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부신 빛이 눈에서 번갈아 반짝이면서, 나선형으로 뒤틀린 탑이 시야의 끝에서 나타났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수많은 정보가 날뛰는 파도처럼 무방비한 둑을 향해 밀려들었다. 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휩쓸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다시 시뮬레이션 전투 때로 돌아갔다. 다만 지금 이건 현실이고 시뮬레이션 전투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리는 무수히 많으면서 하찮은 시간의 조각을 봤다. 그건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물방울이 떨어지는 순간도 눈앞에서 수없이 반복되자, 100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이어졌다.
순간적인 것, 끝없는 것, 잡다한 것... 그것들의 정보는 단편적이고 일관성이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추측한 것처럼 이곳에 온 게 처음이 아니라, 이미 100번 가까이 실패를 거듭했다면 이번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실패해야 이 불완전한 정보를 모두 보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엔 의식의 바다 과부하조차 버티지 못하는 걸까?
리는 정보의 난류 속에서 두 눈을 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고 부드러운 어둠이 되어 리를 상냥하게 감쌌다.
그리고 어둠의 끝에서 리는 등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봤다.
마인드 표식?
의식 과부하에 따른 붕괴는 임계치를 넘어서기 전에 멈췄다. 리는 누군가가 자기 손을 잡아준 게 느껴졌고 시각 모듈이 다시 로딩하기 시작했다.
지휘관님?!
정보의 난류로 인한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난 리는 뜻밖이지만 예상했던 모습을 보게 됐다.
왜 이곳에 계세요? 이 탑은 위험해요. 지휘관님이 올 곳이 아니에요!
지휘관님...
…………
그 말을 들은 리는 반박하지 않은 채, 인간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 탑에 막 발을 들였을 때 보았던 정보 조각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그만┘ ┘┘지휘관님 ┘이┘ ┘ ┘죽어.
……!
리는 따뜻한 손이 그를 태우는 낙인이라도 된 듯, 재빨리 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며 의식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연결이 끊기는 순간, 리는 다시 의식 과부하 된 정보의 난류에 휩쓸려 갔다.
이때, 1초라도 방심하면 리의 의식이 영원히 마비되어 타버린 재가 될 것만 같았다.
포기하면 더 이상...
멀리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힘이 빠진 후의 피로감이 몸을 덮쳤다. 하지만 정보의 난류 안에는 리를 계속 찌르는 조각이 있었고 리는 결코 그걸 포기할 수 없었다.
┘ ┘┘지휘관님┘때문에┘ ┘죽어.
이건 첫 번째 실패가 아니고 첫 이별도 아니야.
뭐?
그 기묘하고 환상적인 그림자는 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먼 곳에 있는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갔다.
잠깐만!
환영이 가는 걸 막고 그녀한테서 답을 구하고 싶은 리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피로 물든 자기 손이 보였다.
적색이었다. 자신의 청색 순환액과는 완전히 다른 인간의 피였다.
지휘관님!!
리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손을 물들였던 핏자국이 어느새 따뜻한 손으로 변한 걸 발견했다.
……?
왜 제가 여기에 있나요?
눈앞의 지휘관은 갓 파오스에서 졸업한 듯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는 의아한 듯 주변을 관찰했다.
지금은 오후 2시, 이곳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대기실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제 지휘관님이시죠.
그 말을 들은 눈앞의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틀렸나요?
놀라시다니요?
눈앞의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지막이 웃기 시작했다.
쯧, 그럼, 다시 차갑게 대해 줄게요.
인간이 해석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리는 고개를 돌려 유리에 비친 모습을 봤다.
이화 기체... 재편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금에 비하면 그 시간은 "평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는 그 평화로운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머레이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채 혼자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더욱이 지휘관이라는 사람은 그 직위에 머물러 있는 임무 발령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머레이만큼 중요한 가족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지휘관님.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리는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리기 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더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회의에서 선전하는 구호들 말고요.
좀 더 현실적인 소원이 없나요?
