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통신 너머의 머레이는 형이 이런 시간에 자신에게 통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머레이는 곧 기쁜 미소를 지었다.
형은 아직 지상이야? 지금은 임무 수행 중?
응. 아직 지상에 있어.
이번 임무도 오래 걸리네. 잘 진행되고 있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지?
"내가 도와줄 건 있어?" 머레이는 마지막 한 마디를 뱉어내지 못하고 힘겹게 삼켰다.
일단락된 셈이야. 지금 막 시간이 비어서...
그렇구나. 형은 임무 수행 중엔 거의 나한테 통신하지 않잖아. 게다가 임무가 많을 때면 한두 달 동안 형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도 있고.
그래서 방금 형한테서 통신이 왔을 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긴장했었거든.
어쨌든 형이 무사하면 됐어.
응. 나 괜찮...
윽!
갑자기 말을 멈춘 리가 이마의 역원 장치를 잡으며 미간을 구겼다.
형?! 왜 그래?!
괜찮아.
또 이러네. 형. 방금 그런 모습을 나도 봤는데 괜찮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손을 내린 리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들킨 이상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머레이가 더 걱정할 거 같았다.
방금 거점 근처에 나타난 침식체 때문에 비전투 인원이 휘말렸어. 그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했고 침식체 수량이 좀 많아서 전투 중에 조금 침식됐어.
그래도 역원 장치 덕분에 침식도는 금방 떨어졌고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나한테 거짓말하지 말고...
내 말을 그렇게 믿지 못하겠어?
머레이에게 자신의 기체 상태를 보여준 리가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그걸 본 머레이는 웃지 않고 오히려 슬프다는 듯 말했다.
형은 항상 나한테 숨기는 게 많아. 형은 내 유일한 가족인데 난 계속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아.
형은 나에게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야. 하지만 형은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잖아. 이러면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
"가족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리는 갑자기 축음기 받침대에 적혀 있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호했던 글이 떠올랐다.
"필요하지 않더라도 동생에게 자주 연락해."
어린 남자아이의 형을 지키기 위해 침식체와 전투하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렸다. 자신의 마음 소리 같기도, 시공간 깊은 곳에서 온 메시지 같기도 했다.
리는 이내 머릿속 엉뚱한 생각을 떨쳐 버렸지만,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을 보자, 왠지 모르게 머레이와 통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통신 신청을 보내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리가 자기 손으로 옷깃을 만지자, 옷 밑에 있던 작은 펜던트가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머레이에게 감사해야겠어.
또 말을 돌려... 응? 뭘 감사해야겠다는 거야?
리는 낮에 중력자 탐측 장치를 이용해 지형도를 만들었고, 전자기 투영의 환상에서 투영 장치를 무사히 찾아낸 과정을 머레이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역시 형이야.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다 네가 준 선물 덕분이야. 봐봐. 네가 내 곁에 없어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잖아.
정말로 도움이 됐어?
그럼.
다행이다.
머레이는 입을 달싹였다. 아직 할 말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형... 진짜 괜찮은 거지?
결국 입에서 튀어나온 건 항상 반복했던 말뿐이었다.
하하, 이미 물어봤었지. 무사하면 됐어.
머레이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말솜씨가 좋았던 머레이는 지금 그 기능을 잃은 것 같았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형은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 왜 갑자기 나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형은...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뭘 겪은 거야?
그 슬픔은 나 때문이야?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
머레이,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응?
"가족은...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가족에게 필요한 건 숨기는 게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리는 머레이에게 필사적으로 감추고, 보호하려고만 했다. 날개 밑에서 보호받던 작은 새는 이미 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레이의 날개는 하늘을 날기에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다.
실은 네가 어렸을 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거야?
지상의 어느 창고에서 폭죽을 봤는데 그 축제가 생각나더라.
축제...
그 축제는 머레이도 기억하고 있었다. 폭죽, 함성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팔을 감고 있던 형.
그건 머레이가 처음으로 형이 하는 일이 형이 말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됐을 때였다.
하지만 머레이는 형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해했었다.
그날부터 머레이는 형을 따라잡아서, 형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형이 자신에게 기댈 수 있다면 혼자 어둠 속을 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머레이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것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봉인한 뒤, 짐을 싸서 그의 길을 내디뎠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머레이도 형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지 오래된 것 같았다.
길이 너무 어두운 나머지 머레이조차도 자신이 향하는 곳에 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땐, 네 병이 걱정돼서...
미안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머레이를 대해야 할지 몰랐던 리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형.
