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는 케르베로스 소대에 차례차례 지시를 내려서 시몬과 노안을 안전한 곳에 옮겨주라고 명령했다.
단말기에서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계획하던 머레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게 냉정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전술, 지시, 보급 의약... 그 외에도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사소한 추억까지도 뚜렷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잘 정돈된 책이 머레이의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다.
이렇게 힘든 순간에 자신을 지탱해 주는 건 형과 보냈던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레이의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마다 엇갈림과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축제 날 밤,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
형이 구조체로 개조되는 걸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우리가 형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속마음을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이 몇 번은 있었다. 하지만 불안, 걱정, 분노 속에 숨겨져 엇갈리고 말았다.
둘 사이에 얽히고설킨 이 작은 조각들은 결국 평범해졌고, 머레이도 잊어가고 있던 어느 날의 오후로 변했다.
시몬은 어때?
죽진 않았어.
베라가 돌아서서 쫓아오는 미친 구조체를 물리쳤다.
위치를 다시 표시했어. 안전 구역으로 계속 이동해.
이봐, 그쪽은 괜찮아?
하, 죽진 않았어.
웃으면서 베라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준 머레이는 투영 스크린을 손으로 빠르게 조작하고 있었다.
흥, 농담 칠 기운도 있는 거야? 내가 뭘 물어보는지 알잖아.
그건 공중 정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평범한 하루"중의 하나였다.
머레이? 늦겠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아, 바로 갈게.
어? 저 구조체를 보는 거야? 낯이 익은데, 널 보러 온 거 맞지?
어, 우리 형이야.
아아! 평소에 말했던 그 "우수한 구조체 군인" 형이구나.
구조체는 평소에 자유롭게 다니지 못한다던데, 가서 인사 안 해도 돼?
으... 응.
머레이는 기대의 눈길로 리 쪽을 바라봤지만, 리는 머레이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비를 확인한 뒤, 뒤돌아보지 않고 임무 예정 지점으로 향했다.
……
파오스에 청강생 신청을 한 지도 한참이 지났다. 학교는 머레이가 공중 정원의 윗선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집 안의 뒷받침이 없는 머레이가 최단 시간 내에 공중 정원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모든 시간을 바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해야 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머레이는 자신이 원하는 포지션에 들어가, 더 높은 곳에서 형을 보호하려 했고, 형은 이 모든 걸 눈치채지 못할 거였다.
그리고 이건 어리고 유치한 머레이가 세운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 옆에서 구조체 군인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있는 동창과 다를 바 없이 머레이도 멀리 서서 바라보는 방관자일 뿐이었다.
머레이는 왠지 형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그 거리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만 같았다.
최악이네. 예정했던 장소가 정신 나간 일부의 연구원들에게 점령도당했어.
상황은 어때?
하... 노안이 시몬을 업고 표식 된 위치로 옮기고 있어. 그리고 뒤쪽에 따라오는 구조체는 없는 것 같아.
수고했어. 그쪽에서 군비와 약을 보급한 후...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한 머레이의 지휘하에, 케르베로스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지휘관과 구조체를 신속하게 옮겼다.
머레이는 에덴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구역 맵과 피난처 분포를 확인한 뒤, 행동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미안해.
앞으론 그러지 않을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그래. 약속했어.
머레이를 지탱해 준 "꼭 형을 행복하게 할 거야"라는 신념뿐만 아니라, 그날 밤 형에게서 온 통신과 작은 약속이 머레이의 마음속에 새겨져서 어두운 길에서 방향을 비춰주는 빛이 됐다.
고통을 숨기지 않고, 진실도 숨기지 않을 거였다. 그들은 서로를 믿고 서로를 의지했다.
지상과 공중 정원과의 거리는 멀지만, 지금도 형과 함께 있다는 걸 머레이는 느낄 수 있었다.
형이 지면에서 인간을 위해 미지의 존재와 싸우는 만큼, 자신도 형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형을 보호하고, 형이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머레이의 몸은 원래 지상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도중에 사고라도 당해서 아무것도 못 한 채 죽어버린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아직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형한테 공유해 줄 일도 많았다.
더 이상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쉬움이 없었다.
더 이상 무능함의 분노가 없었다.
불안, 걱정, 분노 밑에 숨겨져 있던 둘의 속마음도 더 이상 둘 사이의 앙금이 되지 못했다.
머레이... 조심해.
알겠어. 형. 난 원거리 연결만 하고 지상으로 내려가지 않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돌아오면 널 보러 갈게.
알겠어.
형. 기다리고 있을게.
아직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지휘관과 구조체는 모두 여기에 있어.
에덴 맵에서 빠르게 위치를 체크한 머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케르베로스 소대...
형의 심장이 머레이의 가슴에서 뛰고 있었다. 형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머레이가 이번에는 형이 의지하는 존재가 되려고 했다.
이것이 머레이가 약속을 지키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