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레이션 전투 상태에서 벗어나는 몇 초가 리한테는 더없이 긴 것만 같았다.
눈 부신 빛이 눈에서 번갈아 반짝이면서, 나선형으로 뒤틀린 탑이 시야의 끝에서 나타났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의 변화를 겪고 있었다.
……
방금은...
삼킨다는 건 구조체에게 있어 무의미한 행동이지만, 리는 주먹을 꽉 쥐고 의식의 바다 과부하로 인한 구토 환각을 억제하려고 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공중 정원의 과학 이사회인가? 아니면 침식체의 버려진 공장인가 그것도 아니면 쿠로노의 지하 실험 기지 또는 구조체의 잔해더미 속인가?
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서 바라본 광경은 눈 밑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것 같았고,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방금 의식의 바다에서 본 공간은 뭐였을까? 데이터 오류로 인한 이상 투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진짜 같았다.
……!!
윽...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잡을 수가 없었다. 기억 속의 모든 화면에 의도적으로 짙은 색깔의 유채를 뿌린 것만 같았다.
리는 그 기이한 화면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찢어지는 듯한 마음의 고통과 사지로 퍼지는 차가운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감각도 의식의 바다가 평온해지면서 빠르게 잦아들었다.
리는 이것이 기억이 봉쇄된 현상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기억 데이터를 확인했지만, 삭제되거나 조작된 흔적은 없었고 기억 단층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뻔한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았다. 그것도 한번 놓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초 만에 일어났고, 타인의 시점에서의 리는 이미 정상 상태로 회복됐다.
사고는 금세 중단됐고, 리는 캡슐에 누워 난수 기체로 돌아왔다.
방금 제 의식의 바다 과부하 상태가 얼마간 지속됐나요?
3초.
하지만 제 의식의 바다 기록으로는 35분간 지속됐어요.
현재 상태로 봐선, 저 기체를 사용할 때만 이런 상황이 나타나는 것 같아.
안색이 어두운 아시모프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역원 장치의 문제를 해결하니 더 많은 문제가 나타나는군.
우선 이번 적합의 구체적인 파라미터부터 살펴보자.
과학 이사회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고, 모든 이가 적막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번 연구는 과학 이사회 대부분의 연구자가 심혈을 기울인 연구였다. 역원 장치, 특화 기체, Ω 무기... 인간이 가려는 반격의 길에서 모든 과학기술의 결정체가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었다.
집행 부대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가져온 전리품이 연구자의 손에 넘어간 뒤, 인간의 다음 희망이 됐다.
분석 결과가 나왔어요.
이번 상황은 어때?
역원 장치는 정상적으로 실행됐고, 기체 적합도도 98%예요. 하지만...
조금 전 의식의 바다 상황은 비정상이었겠지.
네. 전과 같은 문제예요. 해당 기체를 사용하여 전투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의식의 바다 과부하 현상이 발생했어요.
의식의 과부하는 기체를 변경할 때만 발생하는 현상이야.
가상 연결 테스트 결과와 비교해 보니, 기체 내 탑재한 Ω 무기가 최고 출력으로 작동할 때,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됐어요.
하지만 신형 역원 장치는 정상적으로 실행돼서 침식도가 임계점 직전에 멈추고 낮아졌어요.
그렇다는 건 데이터상으론 이 기체의 모든 것이 정상적인 걸 넘어서, 우리가 예상했던 것처럼 꽤 우수하다고 할 수 있어. 그럼, 특화 기체 중에서도 퍼니싱에 완전히 면역될 수 있는 기체가 될 거야.
우린 Ω 무기가 안정적으로 퍼니싱을 흡수하고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그리고 이중합 조각에서 추출한 데이터를 사용하면, Ω 무기가 퍼니싱을 정화하는 능력을 대폭 상승시킬 수 있어. 게다가 역원 장치를 개선했기 때문에, 이 기체에서 정화 속도가 흡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나타나지는 않을 거야.
이 기체의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그건 우리가 역경을 극복하는 전환점이 될 거야.
"전환점"이라고 말할 때, 아시모프의 목소리가 살짝 쉬었다.
원인 불명의 의식의 바다 과부하는 제가 기체를 변경할 때만 나타났어요. 원인은 특화 기체 자체에 시뮬레이션 데이터에 없는 특이점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강하지는 않았어요.
맞아요. 지속 시간이 처음 0.5초에서 현재 3초까지 늘어났어요. 그리고 리의 의식의 바다 파동이 기계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어요.
다른 구조체였다면, 이렇게 높은 수치에 그들의 의식의 바다가 파괴되고, 기체는 순식간에 침식됐을 거예요.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짧은 시간 내, 의식의 바다에 대량의 정보가 각인되면서, 의식의 바다 과부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리는 3초 이내에 정상으로 돌아왔고, 수치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안정됐어요. 그리고 의식의 바다에 손상된 흔적도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아시모프 님 말대로 이런 현상은 리가 새 기체를 사용할 때만 발생했어요.
하지만 전 각인된 정보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의식의 바다에도 그 어떠한 여분의 정보를 찾을 수 없었어요.
남은 건 리와 머레이만 읽을 수 있는 암호문과 드문드문 의식의 바다에 떠오르는 잠재의식과 같은 단편적인 정보였다.
예를 들면, 전투에서의 주요 좌표나 먼 바닷가에서 조용히 사라진 외침 소리 같은 거였다.
