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자, 오로라 부대의 병사들이 앞쪽 산림에 몸을 숨겼다. 그들을 가까이서 감시하기 위해 지휘관과 에코는 이곳에 간이 텐트를 설치했다.
그들이 잠시 멈췄네요, 분명 이 근처에 기지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다만... 이곳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어서 그래요.
세실리 언니가 죽은 후...
아버지, 대체 왜 그런 일을 하신 거죠?!
음? 아리사? 무슨 일이지?
좋아. 너에게 10분 정도 시간을 주마.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시계를 봤다.
아버지에게 유토피아 수칙을 읊어주려고 온 거니? 그게 아니면, 누가 우리 아리사의 규칙을 어기기라도 한 거야?
잘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전 세실리 언니에 대해 묻는 겁니다!
"선의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공리를 기만하지 않는다, 지혜를 밝히고, 교만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모두 아버지께서 직접 작성하신 규칙이잖아요?
세실리 언니를 실험 대상으로 삼은 것도... 선의와 사랑인가요? 그것도 진리와 정의라고 말할 수 있나요?
물론이지, 아리사.
피크맨은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곳은 현재 이 유토피아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란다.
거기에선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모두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거든.
그러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아리사.
연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나중에 연구가 완료된다면 이 모든 건 더 아름다워질 거란다.
됐다, 아버지는 할 일이 있으니, 너 혼자 가서 놀렴.
피크맨은 웃으며 아리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떠났고, 그녀는 혼자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에요... 이건 잘못됐어요...
이건... 잘못된 거예요.
에코는 가녀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고, 마음속의 "천칭"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피크맨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받았던 교육을 돌이켜보면서 어떻게 피크맨의 "이유"를 반박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정말 이게 옳은 것일까? 진리와 정의, 공정과 질서가... 정말 이런 것일까?
아리사? 여기서 뭐 하는 거니? 후방에 새로 온 구조체들을 받아야 하는데 일손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리고 오늘 당직은 네 차례였잖니.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낯선 구조체 몇몇이 마주 걸어오고 있었고, 오로라 부대의 병사들이 그들을 호송하듯 뒤따르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유토피아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곳이란 말이다, 다들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
이곳은 종말 속의 유일한 유토피아다!
쳇...
정말 그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면, 공중 정원은 왜 이곳으로 이사를 하지 않았을까?
공중 정원은 여기와 비교도 안 돼, 그러니 이곳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
마침 내가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편이라서 말이야.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줄래?
나간 뒤에는 다시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단 말이다!
누가 이런 곳에 오고 싶어 하겠냐고?
너 정말!
병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아리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흥, 아리사. 여긴 너에게 맡길게, 난 따로 볼 일이 있거든.
저 녀석을 조심해. 저기 앞에 서 있는 레나라는 애가 아주 골치 아프게 굴어.
구조체들은... 모두 원해서 이곳에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에이, 그건 그렇지. 저 녀석이 부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선심을 써서 구해줬거든. 그럼 적어도 투입한 의료비는 벌어줘야 도리지.
공평하고 정의로워야지. 공짜로 하는 거래는 없어.
……
알겠어요. 먼저 일 보세요.
병사는 아리사에게 대충 경례를 한 뒤, 서둘러 떠났다. 아리사는 단정하게 답례한 뒤, 돌아서서 이번에 수용된 구조체들을 바라봤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전 아리사라고 합니다. 유토피아에서 기강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저를 찾아주세요...
위선을 부리고 있네.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리사의 말을 끊었다.
쿠로노의 지하 실험 기지인 주제에 어딜 감히 기강 교육을 한다고 그러니?
착한 척은 그만하고, 당신들에게 붙잡힌 이상 나도 어쩔 수 없게 됐지. 그렇다고 해도 그 역겨운 교육으로 날 불쾌하게 하진 않았으면 해.
하지만 방금 그 병사 말로는 당신이 중상을 입었고, 그들이 당신을 구해서 여기로 데려왔다고 했거든요.
레나는 멸시하는 웃음을 지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무슨 말이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좋아.
그녀는 경멸한 눈빛으로 슬쩍 훑어보더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오늘 유토피아로 들어온 구조체들을 안정시키고 나니, 시간은 벌써 밤이 되었다.
오랫동안 점검을 받지 못했던 환기 시스템이 공공 구역에서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리사는 세실리가 가장 좋아하던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의식의 바다가 많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레나의 태도를 봤을 때, 분명 강제로 끌려온 게 맞는데, 그 병사는 레나를 구했다고 주장했다. 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아리사, 잘 기억해, 타인의 말이 다 옳은 게 아니니까, 네 눈으로 직접 봐야 해.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네 귀로 직접 들어야 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내 귀로 직접 듣는다...)
아리사는 눈을 살짝 감은 채,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세실리 언니가 "죽은" 후, 유토피아 내부의 분위기는 조금씩 긴장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출입구의 순찰을 강화했고, 최근에는 "자발적"으로 유토피아에 들어오는 이들도 늘어났다. 에코가 담당해서 안착시킨 것만 해도 벌써 네 번째였다.
