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이사회를 떠난 리와 머레이는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나란히 걸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리가 머레이의 일과 몸 상태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을 텐데, 이번엔 "같이 좀 걸을까"라고 했던 것 이외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머레이도 말없이 리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형?
머레이의 부름에도 리는 멈춰 서지 않았고, 앞을 보며 머레이한테 계속 걸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평온한 리의 옆모습을 보며, 머레이는 어릴 적 몰래 도시 구역을 빠져나와 "명의"한테 약 사러 갔다가 사기당한 일이 떠올랐다. 당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을 때, 리가 우산을 쓰고 자신을 찾았었다.
머레이를 찾았을 때, 형은 온몸이 진흙과 비로 흠뻑 젖어 있었고, 우산을 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형은 머레이의 손을 꽉 잡고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전방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년 머레이는 형의 긴장된 턱만 볼 수 있었지만, 형이 화가 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형과 나란히 걷다 보니, 자신이 형보다 키가 좀 더 컸다는 걸 깨달았다.
……
조용한 구석까지 와서야 리는 걸음을 멈췄다.
제대로 얘기를 나누는 게 오랜만이구나.
주변을 둘러본 머레이는 이곳이 함교 지역에서 몇 안 되는 CCTV 사각지대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혹시 형이 뭔가를 알아버린 걸까? 머레이는 황급히 기억을 더듬으며, 최근에 한 뒤처리에 실수가 없었는지 부랴부랴 되짚어 봤다.
그렇게 생각하며 형의 표정을 살핀 머레이가 기쁘면서도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네.
확실히 단둘이서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야. 형은 요즘 특화 기체 때문에 정신이 없잖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리가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 작은 칩 하나가 있었다.
이건...
익숙해?
머레이는 즉각 부인하려고 했지만, 리의 눈빛을 보는 순간 포기했다. 무슨 말을 하든 핑계로 들릴게 뻔했다.
이건... 임무 거점을 측량할 때 빌린 도구일 뿐이야.
난 형이나 다른 지휘관처럼 지상 전투를 하지 못하니까.
근데... 형은 이걸 어떻게 찾은 거야?
모든 통신용 원거리 로봇은 임무를 종료하면, 예외 없이 자폭하도록 설정돼 있었다. 그러니 형이 안의 내용을 모르는 한...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난 이 안의 데이터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뭔가를 봤어.
그것의 암호화 수단은 모두를 속일 수 있었겠지만, 난 아니야.
난... 네 형이니까.
……
머레이의 침묵에 리의 마음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머레이를 잘 알고 있는 리는 머레이가 한 말들이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행동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출처가 분명하지 않던 좌표 메시지는 머레이가 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 메시지의 발신자와 목적이 무엇인지 리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보다도 지금 리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이런 위험한 일을 시작한 거야?
언제부터 머레이가 자신과 이야기할 때 이처럼 거짓 가면을 쓰기 시작했을까?
얼굴엔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머레이가 난감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잠깐 리의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는 이런 눈빛이 익숙했다.
그걸 본 리는 옛날 머레이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 머레이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로봇을 만지다가 조금 다친 것뿐이야. 괜찮아. 기계 엔지니어에게 이런 건 흔한 일이야.
잘 들어. 머레이. 형이 잠깐 너와 떨어지게 될 건데. 그래도 걱정하지 마. 모든 게 다 잘될 거니까.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 상황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이건 임무의 일부일 뿐이야. 그 임무에서 얻은 자료도 이미 니콜라 총사령관님에게 전달했어.
모두 총사령관님의 허락을 받고 한 거야. 니콜라 사령관님이 어떤 사람인지 형도 잘 알잖아.
승격자와 접촉하는 것도?
……
형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가볍게 대답한 머레이의 미소에 순간 금이 간 것 같았다.
075호 도시에서 라미아가 네 모습으로 둔갑했지만, 통신이 봉쇄된 상황에서 그렇게 빨리 네 통신 식별 코드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라미아가 마음대로 위장할 수는 있었겠지만,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그녀는 네 코드를 사용했어.
그렇다는 건, 예전에 네가 라미아와 통신으로 연락한 적이 있다는 거겠지.
역시 형은 형이야. 몇 년이 지나도 난 형을 따라잡지 못하겠어.
이렇게 생각한 머레이의 얼굴에 허탈함과 슬픔이 묻어났다.
