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깨지고 주변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해냈어!
라미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혼자 수격자를 이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로키는 공격에 능한 수격자였다.
하지만 그 기쁨은 1초도 가지 못했다. 라미아가 쓰러뜨린 적이 휘청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전고로 삼은 로키가 상처투성이인 양 날개를 받치고, 좁은 터널 속에서 힘겹게 선회하며 몸부림쳤다.
죽여버릴 거야! 너희 모두 죽일 거야! 다시는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주겠어!!
먼저 공격한 건 너잖아!
혼란에 빠진 로키는 라미아의 호소가 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찬 채, 라미아가 있는 방향으로 온 힘을 다해 돌진했다.
놔! 놔!! 이것 놓으라고!!!
그것은 이 비좁은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녀를 가둔 이 몸뚱이에 진절머리가 난 것일까?
이미 광기에 휩싸인 기러기는 남아 있는 생명을 오버플로의 고통에 의탁했다. 라미아가 피한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방향으로 몸을 들이받았다.
!!
충격은 로키의 상처투성이 기체를 완전히 찢어놓았다. 우리 속 기러기는 마침내 모든 것을 소진했고, 무너진 바닥과 함께 "어머니"의 품으로 떨어졌다.
저건 뭐지?
적조가 사방으로 튀며 그녀의 조각상처럼 평온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의 품에 안긴 로키의 비명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가라앉지 않을 것 같던 분노도 약을 먹은 듯 이상하게도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녹아내렸다.
거대한 나무와 하나가 된 여성은 그녀의 자애로 이 생명의 말로를 감싸안았다.
라미아는 1분가량 멍하니 있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이상한 나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나무의 "뿌리"가 적조 속에 잠겨 있었다. 라미아는 예전에 바닥 아래 있던 적조가 이 "뿌리"에 의해 공급된 것이라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챘다.
방안 바닥에 묻혀 있는 "뿌리"들이 혈관처럼 적조를 운반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나뭇가지 끝에는 혈액 주머니처럼 매달린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뿌리"가 운반해 온 적조를 흡수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 꿈틀거리는 생물들이 몇몇 들어 있었다.
자료에서 본 인공 자궁 주머니와 비슷한 것 같았다.
괴이하게 생긴 이합 생물들이 여기서 탄생한 건가?
적조 속으로 들어간 라미아는 주머니 하나를 떼어내 자세히 관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발밑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느껴졌고, 자칫하면 빨려 들어갈 뻔했다.
히익! 히익!
튕기듯 뛰어오른 라미아는 뿌리가 자신을 감기 전에 적조 구역에서 탈출했다.
라미아는 그 밑에 무언가가 묻혀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적조에 들어가 이상 움직임을 확인해야 했지만, 다리에 느껴지는 끈적끈적한 촉감이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그곳에 다가가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주변을 둘러본 라미아는 다른 것을 찾아 조사하려고 했다.
라미아는 이곳의 벽이 시체 화장로처럼 벌집 모양의 금속 수납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봉인된 수납장을 열고 그 속에서 거대한 단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반들반들한 얼굴에 오관이 보이지 않는 기체가 담겨 있었다.
팔다리가 모두 분해되어 있어. 그리고 기체가 너무 작아. 이게... 혹사?
라미아는 단지를 바로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의아한 표정으로 단지를 두드렸다.
바로 그때, 나무 아래 적조에서 다시 한번 이상한 맥동이 전해져왔다.
…………
시간을 끄는 건 해결책이 되지 못할 거라 판단한 라미아는 무기를 거두고 "릴리안"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릴리안"의 간이 단말기를 꺼내 "릴리안"의 지원군을 호출하려고 했다.
아...
격렬한 전투 때문인지 아니면 간이 단말기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인지, 라미아가 아무리 터치해도 반응이 없었다.
망가졌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한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진, 진정해. 두려울 거 하나도 없어.
엠브리오가 가득 걸린 거대한 나무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라미아는 "그녀"의 몸 아래 적조를 내려다봤다.
이건... 알?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린 듯, 라미아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 붉은 심연에서 심장처럼 고동치는 알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현실감 넘치는 수많은 환각이 그녀의 시야로 밀려 들어왔다.
끝났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
이건 뭐지... 추억? 미래? 내가 그 인간을 죽였다고?
정보의 난류 속에서 의식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라미아의 머리를 터뜨릴 듯이 느껴졌다.
이건 라미아 거야.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거야.