아무래도... 레나라는 구조체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에코가 모르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쿠로노"와 "실험 기지"에 대해서 말이다.
깊은 밤. 유토피아 내부의 비행 요새.
레나는 눈을 감고 잠자는 척하며, 밖에서 순찰하는 병사들의 동선을 몰래 살폈고, 조용히 벽에 암호를 남겼다.
쿠로노의 연구 기지를 추적하면서, 이런 "대어"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쿠로노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연구 기지가 있었는데, 공중 정원에서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한 걸음, 두 걸음... 순찰하던 병사가 갑자기 멈춰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
오후에 만났던... 자칭 "유토피아 기강 담당" 구조체?
무슨 일로 찾아왔지? 당신들은 이쪽 구역에서 사는 게 아닌 걸로 기억하는데?
전... 오늘 아침에 당신이 말씀하셨던 것에 관해 묻고 싶어요. 그러니까 "쿠로노"와 "실험 기지"에 관한 내용 말입니다.
몰랐던 거야? 여기에 사는 거 아니었나?
유도 심문을 하려는 거라면 그만해, 난 할 말이 없거든.
유도하는 게 아니에요. 정... 정말 몰라서 그래요.
저흰 이곳을 "유토피아"라고 부르는데, "쿠로노"는 이곳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레나는 침묵하며 면전에 서 있는 구조체 소녀를 관찰했다.
무스 소대는 추적과 잠입 같은 특수 임무에 중점을 둔 소대였다. 레나가 무스 소대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이러한 기술에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아리사라는 구조체는 이 실험 기지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가 위장해서 정보를 떠보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말할 수 없어.
레나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사를 무시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됐네요, 그럼 전 나중에 다시 올게요.
소녀는 복잡해 보이는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돌아섰다.
…………
레나가 유토피아에 들어온 지 10일째 됐다.
깊은 밤이 되자, 레나는 오늘 근무 중에 확인된 지형을 간단히 기록했다. 하지만 비행 요새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필요할 경우 언제든 재조립하고 연결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참 골치 아픈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레나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탈출할지 계산하며 간신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 창밖에서 레나를 부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레나?
또 너야?
이 방은 제가 특별히 당신에게 할당한 거예요. 이 근처의 야간 순찰은 제 몫이거든요.
오늘은 어땠나요?
겉옷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사가 자기 앞에 서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레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또 그 복잡한 예의를 하고 있는 게 뻔했다.
이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순수하고 고지식한 아이가 있는 걸까?
10일 연속으로 매일 밤 여기로 오는 게 지겹지도 않아?
괜찮아요. 어차피 일은 해야 하는 거니까요. 최근 다들 야간 순찰을 꺼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요. 유토피아 수칙에 따르면, 동료들은 서로 도와줘야 하니, 제가 대신 근무하러 왔죠.
바보...
오늘은 시간을 내서 "쿠로노"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유토피아를 "실험 기지"라고 부르는 건가요?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그들은 구조체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고 있잖아, 이곳을 실험 기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사랑의 보육원이라고 부를까?
하... 하지만 여긴 꼭 그런 짓만 하는 건 아니에요...
대체 왜 그리 순진한 거지?
널 포함한 모두가 차기 실험의 재료라고.
왜 여긴 들어올 수만 있고, 나갈 수 없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혹시 여기서 나가본 적 있니?
전...
아리사는 유토피아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유토피아가 하나의 거대한 비행 요새라는 것, 그리고 주위에 수많은 소형 비행 요새들이 유토피아의 메인 비행선 옆에 붙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아리사는 유토피아의 모든 사람이 유토피아의 수칙을 따르며, 같은 질서를 지키는 한, 모두 행복하게 같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또한 알고 있었다. 밖의 하늘은 파랗고, 풀은 녹색이며, 바다는 넓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는...
유토피아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
레나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관찰 기간은 충분했다. 이 아이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그들의 실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들이... 피크맨 의사님이 세실리 언니를 데려갔어요.
전 그들을 막을 겁니다, 그들의 행위는 유토피아 수칙에 어긋났으니까요. 동료들은 서로 도와줘야 마땅하죠. 선의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공리를 기만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켜야 해요...
여러분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섣불리 움직이지 마!
레나의 말은 유토피아의 적막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벽 바깥은 다시 조용해졌다. 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떻게 아리사를 막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벽 바깥에서 다시 가볍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너...
레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 겉옷이 스치는 소리가 먼저 전해졌다.
좋은 밤 되세요, 레나. 오늘 밤 별이 당신의 꿈을 밝혀줄 거예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레나 언니는 더 이상 절 경계하지 않았어요.
휴식 시간엔 가끔 먼저 인사를 건넸고, 바깥세상에 관한 이야기도 해줬고, 또 가끔은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죠.
언니는 저를 보면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어요.
언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어요. 다만 저에게 누굴 만나든 꼭 자기 자신을 잘 지켜야 하고, 쉽게 누굴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했죠.
하지만 레나 언니는... 절 그토록 믿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