발 후 지금까지 3천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인간 생존 공간의 20%가 점령당했고, 직접적인 경제 손실은 예전 통일 전쟁의 두 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과학 이사회가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나요!
……
니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원시 사회에서 첫 번째 원시인이 타오른 불꽃을 우연히 손에 들었을 때, 그는 불꽃이 자신의 손을 태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원시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불을 다스리게 되었고, 맹수를 쫓아냈으며, 조금씩 야만에서 벗어나 땅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산업 시대의 환경 오염은 반세기 내 70%의 야생종을 멸종시켰지만, 우리는 농경으로 돌아가자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냉핵융합 이론이 나오기 전, 핵분열 원자로가 1년 동안 생산한 핵 오염 폐기물의 방사능을 제거하는 데 수십만 년이 걸렸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원자력 연구를 후회하나요?
니트는 긴 발언에 익숙하지 않다는 듯, 다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탐구를 위해 도덕을 버리지 않지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눈에는 퍼니싱도 하나의 고통스러운 시련입니다. 환경 악화, 온실 효과 그리고 방사능 오염과 마찬가지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극복해야 할 어려움에 맞서겠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방향이 틀렸다고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은 좋군요. 현재도 1호 원자로가 퍼니싱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겁니까?
구조체를 위한 첫 번째 방어선인 역원 장치 개발이 끝나면, 수석님께서 1호 원자로에 들어가 정지시킬 것입니다.
니트 연구원. 인원 선정은 다시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톨리드는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계자 본인만큼 영점 에너지 원자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전 인류가 전력을 다해 맞서야 하는 재난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며,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석이 말한 원문 그대로를 전달해 드렸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전해드릴까요?
의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학 이사회가 입장을 밝힌 만큼, 다른 분들의 의견이 있으십니까?
제가 한두 마디 정도 하겠습니다.
한스가 발언 버튼을 눌렀다.
제가 세운 계획은 대이동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퍼니싱은 퍼지는 특성이 있어서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에든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깨끗한 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 안전지대는 바로 우주입니다.
한스가 버튼을 누르자, 모두의 눈앞에 전술 표식으로 이루어진 투영이 나타났다.
이번 배경 이미지는 복잡한 등고선이 아니라 넓은 항성도와 몇 개의 간단한 궤도선이었다.
우주 항, 성함 전투군, 국제 우주 정거장, 에덴 Ⅱ형 식민함선, 달 기지.
빨간 점이 하나씩 표식을 따라 지나갔다.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구와 달 사이 38만 킬로미터의 전략적 전선을 형성하여, 퍼니싱이 영원히 넘어서지 못할 요새를 만들 것입니다.
전투력이 없는 민간인들을 단계적으로 이동시키면, 우주 항과 성함을 개조할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후속 인구를 수용하고, 다른 생산 기능을 추가하여 안정적인 후방 기지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아울러, 달과 태양계 내 다른 행성들이 우리의 자원 창고가 될 것이며, 일부 개조된 성함이 이런 위치를 오가며 우리의 우주 공장에 산업 원료를 실어 나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고, 적이 더 이상 병력을 보충할 수 없게 된다면, 언젠가 지구상의 모든 침식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점이 되면, 우리는 방해받지 않고 퍼니싱을 완전히 해결할 방법을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 계신 의원 여러분...
한스의 시선이 모든 사람을 훑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세대는 많은 은혜를 누리고, 어떤 세대는 커다란 기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가 그 책임을 이행할 차례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집을 되찾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말이 끝나자, 회의장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한 의원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원래 준비했던 제안서를 휴지통으로 옮겼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로군요.
의원이 먼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박수 소리는 조용한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거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결국, 한스의 계획은 대부분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 계획의 공식 명칭은... 아카디아 대이동으로 명명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