무거운 감촉이... 아기 같아.
몸이 제어 불능 상태로 빠져들자, 의식이 물처럼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크틸라와 함께 이 심연의 바닷속에서 잠들며 안식해.
"열쇠"가 있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것 없어.
아니야. 틀렸어! 이게 아니야!
꼭두각시가 된 인어는 모든 것을 괴물의 손에 맡겼다.
이건 네가 치러야 할 죗값이야. 승격자.
청년의 텅 빈 눈동자 속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열쇠"를 손에 넣었더라도 탑 꼭대기에 오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넌...
마지막 총성이 죽음을 알렸다. 그녀는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끝없는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또다시 의료부의 새하얀 불빛 속에서 두 눈을 떴다.
어... 어머니?
여성의 몸이 녹색 수술 천 아래에 감싸여 있었고, 드러난 상처는 라미아의 눈을 태우듯 아프게 했다.
팀장님. 이 아이가 바로 라비아의 딸입니다.
싫어. 날 보지 마.
저기 사람 한 명 더 있잖아. 구해 줘! 제발 어머니를 구해줘!
하지만 추억은 라미아에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어머니...
커튼 안으로 들어간 라미아가 생기 없는 몸뚱이에 손을 뻗었다.
마침내... 당신 곁으로 돌아왔어요.
제발 저를 받아 주세요. 당신 몸 안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절 버리지 마세요. 사랑해 주세요. 제발... 사랑해주세요.
다시 당신에게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전 반드시... 더 잘할 거예요.
그녀의 감정은 자신과 밀착된 또 다른 존재를 자극했고, 그 존재는 비슷한 슬픔과 그리움에 침식되고 이끌렸다.
그래. 앞으로 한 걸음 더 가. 조금만 더 받아들여...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이 낯선 어머니에게 닿을 수 있고,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야!!
두 손이 뒤에서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
환각에서 깨어나자, 모든 것이 다시 차갑고 고요한 현실로 돌아왔다. 손에 쥐고 있던 알도 방금 전의 놀라움으로 인해 다시 적조 웅덩이로 떨어졌다.
방금 본 광경이 무엇인지 라미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나가 찾던 것이 이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죄, 죄송해요!
연거푸 뒷걸음질 친 "릴리안"은 조금 전에 꺼낸 단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
30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되지 않아서 널 찾으러 왔어. 그런데 넌 여기서 이합 생물을 안고 멍하니 서 있더군. 그 모습을 보고 지휘관이 깜짝 놀랐어.
여기서 로키의 습격을 받았어요.
네?
라미아가 꾸중을 듣고 사과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 그녀에게 다치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적의 습격을 방금 받았다고 보고하면, 루나나 롤랑의 반응은 대부분 전투 결과를 묻는 것이었다. 알파는... 아예 묻지도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로키가 돌진해서 바닥을 부쉈고, 저와 함께 떨어졌어요.
원래부터 상처가 있던 로키는 떨어진 뒤 적조 속에서 녹았어요.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는데, 막상 다가가자마자 환각이 발생했어요.
적조와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침식체로 변하지 않은 게 기적이군.
네. 두 분이 빨리 와주셔서 다행이었어요. 그리고 저도 거기서 몇 초밖에 서 있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옆에 서 있는 인간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자, "릴리안"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이상한 생김새의 작은 녀석들을 만났거든... 아. 바로 저거야.
슈트롤이 입구 쪽을 가리키자, 그곳에는 해양 생물과 비슷한 환영들이 가볍게 공중을 헤엄치고 있었다.
방금 길을 안내한다고 했을 때 이것들이 생각났어.
저도 그것들에 방향을 안내받았어요. 이런 생물들은 전에도 이렇게 길을 안내했었나요?
기억 안 나. 전에는 어떻게 해도 나갈 수 없었으니 길 안내를 받을 필요도 없었지.
한 마리 잡아서 연구하고 싶네요. 하지만 손만 뻗으면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게다가 저를 적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혹사의 초병인 줄 알았어요.
네? 도망가지 않는다고요?
손을 들어 올리자, 해파리 같은 환영들이 다가와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사람의 손에 있는 상처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움직이지 마세요.
조심스럽게 다가온 "릴리안"이 한 마리를 잡으려던 찰나, 바로 사라져 버렸다.
위협적이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일단 신경 쓰지 마. 그것들은 지휘관에게만 가는 모양이야. 그러니 잡아봤자 소용없을 거야.