역시 형다운 추린데.
하지만 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
이미 들켰다는 걸 알면서도 형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머레이가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두 눈에는 리가 읽을 수 없는 것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예전에 머레이가 리를 바라보는 표정엔 기대, 위로, 동경이 있었다. 리가 우는 머레이를 마지막으로 본 건 쿠로노 지하 실험실의 유리 캡슐 속에 있을 때였다. 그게 둘의 "마지막"이었다.
공중 정원에 온 머레이는 점차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리를 쫓아다니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리에게 최신의 미술 전시를 보러 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리는 끝없는 전투에 몸을 던졌고, 머레이한테 보내는 통신마다 "잘 있어." "걱정하지 마."라고만 했다.
수많은 은폐가 겹겹이 얽혀져 만든 장벽이 짙은 안개처럼 둘 사이를 갈라놓으면서, 말속 깊이 감춰진 본심을 흐리게 했다.
머레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편이고 널 믿어.
그러니 나한텐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우린 영원히 모를 거야."
"그럼, 그 침묵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럼, 형은 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나한테 계속 기체 적합에 관한 진짜 상황을 숨기는 거야?
예상치 못한 반문에 리는 순간할 말을 잃었다.
그건...
우리가 형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왜 항상 혼자 짊어져? 우린 가족인데...
나한테 형 얘기를 조금이라도 더 말해줬다면, 그렇게 했다면 내가 이렇게...
윽!
말을 마치지 못한 머레이가 짧게 신음하며 어지러운 듯이 비틀거렸다.
머레이!!
머레이의 몸을 바로 지탱한 리는 동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걸 봤다.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발작은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잖아!
머레이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이 심한 두통을 참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증상은 마인드 표식 오염?!
난 괜찮아. 형.
상황이 이런데, 괜찮다는 말이...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 머레이는 리를 위로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심호흡 두 번 하더니 벽을 짚고 일어섰다.
일시적인 것뿐이야. 지금은 괜찮아졌어. 그리고 형, 잊었나 본데, 나 원거리 연결 테스트를 통과한 지휘관이야.
형 지휘관보다 조금 약할지도 모르지만...
조금 전의 쓰러진 것이나 슬픔이 착각이었다는 듯 머레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함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리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곧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임무 대기 중인 모든 구조체는 즉시 임무 준비 구역으로 이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무 대기 중인 모든 구조체는 즉시 임무 준비 구역으로 이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알 수 없는 전자기 방사선 교란이 감지됐습니다. 모든 주민은 지시에 따라 대피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건 훈련이 아닙니다. 반복합니다. 이건 훈련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둘 사이의 침묵을 깨듯이, 리와 머레이의 단말기가 거의 동시에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표면에 고농도 퍼니싱 반응이..."
"즉시 전투 준비에 진입..."
알 수 없는 전자기 방사선이 새로운 공격 수단으로 의심된다... 설마 방금 전 마인드 표식 오염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모든 구조체는 즉시 비행기 계류장으로 이동하여 지상 전투를 준비하라니... 뭔가 이상한 명령 같아.
케르베로스 소대도 출격 명령을 받았어. 원거리 연결 준비하러 가야겠어.
머레이... 조심해.
위기가 닥친 지금, 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이 말 한마디였다.
알겠어. 형. 난 원거리 연결만 하고 지상으로 내려가지 않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군령 앞에서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리와 머레이는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하고, 전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면 널 보러 갈게.
알겠어.
형. 기다리고 있을게.
20분 전, 공중 정원 의회 로비.
상무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고, 의회 로비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작은 소란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의제에 관해서...
풀리아 삼림 공원 전투 이후, 공중 정원은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곧 인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구출된 사람들은 보고서상에 있는 숫자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활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축한 모든 자원이 엄청난 속도로 소모되고 있지만, 생산 라인은 좀처럼 늘리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몇 차례 전투에서도 자원을 소비했지만, 지금까지도 보충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생활 구역에 대한 자원 공급 감소를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산 표준은... 강요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민함 자체의 자원 배치 또한 인원이 증가할 가능성을 고려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은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게다가 지표면에 자급자족할 능력이 없는 보육 구역에서도 공중 정원의 물자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선 지표면 보육 구역의 재건 속도를 높이고, 지상의 생산 능력을 조금씩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보육 구역과 관련해서 최근 지표면에 여러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는데, 왜 사전 경고가 발령되지 않은 겁니까? 그리고 아직도 자세한 피해 보고가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철수부터 지금까지 공중 정원은 지표면에 있는 대부분 측량대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애초에 측량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대부분 지진은 모두 탈환하지 못한 무인 구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데이터는 위성 관측에 의한 공간 전자기 이상뿐이며, 진원의 상세한 위치나 깊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경고를 미리 내렸다 해도 지표면에서 제때 받아 대처할 수 있는 보육 구역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 지진은 지표면 시간으로 늦은 밤에 발생했습니다.
