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악은 저 때문에 시작됐어요.
제가 없었다면,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피크맨 의사님은 계속 실험을 하고 계셨는데, 가끔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었어요. 그분이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했죠.
피크맨 의사님은 저희에게 적절한 시기가 되면 구조체가 되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구조체가 되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알려주셨거든요. 그래서 전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죠.
제가 개조에 성공한 날, 피크맨 의사님은 매우 기뻐하셨지만...
세실리 언니!
보세요! 저도 개조에 성공했어요! 이젠 저도 구조체가 됐으니, 다음엔 언니와 같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요!
아리사?
개조를 받았다고?
네!
구조체로 개조되면 더 많은 일을 도와드릴 수 있고, 유토피아의 질서 유지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거든요.
이건 제가 신중히 고른 기체예요... 세실리 언니?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난 괜찮아.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래.
구조체가 되다니... 좋아. 적어도 네가 여기를 좀 더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됐잖아.
여기를 떠난다고요? 우리가 함께 임무 수행하러 갈 수도 있다는 말이죠? 저도 그날이 기대돼요!
응. 나도... 많이 기대돼.
세실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피크맨 의사님이 또 뭐라고 하셨어?
언니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개조 수술을 마치고 나서 아버지가 건강 검진을 해주셨는데, 결과를 확인하시더니 언니의 데이터만큼이나 모든 데이터가 좋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마지막 계획이 뭔지 물어봤는데, "어른들의 일"이라고만 알려주셨고요. 아무튼 우리를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고 그러셨는데, 나머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
그렇구나.
그나저나... 나타 언니는 어디 갔어요? 언니가 책 추천해 주겠다고 해서, 오늘 방에 찾아갔더니 룸메이트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유토피아를 떠난 거예요?
응. 떠났어.
나타가... 마지막이었어.
세실리 언니... 어디 불편해요? 의사 선생님한테 갔다 올까요?
아니. 괜찮아.
세실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리사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실리 언니?
아리사, 혹시 내가 예전에 들려줬던 그 동화를 기억하니? 그 앨리사 공주님의 이야기 말이야.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잖아요.
가시밭길을 걷고, 불길에 휩싸이더라도, 마음속에 정의와 착한 마음을 간직한다면 희망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했죠...
그래.
기억해. 아리사.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만 한다면, 두려울 것 없어. 정의의 메아리는 언젠가 대지에 울려 퍼질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유토피아 실험실에서 몇몇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피크맨이 문을 밀고 급급히 들어왔다.
아직도 문제가 발생하나?
네, 의사님. 서로 다른 의식의 바다를 융합하려고 할 때, 거부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걸로 벌써 58번째 외부 실험체 샘플인데, 추출한 의식이 여전히 서로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거부 확률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괜찮아, 실패는 어쩔 수 없지. 진리로 향하는 길엔 수많은 실패가 도사리고 있는 법이니까.
유토피아의 그 샘플들 진척 상황은 어때?
이미 샘플을 투입했고, 의사님의 연구 방향이 정확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그 샘플들의 거부 확률이 27.25%까지 더 줄어들었는데, 과거 의사님께서 언급하셨던...
걱정할 필요 없어, 이미 해결책을 찾았으니까.
배양 접시의 실험 샘플이 이미 준비됐어. 거부 반응을 줄이기 위해, 우선 유토피아의 실험 샘플에서 추출한 의식의 조각을 배양 접시의 의식의 바다에 심을 거야.
배양 접시가 아주 강하다면, 충분히 강력한 의식을 배양할 수 있어.
아버지!
아리사? 무슨 일이니?
외부에서 새로 온 주민들이 난리를 치고 있어요. 배급 물자에 불만이 있다면서, 지금 다른 주민들의 음식과 물을 빼앗아갔어요.
하지만 그 물자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분배한 거잖아요!
화가 나서 호소하는 아리사를 피크맨은 자상하게 바라봤다.
그따위 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단다, 아리사.
아... 아버지?
규칙을 가장 중시하던 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리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리사, 지금 그 상황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결정을 내리면 되는 거란다.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아.
자, 아버지는 실험 때문에 바쁘단다. 이건 정말 중요한 실험이거든.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린 정말... 가족이 될 수 있어.