이 일에 머레이가 휘말려 들지 않도록, 암호문의 출처에 대한 조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보고를 늦추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분명히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어...)
하지만 잠재의식 속에선 이상 현상에 관한 리의 탐구를 계속 막고 있는 목소리가 있는 것만 같았다.
"날 믿어."
……!
언젠가 우린 이 기술을 모든 신형 특화 기체에 운용할 거야.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가능한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야 해.
아시모프 님, 제 기억 데이터에 조작됐거나 숨겨진 흔적이 있었나요?
적어도 지금까지 그런 상황은 없었어.
의식의 바다 심층은요?
이론상 너의 의식의 바다 심층을 접촉할 권한이 있는 건 지휘관뿐이야. 그렇다면 상대방의 은폐 수단이 교묘하거나 네 기억 자체가 정상이거나,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어.
첫 번째 상황이라면 내가 신청해서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권한 키를 준 뒤, 너와 심층 연결을 진행하게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경우에 새 기체로 변경할 때, 다시 한번 의식의 바다 과부하 상황을 재현해야 해요.
의식의 바다 과부하 상황이 불안정해서 이런 상황이 됐을 때, 인간 지휘관의 마인드 표식이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예측할 수 없어.
혹은 반대로 지휘관 쪽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지.
그래도 지휘관이 너의 의식의 바다 심층 권한을 개방한다면 뭔가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줄곧 평온한 태도를 보이던 리가 갑자기 강한 어조로 거절했다.
몇 초간이라고는 하지만 과부하 수치가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어요.
이 기체엔 제가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요. 이 문제들을 모두 파악하기 전까지는 지휘관님에게 어떤 불안정한 요소도 노출시켜서는 안 돼요.
어쨌든 전 더 이상 제 눈앞에서 누군가가 위험에 처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아시모프는 한숨을 쉬었다.
또 이러네. [player name](이)가 와서 네 상황을 몇 번이고 물어봤어. 정말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셈이야?
쓸데없이 걱정 끼칠 필요 없잖아요.
만약 [player name](이)가 알게 된다면, 곧바로 과학 이사회에 쳐들어올게 틀림없어요. 제 지휘관이라면 분명 그럴 거예요.
대부분의 경우를 봤을 때, 상대를 속이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야.
……
노크도 안 하고 들어와 버려서 죄송해요. 밖에 롱 님이 계시지 않아서요.
이때, 문 앞에 나타난 온화한 금발의 청년이 반쯤 닫힌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머레이였다.
머레이?
아, 형도 있었구나.
머레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던 리는 머레이가 자신을 의식한 다음, 손에 쥐고 있던 자료를 뒤로 감추려는 동작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머레이가 재빠르게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들켜버렸다.
이 시간에 이곳에 오다니, 니콜라 총사령관님께서 뭔가 전달할 게 있는 거야?
총사령관님께서 이 자료를 전달하라고 하셨거든요. 이미 "모든 절차"를 통과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머레이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건네줬다. 세계 정부라고 적힌 투명한 파일 봉투 안에 구룡 야항선의 표식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참 희소식이네. 나한테 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내뱉은 아시모프가 머레이 손에서 파일을 받아서 보기 시작했다.
머레이, 요즘 많이 바빠?
안 바빠. 요즘엔 전투 임무도 없고, 연락관 일만 하고 있어.
다행이네. 그래도 몸조심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응. 형도.
……
조용한 방 안에 들리는 건 아시모프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5분 후, 아시모프는 자료를 닫고 앞에 꼿꼿이 서 있는 리와 머레이를 봤다.
너희는... 이렇게 격식을 차리는 형제는 처음 보는군. 아니면 요즘 가족들은 다 그렇게 지내나?
자료는 이미 확인했어. 문제없어. 롱이 오면 롱한테 전달할게.
참, 오늘 기체 적합은 끝났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너희들은 알아서 가. 난 바빠서 이만.
말을 마친 아시모프가 돌아서서 떠날 때, 의미심장한 눈으로 리를 봤다.
……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차라리 터놓고 말해.
네가 Ω 무기 특화 기체의 첫 번째 적합자인 건 맞아.
하지만 최종적으로 리브를 선택한 건, 리브의 자발적인 신청 외에도 누군가가 은밀히 너의 우선순위를 낮췄기 때문이야.
머레이인가요.
질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확인됐다.
제가 알았더라면 리브가 그런 선택을 하게 놔두지 않았을 거예요.
저번에 네가 뽑혔다면 이번엔 리브였겠지. 우리 관점에서 보면 결과는 같아.
네 동생이 그런 행동을 한 것도 네가 걱정돼서 그렇겠지.
머레이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머레이한테 너 자신의 얘기는 많이 안 하는구나. 그러니까 머레이가 빙빙 돌려서 네 상황을 물어보지.
딱히...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제가 걱정되는 건 머레이의 안전이에요.
의회를 맴돌면서,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뒤에서 좌지우지하고, 아무도 모르게 목적을 달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때 쿠로노에 있었던 리는 평온해 보이는 수면 아래 어떤 어둠의 소용돌이가 존재하는지와 한번 빠지면 뼈까지 부식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을 제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레이가 어둠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빠져버린다면...
시간 될 때 머레이와 이야기해 볼게요.
그럼, 난 이만 갈게.
머레이, 잠깐만.
같이 좀 걷을까?
음, 그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