우린 이미 대부분의 보육 구역과 연락을 취했고, 정비 부대가 지표면에서 복원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지휘부는 대부분의 집행 부대와 지원 부대를 현장에 파견해, 조사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보고 될 겁니다.
다음 의제는 여러 의원님이 함께 제청하신 새로운 구조체 규제 법안으로, 의식의 바다 검사 개방, 구조체의 대화 감청 등 보다 엄격한 감독 수단을 요구하셨습니다.
구조체에 대한 일련의 제한 사항들이 나열된 새로운 파일이 의회 중앙의 옅은 파란색 투영에 나타났다.
다들 이 의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장에서 적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군대인데, 적과의 접촉을 제한하다니 모순되지 않습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최근 2개월 동안 대량의 구조체가 배신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배신한 구조체의 대부분은 아직도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그리고 구조체 병사들 사이에선 "승격자 모집"이 공공연한 비밀이 돼버린 상태입니다.
의식의 바다 검사 개방에 대한 의안은 군부에 승격자가 배치한 스파이가 섞여 있다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일찍 조사했더라면 우리가 입는 피해도 적었을 겁니다. 니콜라 총사령관님은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
오랜 전투는 사람들의 의지를 갉아먹기 마련이고, 최근 겪은 전투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그러니 사기 저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전사는 신념을 품고, 전장에서 목숨 걸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줬습니다. 그들을 지지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신뢰 없는 법안으로 정말로 그들을 옥죄어야 하겠습니까?
하산 의장님. 당신이 항상 구조체의 "인권" 보호를 주장해 왔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배신하려는 구조체들을 감싸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들이 공중 정원 전체를 습격해서 탈취한 우리의 중요 기밀을 수송기로 승격자한테 가져다 바칠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겁니까?
그 의원은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마이크의 왜곡된 전류 소리가 의원의 움직임에 따라 증폭되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넓은 로비에 퍼졌다.
뭐 하는 겁니까?! 이곳은 세계 정부의 의회입니다! 어서 앉으세요!
옆에 앉아 있던 의원이 벌떡 일어나 말리려고 했지만, 도리어 상대방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당신...! 미쳤어?!
배신... 자...
논쟁으로 혼란스러운 로비의 구석에서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조용!
니콜라가 손을 들어 초병을 부르려는 순간, 사람들을 불안에 빠뜨릴 긴급 연락이 의회의 통신에 접속됐다.
죄송해요! [지직...] 긴급 상황이에요! 의원 여러분들은 [지직...] 즉시 회의를 중지하시고 대피 [지직...]!
무슨 일이지? 우선 상황 보고해!
총사령관님! 다행이에요. 아직 [지직...]...
통신을 하면서 달리는 듯한 세리카의 침착한 목소리는 보기 드물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선 비명과 무거운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리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조금 전 [지직...] 지표면에서 강한 퍼니싱 반응이 감지됐는데, 공중 정원이 강력한 전자기 방사선의 영향을 받고 말았어요. 그러고 나서 [지직...] 정신 이상 현상이 나타났어요!
지금은 [지직...] 이 현상의 구체적인 원인을 판단할 수 없어요... [지직...] 이미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우선 사람들이 많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세요!
이곳에 [지직...]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극도의 공격성을 보이고 있어요! 안전을 위해서 무기를 든 사람들에게서 떨어지세요. [지직...]
세리카의 경고가 교란된 전류 소리에 묻혔다가 갑자기 멈췄다.
이 사람들이 설마...
배신자...
정신 이상... 이런, 경비병이 있는 곳을 조심해!
이 배신자들!!
조금 전 구석에서 중얼거리던 경비병이 갑자기 포효하며, 호위해야 할 장관에게 총을 겨눴다.
시커먼 총구가 하산의 심장을 겨눴고, 다음 순간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의회 로비 전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