네?
…………
추억은 여기서 뚝 끊겼고, 다시 정보의 난류 속으로 휘말렸다.
지휘관의 소원에 자신은 "재미없어요"라고 대답했었다.
왜냐하면 "웃는다"는 건 매우 재미없는 동작이기 때문에 소원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진짜 소원을 말하기 싫어서 그 자리를 농담으로 넘긴 게 분명했다. 결국 모두가 자기처럼 마음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리는 그때의 자신이 자신만의 생각으로 남을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지휘관은 리의 태도 때문에 냉담해지지 않았고, 자신의 템포로 리의 손에 있는 쿠로노가 남겨준 핏자국을 씻겨줬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람이 씻겨준 핏자국이 또다시 두 손을 뒤덮었다.
난...
먼 과거<//현재>에서 현재<//미래>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보 난류는 사라졌고, 다시 어둠에 감싸였다. 멀리 있는 등대는 여전히 안내의 빛을 비추고 있었지만, 리의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면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지휘관님, 여기에 계시나요?
리는 혼란스러운 의식 속에서 눈앞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의식 연결을 유지하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 탑의 진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대응하는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한 걸음이라고 생각해?
폭풍과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서 리는 다시 한번 그 기이한 그림자를 봤다.
탑에 들어가도, 정보의 바다에 들어가도 넌 그 언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잖아. 안 그래?
너 누구야?!
그녀는 침묵한 채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은 그녀의 동작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
구룡 순환 도시?
여기 주인이 나한테 "구사일생"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
그녀가 말하길 오래된 구룡의 전설 속에 끝없이 흐르는 모래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
어떤 사람이 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강에서 아홉 번을 죽고, 열 번째 환생에서 그는 시체 아홉 구를 발판으로 삼아 강을 건넜대.
슬픈 이야기지? 누군가가 그와 함께한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야?
탑이 예상보다 일찍 강림했어. 이에 준비된 이는 너뿐이고, 나머지 생명은 무의미한 죽음과 희생에 불과해.
그러니 네가 탑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선 스스로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하며 길을 만들 수밖에 없어.
…………!
이런 대가를 여러 번 더 치러야 할 거야. 그리고 한 번 할 때마다 조각을 순조롭게 얻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어. 예를 들면... 지금처럼.
넌 여기에 오래 머물렀고, 후회와 추억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어. 그래서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면서 정보를 가질 수 있는 공간도 없어지게 된 거야.
지금, 네가 이곳에 1초 머무를 때마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봐봐.
그녀가 가리킨 리의 품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리는 무너져 가는 의식 속에서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촉각을 통해 자기 기체가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희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난류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모든 것이 최악의 결과로 치닫고 있었다.
(지휘관님!)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부림치고 싶어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리는 먼 곳에 있는 굳건한 등대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걸 봤다.
결국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등대가 완전히 꺼졌다.
모든 것이 다시 혼란 속으로 돌아갔고 조금 전 힌트를 줬던 그림자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은 절망에 가까운 선고였다.
넌 반드시 "출발점"에 도착해야 모든 것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지금 네 상태라면 이게 끝일 거야.
여기까지 도착했는데도 출발점이 아니라니. 하지만 마인드 표식은 이미 사라졌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괜찮아. 아직 내가 있으니 함께 나아가자.
새로운 등대가 다시 나타났고 의식의 바다가 점차 안정되면서, 머레이의 환영이 리의 시야에 들어왔다.
형의 지휘관을 탓하지 마. 이건 나 스스로 결정한 일이야.
방금 그 짧은 대화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지속된 걸까? 머레이는 언제 탑 안으로 들어온 걸까?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두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의식 연결을 유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을까.
그 그림자가 말한 것처럼 리는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난 형 지휘관만큼 훌륭하지 않아서 그렇게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움직일 수 있겠어?
머레이는 리를 일으켜 세운 뒤, 앞으로 나아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형이 향하는 종점까지 같이 데리고 가 줘.