알고 있었어.
형이 하는 모든 게 날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한 번도 형을 탓한 적 없어.
형은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고, 난 폐 끼칠까 봐, 형을 도와줄 수 없을까 봐,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어.
형이 뭘 하는지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난 계속... 무서웠어. 혹시 나쁜 소식을 듣게 될까 봐 아니면 어느 날 형이...
머레이는 조금 쓴웃음 지었다.
그때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때 문을 열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
말은 달랐지만 전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형?
내가 한 선택이 정말 옳은 선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어릴 적 선의의 거짓말처럼, 공중 정원에 도착한 후 좋은 소식만 전했다.
거듭된 "선의의 거짓말"은 공중 정원에 있는 동생을 안심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
진정으로 "옳은" 선택이 어디 있겠어?
어떤 일을 할 때 모두 옳은 선택을 한다는 건 보장할 수는 없잖아?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면 돼.
예를 들면, 난 형을 지키고 싶어. 그거면 되거든.
의아한 듯 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머레이가 어릴 적에 만지면 깨질 것 같은 유리 인형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머레이는 충분히 컸고, 어깨가 충분히 넓었으며... 충분히 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선택하다 보면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길 수 있잖아. 출발점이 "옳다"고 해도 일이 진행되면서 우여곡절이 있을 수...
예를 들면... 내가 늦었다고 생각이 들면, 형을 빨리 도와 더 많은 일을 하는 거...
근데 내가 한 선택이 정말 다 옳을까?
미안해. 형. 난...
통신 너머의 머레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돌리며 뒷말을 삼켰다.
통신 양쪽을 지배한 짧은 침묵에서 남은 건 희미한 호흡소리뿐이었다. 머레이는 자신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머레이는 이런 말을 형에게 할 생각이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수렁에 더러워지는 건 자신 혼자면 충분했다. 형은 그 지휘관과 함께 정정당당한 전투를 하며 더 많은 명예를 손에 쥐기만 하면 됐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어둠을 짊어지는 건 자신만으로 충분...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자기 행동이 이전의 형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몇 초가 지난 것 같기도, 한 세기가 지난 것 같기도 했다. 통신 너머의 구조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우린... 비슷하네.
상대방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힘든 건 숨겼다.
그 한마디로 답답한 공기가 풀리면서 머레이는 피식 웃었다.
형이 마음속에 담아 둔 얘기를 해줬잖아. 그러니까 나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앞으론 그러지 않을게.
고통을 숨기지 않고, 진실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니까.
가족에게 필요한 건 숨기는 게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그럼 약속한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그래. 약속했어.
참, 이번 임무가 끝나면, 네가 계속 보고 싶어 했던 그 화가의 전시회 보러 가자.
잠시 뜸을 들인 리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에 절대 어기지 않을게.
알았어. 기다릴게.
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히던 불안감이 천천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이후, 리와 머레이는 근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 둘은 이렇게 마음 터놓고 얘기를 나눈 지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
넌 어때? 일은 괜찮아? 진로는 정했어?
어. 최근 군부의 전술 연락관 직위가 비어서 신청하려고.
전술 연락관? 왜 그걸 하고 싶은 거야? 그 일은 힘들 텐데.
형을 서포트하고 싶어서 그래. 형이 최전선에서 전투하고 있으면 같이 싸우는 거 같잖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임무를 맡게 된다면 내가 형의 전술 연락관이 될 수 있잖아!
음, 그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하려면 공부할 게 더 많아지게 될 거야. 도서관에 <전술 정보 정찰 정리>와 <정보 분배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간 되면 읽어 봐.
정말 대단한데. 그런 것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자료 조사할 때 우연히 본 것뿐이야.
모르는 게 있으면 형한테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내가 언제 네 부탁을 거절한 적 있어?
그래도 무리하지 말고 건강 조심해.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해.
응. 알았어.
형도 전투에서 조심해.
형과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는 거 기대하고 있으니까.
응.
따뜻한 보금자리에 돌아온 그는 보호하고 있던 작은 새를 찾을 수 없었다.
작은 새를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비로소 작은 새가 이미 다 자라서 하늘을 맴돌며 그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달빛이 빛나는 밤하늘에 새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윽고 새 두 마리가 장난치며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통신이 끝나자, 리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속을 뒤덮고 있었던 안개도 서로의 대화 속에서 천천히 걷혔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방금 받은 그 메시지는 도대체...)
(메시지 외에 해독할 수 없는... 코드?)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