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의 힘든 전투 끝에 지휘관 일행은 슈트롤이 말한 통로 입구 앞에 도착했다.
앞서 잔햇더미에 보급품을 찾으러 되돌아갔던 것까지 합하면,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최소 10시간 이상은 지난 것 같았다.
이곳의 모든 것이 혹사의 통제하에 있다면, 그가 말했던 "마지막 주사"는 얼마나 더 있다가 찾아올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너무 순조로워요. 이곳이 정말 혹사의 거점이 맞나요?
라미아는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 녀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내가 이곳에서 한 달 넘게 돌아다녔는데, 평소에도 이 모양이었어.
음... 당신은 혹사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는 분명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추격해 오지도 않고, 침식체를 보내 우리를 막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이곳 지형이 이렇게 복잡한데도 우리는 매우 순조롭게 목표 지점을 찾았어요.
그건 그래. 적어도 24시간 이상은 헤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찍 도착하다니. 꼭 누가 안내하는 것처럼 말이야.
하하. 이런 곳에 갇혔는데, 다른 누군가가 정말 있을지도 모르잖아. 예를 들면, 분열 증식해서 유령화된 혹사라던가, 하늘에 떠다니는 괴상한 것들이라던가.
슈트롤이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늘에 속하지 않는 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이곳도 그 승격자도 정상은 아니야. 누가 자기 은신처에 하늘을 나는 고래를 설치해?
…………
어쩌면 환상의 구현일 수도 있어요.
놀이공원과 이 물고기들은 심해 밑에 갇힌 아이의 의식의 바닷속 환상과 같아요.
"릴리안"은 고개를 들고, 하늘에서 수영하는 고래를 올려다봤다.
타인의 의식의 바다를 교란하는 데 능숙한 승격자라도 퍼니싱 침식을 이용해 환각을 일으킬 뿐이에요. 이런 환각은 보통 침식된 사람이나 승격자의 기억과 관련이 있어요.
때로는 병원이나 실험실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원래 그런 기능을 가진 침식체를 이용해...
고정된 환상을 설정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하면 근처의 구조체들이 침식됐을 때 동일한 환각에 빠지게 되죠.
거대한 환상을 디자인한 뒤, 침식체에 다시 입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자기 백일몽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죠.
하지만... 여기는 침식만으로 만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건물 자체가... 하나의 침식체처럼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저도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예요.
가상현실 시설과 침식체를 대규모로 사용해 만든 환상일 가능성도 있어요.
나는 이 가설이 더 믿을 만한 것 같아. 황금시대에도 가상현실 시설을 이용한 테마 호텔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단순 투영이라고 하기엔 너무 실감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 게다가 이곳은 터무니없이 커. 실제 면적이 항공모함보다 더 큰 것 같아.
그 보라색 머리 꼬맹이가 혼자서 이걸 만들 수 있었을까?
루나 쪽의 승격자?
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
어? 뭐? 문이 어디 있어? 잘 좀 봐봐.
자세히 살펴보니 울타리의 모퉁이를 문으로 착각한 거였다.
괜찮아?
슈트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 뒤, 거친 손바닥으로 인간의 팔을 잡고 공포와 불신이 가득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눈이 온통 실핏줄로 가득하잖아. 마지막으로 쉰 게 언제야?
그럴 리가 없는데...
슈트롤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휘관의 얼굴을 감싸 올렸다. 살짝만 힘을 줬을 뿐인데도, 왼쪽 뺨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슈트롤이 만진 피부가 갈라지면서 상처가 생겼고, 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려 가슴에 떨어졌다.
슈트롤은 지휘관의 몸에서 서둘러 손을 뗐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기 손을 쳐다봤다.
너...
얼굴 피부를 가볍게 건드리자, 피부 조각이 지휘관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히익!
퍼니싱 침식이 매우 심각해. 방금 주사한 혈청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이상하네. 이곳의 퍼니싱 농도에 이상이 있다면, 나와 릴리안도 느꼈을 건데.
그런데 봐봐. 이곳의 농도가 높긴 하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야.