그곳에 형이 원하는 답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걸 믿을 거야.
형이 나한테 살 기회를 줬으니까, 어떻게든 형을 지켜주고 싶어... 형이 준 이 목숨을 형에게 돌려주고 싶어.
이렇게 돌려받고 싶지 않아.
리는 이렇게 동생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기체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인데, 그" 출발점"에 도착한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시작하는 거야.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가는 길에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리가 머레이의 손을 꽉 잡고, 정보가 모여있는 나선의 중추로 걸어갔다.
고마워.
머레이는 리의 손에서 오는 힘이 느껴졌는지 미소를 지었다.
형은 지금 마음속으로 "왜 고맙다고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겠지?
…………
형은 항상 날 어린애 취급해.
머레이가 리를 부축했다. 그렇게 둘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괜찮아", "작은 찰과상일 뿐이야", "별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너 자신이나 잘 챙겨"... 형은 곤경에 처하면 항상 숨겼어.
작별 인사를 하듯 쓴웃음을 지은 머레이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난 몸도 약하고 쉽게 속으니 늘 걱정만 끼쳤어. 그러니 날 의지하고 싶지 않았을 거고, 무의식적으로 날 멀리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지?
……
근데 그거 알아? 형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난 아버지가 떠나셨을 때의 뒷모습이 생각나.
어렸을 때 형한테 내가 약골이라 짐밖에 되지 않아서, 우릴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닐까라고 물어봤었지.
그때, 형은 부인하긴 했지만, 혼자 삶을 짊어졌고 아무것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아마도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 짐이어서 그런 거겠지. 난 그때부터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돼서 형과 함께 짊어지고 싶었어.
머레이가 콜록 기침을 하자, 코에서 피가 정갈한 양복 위로 흘러내렸다.
드디어 형이 나한테 의지하기 시작했네.
탑의 종점이자, 모든 것의 출발점인 곳에서 형제는 발걸음을 멈췄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형한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뻐.
이번 한 번뿐일지라도 말이야.
머레이는 미소 지으며 리의 붕괴된 시각 모듈에서 조각이 됐다.
…………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출발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의식 과부하로 인한 붕괴도 코앞에 있었다.
리가 손을 뻗어 허망한 빛을 건드리자, 예전에 몇 번이고 뇌리를 스쳤던 화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또다시 이런 대가를 치르고 출발점에 왔네.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희생해야 네 육체로 탑 꼭대기로 가는 길을 만들 수 있을까?
…………
괜찮아. 네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난 항상 "문지기"로서 널 주시할 거야.
그녀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모든 것을 다시 반복되도록 만들어.
메시지...
주홍빛 퍼니싱 속에서 뛰어다니던 정보가 해독할 수 있는 글자로 변했다.
이중합 조각을 가지고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이에게:
여기엔 퍼니싱 언어와 그 고차원적 특성을 가진 자료가 기록되어 있어.
퍼니싱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한 넌 과거로 메시지를 전달해서 이 재난을 다시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어.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슬픈 이별을 많이 겪었다는 걸 알지만, 포기하지 않는 한 모든 걸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
이건 나나미가 모두에게 전달하는 "미래"라는 선물이야.
메시지는 여기까지 읽었으면 충분해.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자료 확인하러 가.
…………
그래도 한 번쯤 급하지 않을 때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휘관, 리브, 루시아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줄래? 항상... 모두를 생각하고 있어.
항상... 모두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
이곳에 살면서 인간을 사랑했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려 했고, 그것을 기회로 바꿔 이곳에 메시지를 남겼다.
리는 그녀의 마음과 유일한 기회를 결코 헛되이 할 수 없었다.
(퍼니싱 속의 언어... 메시지...)
(이게 바로 기시감과 예지의 원인인가...)
(그렇다면 이번엔 나도...)
리는 한계가 오기 전에 자신의 모든 연산 능력을 동원해 과거로 메시지를 보냈다.
Video: 리·초각 버전_스토리_리 계산 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