아리사는 피크맨이 서명한 통지서를 들고 소란을 피운 주민들을 엄격하게 처리했다. 싸움을 일으켜 다치게 한 사람은 유토피아의 가장 외곽으로 추방됐고, 그들의 물자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들은 행동 평가가 우수로 변경되기 전까지 유토피아 주거 지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됐다.
모두 정량대로 분배해 줬고, 부족하다면 노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남의 걸 빼앗을 수가 있는 거지...
어쨌든 오늘 일은 거의 다 끝났고, 휴식 시간까지 조금 남았네.
세실리 언니한테 가볼까!
세실리 언니가 시간이 된다면, 앨리사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주겠지...
세실리 언니?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혔던 어느 실험실 앞을 지나가던 아리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 실험실 안에서 세실리와 피크맨 의사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결정한 거니? 난 아직도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한단다.
널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었어. 실험 샘플을 봤을 때, 그녀의 모든 데이터가 더 적합하긴 해. 하지만 넌... 내 연구의 정의에 더 부합하거든.
충분한 수련을 겪어야 의식의 바다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녀는 아직 그 정의를 만족할 수 없단다.
제가 그녀보다 더 적합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바로 절 선택하지 않으신 거죠?
나타와 그녀들은 모두 제 동료고, 어떤 상황에서든 핵심이 될 수 있는 건... 저뿐입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한번 보고 싶지 않나? 우리의 미래... 유토피아를?
피크맨과 세실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문이 열려 있었으니까, 문틈으로 살짝 확인하는 건... 잘못이라 할 수 없겠지...
아리사는 조심스럽게 문틈을 약간 더 벌려 안을 들여다봤다. 세실리는 차분한 표정으로 아직 가동되지 않은 갑옷 옆에 서 있었다.
그럼... 나타와 그녀들은 모두 안에 있는 건가요?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타, 제카, 아라벨라...
세실리는 애정 어린 눈길로 갑옷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생명의 연속성은 멈추게 되지만, 여기선 누구도 늙지 않고, 죽지도 않아.
이곳... 이곳만이 진정한 유토피아가 될 거란 말이다.
세실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또 다른 준비가 필요하나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녀들과 만날 수 있지.
그럼... 그렇게 하시죠.
세실리 언니!!!
아리사는 피크맨과 세실리의 대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세실리가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예리하게 감지해 냈다.
공기 중의 피비린내가 비에 젖은 녹슨 자국처럼 서서히 퍼져 나가자, 아리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문을 밀치며 세실리에게 달려가려 했다.
아리사? 네가 어떻게...
세실리는 일부러 아리사가 근무하는 시간을 택해서 여기로 온 것이다. 그런데 지각이나 조퇴를 하지 않는 아리사가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 나타났을까?
아리사, 돌아가렴.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죠?
아리사. 언니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러 가는 거야.
두려워 하지 마, 언니가 했던 말... 기억하니?
정의의 메아리는 언젠가 대지에 울려 퍼질 것이다. 폭풍우가 온 하늘을 뒤덮어도, 언젠가는 햇살이 이곳을 비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미안해. 아리사. 언니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허락해 줘.
가능하다면... 날 대신해서 이 세상을 계속 지켜봐 줘.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세실리 언니!!!
기억이 갑자기 중단됐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피크맨 의사님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피크맨 의사님은 아주 무서운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고, 실험에 필요한 중요 재료가... 바로 저와 세실리 언니였던 겁니다.
선의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공리를 기만하지 않는다', 이건 그분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자... 그분이 스스로 파괴한 규칙이기도 하죠.
과거 피크맨 의사님은 계속 저한테 그런 말을 했었거든요, 실험 목적은 우릴 진정한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땐 몰랐어요...
에코는 말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세실리 언니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이 갑옷 안에는... 많은 의식의 조각들이 융합되어 있는데, 일부 의식은 불완전하고, 일부는 가끔 정신을 차릴 때도 있거든요. 대부분 시간엔 언니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니를 생물 무기로 정의했어요. 하지만 연결을 시도한 이들은 거대한 의식의 바다의 반작용에 모두 당하고 말았죠. 오직 저만이 언니와 의식 연결을 할 수 있어요.
피크맨도 왜 그런지는 몰라요. 저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 거 같아요. 언니가 절 보호하고 싶어 하는 건 아는데, 전 그것보단...
언니들이 저와 함께 이 햇살 가득한 세상을 걸을 수 있기를 더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