이것 좀 봐. 승격자들이 갈수록 더 기괴해지고 있어. 이건 도대체 뭐야?
슈트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거대한 나무와 하나가 된 여성을 향해 몇 발을 쐈다.
하지만 여성의 몸에 난 총상은 금세 아물었다. 슈트롤이 다시 몇 발 더 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쳇... 이전 쌍둥이처럼 아무는 속도가 정말 빨라.
아마 그럴 거야.
그냥 놔둘 수는 없어. 바깥 상황은 쌍둥이가 가져올 두 번째 재앙을 절대 견딜 수 없을 거야.
당연하지. 여기서 한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모은 보물이야. 꿈에서도 여길 날려버리고 싶었거든.
하지만 아직 혹사의 의식의 바다 복제는 찾지 못했어.
아마 주위에 있는 벌집 모양 수납장에 있을 거예요.
릴리안의 말을 들은 지휘관과 슈트롤은 바로 수납장 앞으로 다가갔다.
몸통만 남은 구조체... 틀림없을 거야.
몸통만 남은 구조체.
잠시 침묵하던 슈트롤이 갑자기 웃음소리를 냈다.
별거 아니야. 갑자기 막 깨어났을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야.
네?
괜찮아. 지금은 내가 스스로 조립을 마쳤거든! 다음 문제를 처리하러 가자. 참, 고맙다는 말도 해야겠네!
메인 목표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크틸라도 발견했잖아. 이번 전투는 정말 대박이었어.
그, 그래요?
예전에 커피잔 장난감을 받았을 때처럼, 라미아는 순간 기쁨을 느꼈다.
이제 목표물을 찾았으니, 행동을 시작하자. 일단 수납장에 있는 것들부터 꺼내자. 작은 것들이라 위력에는 한계가 있을 거야.
슈트롤은 여러 개의 수납장을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지만 뒤에 있는 지휘관과 "릴리안"은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거기 두 사람, 찬란한 세월을 회상하고 있지 말고 어서 와서 도와줘.
네? 알았어요!
방금 전의 칭찬과 성공적인 은폐로 한숨을 돌린 라미아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방금 올 때도 많이 도와줬잖아.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천천히 해. "릴리안". 이리 와!
하아. 내가 보디가드 겸 보모가 된 느낌이군. 성갑충에서 그랬는데, 여기서도 그러네.
슈트롤의 불평에 "릴리안"은 주눅이 들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도망치는 영화에서 믿음직스러운 캐릭터는 빨리 퇴장한다고 들었어요.
하... 너 나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냐?
음. 아니에요.
슈트롤이 그냥 웃어넘길 줄 알았다. 하지만 슈트롤은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와 함께 이 길을 걸으면서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마치 내가 이런 일을 처음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야.
별거 아니야. 왠지 이 길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뿐이야.
그러다 이곳까지 오면 다시 낯설어져.
슈트롤은 무의식적으로 사탕이 든 주머니를 만졌다. 하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바렐리아가 한 봉지를 통째로 줬어. 그래서 안에 100개도 넘게 들어있었는데, 난 2개만 먹었고 너한테는 1개만 줬어.
기억의 일부가 잘려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혹사가 왜 날 살려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이런 곳에서 날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일 텐데.
생각해 보니, 내가 아직 쓸모 있고 그의 계획 안에 있다는 가능성밖에 없는 것 같아.
쓸모가 있다라...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상황은 혹사의 예상을 뛰어넘었어.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나 대신 바렐리아한테 이렇게 전해줘.
내 흑역사 동영상은 지워. 아니다. 그것보다 그냥 나 대신 바렐리아와 반즈에게 안부 전해줘.
"너희 얼굴은 지겨울 정도로 봤으니, 너무 일찍 나를 찾아오지 마."라고 말이야.
너무 무정하게 굴지 마.
가능하다면, 나도 너희와 함께 돌아가고 싶군.
봐... 우리의 지금 상황이 딱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잖아?
우리는 이제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거야. 그때 "병사"가 희생해서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거야. 그럼 "나이트"는 "공주"를 보호하며 이곳을 빠져나가는 거지.
사람들은 승리에 환호하고, 희생자는 기억되거나... 잊혀지겠지.
미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진짜 악당을 제외한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거나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게 되겠지.
진짜 악당이 누구인지 라미아는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예상하지 못한 반전"보다는 클리셰대로 흘러가는 편이 나아. 적어도 너희는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왜 그래?
