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메인 스토리 / 21 각명 나선 / Story
회색빛 별하늘과 끈적한 조수가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 티파의 사상 오염으로 형성된 공간이 완전히 붕해되기 시작하면서, 의식의 바다는 조금씩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검은색 늪이 티파 근처까지 물러났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걸을 힘도 없는 티파가 땅바닥에서 온 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데이터 붕해의 유광이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해 몸 전체까지 확산됐다가 점차 허공에서 흩어졌다.
끝났어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당신의 전자두뇌와 코어 부품은 이미 파괴됐어요. 남은 건 당신의 기억 데이터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금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 것이 아닌 기체를 조종할 수 없어요.
아니... 하하하...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티파의 왼쪽 눈이 붕해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변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는 티파의 입꼬리가 섬뜩할 정도로 올라갔다.
이곳에서 네 기억을 봤어.
너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잖아.
네가 쿠로노에 있을 때... 아니, 더 전에... 그 피... 시체... 그리고 배신...
그런데 지금은 멀쩡하게 이런 약한 소대에 있잖아. 힘들지? 집행 부대보다는 정화 부대가 더 잘 어울리는데.
넌 그런 일에 익숙하니까.
당신...
네 기억을 보고 우린 같은 부류라는 걸 알았어. 넌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걸 참을 수 없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더 잔인한 일도 할 수 있잖아.
소중한 가족, 동료, 지휘관을 잃게 됐을 때, 오늘 내가 한 말이 생각나게 될 거야.
그때면...
펑...
리가 손을 들자, 총알이 티파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체가 두 번 반짝거리다 소리 없이 터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거기까지예요.
총소리가 그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 버튼을 누른 영화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
(역시 이 시점에 제어 버튼이 심어진 건가?)
그때, 제어 버튼의 영향을 바로 해제하지는 못했지만, 리는 티파의 의식 조각을 제거했기 때문에 또 다른 "티파"에게 의식 제어를 당하지 않게 됐다.
(끝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때의 난... 대원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몰라.)
그것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사전 처리로 의식의 바다에 역해킹할 수 있는 히든 명령을 남겨두자.)
(이렇게 하면 문제없겠어.)
……
자아 잠복 모드에서 나왔을 때, 리는 그레이 레이븐의 도움으로 픽업 수송기에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상처투성이 리의 맞은편에 케르베로스 소대의 악랄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리를 바라보며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리, 꼴이 말이 아니네.
그래요? 당신의 모습도 아주 엉망이네요.
몸을 일으킨 리는 베라와의 대화를 중단했다. 그리고 수송기 안에서 전자 스크린으로 본부에 임무 보고 중인 지휘관을 바라봤다.
소중한 가족, 동료, 지휘관을 잃게 됐을 때, 오늘 내가 한 말이 생각나게 될 거야.
（……）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둬서는 안 됐다. 앞으로 그들이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 얼마나 힘든 전투를 치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여서 리는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앞으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사용할 무기와 장치는 출전 전에 다시 한번 꼼꼼히 검사하고 조정해 놔야겠어.)
(그리고 돌아가면 지휘관님께 긴급 통신을 진행할 수 있는 예비 장치를 제작해 드려야겠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
기체의 상처는 응급처치로 끝났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감각이 조금씩 회복되자, 상처에서 신경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런데도 리의 머리에선 만일의 상황과 대처를 정확하게 생각했다.
리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일원으로 더 이상 무모하게 혼자서 싸우지 않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