…………
"릴리안"은 뭔가를 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가시죠.
시간을 아끼려면 흩어져서 조사하는 게 좋겠어. 혹사가 이 광장에서 세 개의 문으로 들어갔었는데, 각자 하나씩 맡으면 빠를 거야.
저, 저기 왼쪽 문은 제가 갈게요.
늘 소심했던 "릴리안"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음...
라미아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가장 왼쪽 문을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 적조가 가득한 길목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적조가 가득 차 있다는 건 일반 구조체와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혹사가 그곳에 무언가를 숨겼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어요. 어린아이만 지나갈 수 있는 곳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요.
알았어. 왼쪽 문은 네가 가.
슈트롤은 이 비논리적인 말을 바로 납득했다.
때때론 예감을 믿어야 할 때가 있어. 게다가 우리에게는 별다른 계획도 없잖아.
내가 중간으로 갈게. 지휘관은 오른쪽 문으로 가. 저 문은 보기에도 쉬워 보여서 내부 방어도 별로 세지 않을 거야. 지휘관은 부상자니까 좀 더 쉬운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
지휘관이 또다시 잘못 볼까 걱정된 슈트롤은 오른쪽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전...
잠깐만요. 누군가가 오고 있어요.
뭐?! 너 정찰 장치를 가지고 있었어?
나중에 설명할게요! 일단 숨어요!
지휘관 일행은 회전목마 뒤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르겠어. 좀 더 지켜보자.
전투 소리가 멈춘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문 뒤에서 누군가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목마 뒤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민 지휘관은 우리의 문 쪽을 바라봤다.
정화, 완료. 이상, 없음.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물이 우아한 소리와 서툰 말투로 인간의 언어를 내뱉었다.
망할 이합 생물이 이렇게까지 인간과 닮았다니...
쉿!
혹사. 여전히. 로키. 죽이다. 금지.
그는. 로키가. 수호한다고 했다. 하하. 안타까워한다. 안 좋은 점. 더 많다. 그는. 안다.
어머니. 아이. 될 자격. 없다.
종료. 4. 시간 후. 네가. 계속. 정화한다.
알겠어요.
…………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소녀가 지휘관의 입을 막으려고 달려오려다가도, 혹시 지휘관에게 닿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연신 손짓했다.
안 돼요. 그를 부르면 안 돼요.
저건 본인이 아니에요. 쿠로노 쪽에서 복제한 거예요. 기억도 편집돼서 지휘관님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릴리안"은 연거푸 뒤로 물러나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저도 잘 몰라요. 전...
라미아는 "쿠로노"와 "겨울 계획의 관련 인원", 그리고 "배신자"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라미아는 릴리안에게서 들은 소식을 지휘관과 슈트롤에게 모호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듣기로는... 정말로 들은 건데요. 그 사람들은 혹사와 거래하고 싶어 하면서도, 혹사가 목적을 달성한 뒤 뒤통수치고 달아날까 봐 걱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혹사에게는 복제체만 줄 수 있다고 했어요. 본인만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본인은 줄 수 없다고 하면서요.
노안은 항상 공중 정원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바다를 복제하려고 했다면 검사를 받을 때뿐이었다.
과학 이사회에 정화 부대가 놓친 배신자가 있는 건가?
적조가 바다로 흘러간 그 전투 이후, 시몬은 블랙 램 소대가 트집 잡혀 어딘가로 끌려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혹시 그때 한 걸까?
갔다.
그 일은 일단 그만 생각하자. 돌아가서 재조사해도 늦지 않아.
지금은 혹사가 의식을 저장해 놓은 곳을 찾는 게 급선무야. 그놈을 죽여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
지금 가지고 있는 단말기로 신호 받을 수 있지?
좋아. 30분 동안 연락이 없으면 남은 두 명이 구출하러 가는 거야.
이 말은 너에게 하는 거야, 지휘관.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으니까 좀 더 신중해.
여기서 다치면 당장 널 데려가 구조체로 개조해 구해주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아.
감금당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심정으로 자신만의 궤적을 따라 외로운 행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