이럴 땐 "희망을 잃지 말자.", "방법이 있을 거야." 이런 말을 해야 하지 않나?
인류의 희망이자 영웅인 너마저 이런 얘기를 한다니.
하하... 그건 또 그러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아.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출구도 보이지 않고, 몸도 조금씩 썩어가고 있잖아.
갑자기 눈이 멀면 영웅도 혼란스러워지는 법이야.
슈트롤은 크게 웃으며, 인간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말았다.
좋아.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 발버둥 칠게.
…………
서로를 격려하는 슈트롤과 지휘관을 보며 "릴리안"은 쓸쓸한 듯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네?
이 말 첫머리에 "릴리안"이라는 호칭이 없었다면, 라미아는 감동적인 말에 흔들렸을 것이다.
네. 알겠어요.
여기 없다고 해도, 밖에 침식체와 이합 생물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너처럼 혼자 있는 이가 도움도 청하지 않고,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야.
…………
이 주제는 라미아 인식의 사각지대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릴리안은 평소 블랙 램 소대에 대한 화목한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소대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라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슈트롤이 수납장을 부수는 걸 도왔다.
기괴하고 거대한 나무의 주시 아래, 지휘관 일행은 수납장을 30분가량 부쉈다.
모든 단지를 꺼낸 뒤에야, 나중에 꺼낸 단지의 기체가 전에 꺼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성인의 몸통 같았다.
용기의 몸통이 다를 뿐이겠지.
큰 몸통이 담긴 단지의 번호는 N으로 시작했다. 양이 많지 않았고, 밀봉한 날짜도 최근 것이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이게 뭐든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이것들을 파괴하는 것뿐이야.
이 의식의 복제체들, 기괴한 나무 그리고 나무 속 여자까지 모두 파괴해야 해.
슈트롤은 말하며 마지막 수납장을 부쉈다. 그리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슈트롤의 시선을 따라 마지막 수납장을 봤다. 안에는 외형과 윤곽이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한 구조체가 누워 있었다.
***!
혹사가 나한테도 이런 짓을 했을 거라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어!
***! 내가 어떻게 알아?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슈트롤의 표정에서 그도 "진짜 슈트롤"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망할 승격자...
구출?
슈트롤은 단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본 뒤, 주위에 있는 부상자 인간과 눈을 피하는 꼬맹이를 봤다.
이런 "것들"은 게임에서 명문으로 소환하는 조수가 아니야. 그리고 제작자가 여러 잠금장치를 걸어뒀을 가능성이 커. 그걸 풀 수 없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 깨울 수 없는 짐일 뿐이야.
공중 정원에 데려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슈트롤은 화가 난 듯 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자신이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무슨 이점이 있겠어?
똑같은 내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운이 좋아서 날 도와주는 "자신"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해도, 평소에 좋아하는 걸 나눠줘야 할 거야. 물질적인 거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
바렐리아... 바렐리아는 어떡하지?
함께 하는 내내 매우 믿음직스러웠던 늙은 병사는 단지를 밟고 그것을 향해 주먹을 한 번 휘두른 뒤, 초조한 발걸음으로 단지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1분가량 계속된 자기와의 갈등 끝에, 슈트롤은 다시 밝은 목소리로 발걸음을 멈췄다.
정했어.
다른 것과 같이 폭발시켜 버리자.
* 같은 철학 문제는 집어치워. 어느 게 "진짜 나"인지 알 게 뭐야.
지금 깨어 있는 건 나고, 결정할 수 있는 것도 나야. 이게 뭘 의미할 것 같아? 진정한 나는 바로 지금의 나라는 걸 설명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아.
시작하자! 오랫동안 모아 둔 것들을 드디어 제대로 사용할 곳을 찾았어.
슈트롤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저기... 이렇게 하면 정말 그녀를 죽일 수 있을까요? 이곳은 사방에 적조가 있고, 이합 생물은 적조에 닿기만 해도 회복 능력이 생기잖아요.
"릴리안"은 거대한 나무를 힐끗 바라봤다. 나무 속 여성은 그 속에서 벗어나려는 듯 천천히 몸을 비틀고 있었다.
혹사의 의식 복제체만 파괴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빨리 도망가는 게 급선무잖아요.
도망? 어디로 도망치겠다는 거야? 이런 게 일단 풀리게 되면 온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거야.
알겠어요.
네.
"릴리안"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타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