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상황은... 방금 제가 말한 것과 같아요.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조사는 중단됐고, 회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자료뿐이었죠.
우연히 폐허에 버려진 로봇을 발견했고, 마침 우리가 필요했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우연의 일치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누군가가 널 그곳으로 유인해서 네가 우연히 그걸 발견하게끔 만든 뒤, 바로 증거를 인멸한 것처럼 말이야.
자연재해를 그렇게 정확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그게 정말로 "자연재해"라면 말이지.
……!
아무런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야. 우리의 급선무는 기체 문제를 해결하는 거니까.
"자연재해"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
리브가 백야 기체를 사용하던 중 침식률이 임계치에 도달했을 때, 승격 네트워크가 연산한 미래를 본 적이 있어.
그래서 재활 기간에 관측된 정보를 보고서로 정리해서 나한테 제출했는데, 그 안에 지구의 "영원한 겨울"을 언급했었어.
그리고 비앙카가 카퍼필드 박물관 하층에서 봤던 "미래" 관련 적조 환상에도 비슷한 화면이 있었어.
아무래도 승격 네트워크와 퍼니싱의 연산 속에선 인간이 수십 년간 지속된 혹한에서 멸망하게 되는 것 같아.
그 말씀은 최근 지진이 그 연산과 관계있다는 건가요?
아시모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빙하기 현상을 유발하는 계기는 아주 다양해. 태양 활동의 변화와 공중 정원의 추락을 제외하면 강렬한 지질 활동이 계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영원한 겨울...
……
……!
(또... 이상한 의식 교란... 이번에도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은 퍼니싱이야.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면 좋겠어. 며칠 전, 이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대책 연구팀을 만들어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는데 통과될지 모르겠네.
손을 들어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아시모프가 전자 스크린에 표시된 초기화 완료의 진행도 알림을 봤다.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난 기체 적합 전에 준비를 시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너희들이 목숨 걸고 모은 자료들을 유용하게 쓰는 게 내 직책이니까.
금세 분주한 상태가 된 아시모프의 뒷모습을 보며, 리는 무의식적으로 옆 주머니를 손으로 만졌다.
그 꼬마 로봇의 로컬 데이터 중에는 아시모프에게 보여주지 않은 동영상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 영상에 기록된 내용 때문에 리의 불안감과 의혹이 정점에 달했다.
그럼, 결론은?
네가 필요한 물건을 공중 정원 수송기에 싣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아?
전 제가 아는 모든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쪽이 실망할 수도 있어요.
그건 내가 정해.
네 능력과 직감은 아직 믿고 있으니까.
그 인어를 놓치지 않은 걸로, 이런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될 줄이야. 그녀에게 그런 가치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
네 치밀한 계산력 덕분일까?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은 걸까?
어쨌든 이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건 쿠로노뿐만이 아니니, 그게 우릴 어디까지 데려갈지 기대해 보자고.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하하, 정보가 샌 것에 놀라지 않네? 니콜라 그 늙은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언젠가 너도 토사구팽 당할지 몰라.
공중 정원의 총사령관님에 대해 잘 아시는 거 같은데, 혹시 두 분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과거가 있었나요?
통화 건너편의 검은 그림자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신용 거래라면,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지 않겠어?
다시 대행자 얘기를 해보지. 그들은 아주 신비로워.
우리의 인력을 총동원했는데도, 결과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어.
원하시는 게 그의 정보라면 실망하게 되실 거예요.
자칭 작가라고 말하는 신비한 대행자는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진실"만 알려주죠. 그래서 당신이 그의 덫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게 해요.
아니. 그게 아니야. 우리가 원하는 건 그의 정보가 아니야.
우리가 찾고 있는 건, 공중 정원이 회수하지 못한 쇼메의 후반부 연구 자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자야.
"자비로운 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이런 게 바로 대어라는 거야.
어떤 미끼를 써야 이 대어를 유인할 수 있을까?
그 대행자 관련 자료는 공중 정원의 정보 부서도 입수한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너한테 맡기는 거잖아.
이 대화에서 쌍방의 목소리와 말투는 모두 특별 처리를 거쳤기에, 성문을 통해 목소리의 주인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의 말투와 습관은 아무리 위장해도 가려지지 않았다. 남들은 몰라도 리는 단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건 머레이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걸 숨긴 거지..)
리는 머레이가 자기 몰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물어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거리, 반복된 대화, 끊임없는 전투, 모두가 족쇄를 메고 전진하고 있었다. 형제끼리 예전처럼 한곳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지가 언젠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리는 더 이상 동생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고, 자기한테 애교 부리는 동생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평안하고 건강한 머레이를 보며, 리는 늘 자랑스러웠다.
머레이가 나날이 바빠지는 모습을 보고, 리는 문득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동생이 이제는 다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같은 피가 흐르진 않지만,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비슷한 감정, 비슷한 고집, 비슷한 침묵 그리고...
숨기는 것까지 닮았다.
형이 워낙 잘나서 일이 빨리 끝났거든. 그래서 머레이랑 있으려고 일찍 퇴근했지.
당연하지. 엔지니어 일은 형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어.
……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졌어. 머레이도 곧 건강해질 거야.
형. 난 세계 정부에서 일하고 싶어.
음... 평범한 전술 연락관 업무를 맡은 거야. 형이 계속 날 먹여 살릴 수는 없으니까.
……
요즘? 잘 지내고 있어. 응. 몸에도 문제없어. 참, 형. 나 승진할지도 몰라!
작은 시험을 치러야 하긴 하는데, 문제없을 거야. 난 형의 동생이니까.
과학 이사회 회의실에 서 있는 리의 얼굴엔 보기 드문 초조함과 진심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계 정부에서 원거리 연결 프로젝트 기술을 사용 중단한다고 선포한 이유는 사용자에게 심각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래. 의식 연결은 지휘관과 구조체의 의식을 동조하게 돼. 그 대가로 지휘관은 극도로 높은 정신적 부담을 받게 될 거야.
심지어 반격 시대 초기에는 원거리 연결의 후유증 때문에 조기 전역한 지휘관들이 꽤 있었어.
눈살을 찌푸린 니콜라가 아시모프에게 경고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평온하게 눈을 들어 니콜라를 바라본 아시모프는 "전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렇다면 왜 원거리 연결 실험 명단에 머레이의 이름이 있는 거죠?
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규정에 맞지 않게 높아졌음을 깨달았다. 구조체가 장관에게 이런 태도로 말해서는 안 됐다.
네 동생은 아주 뛰어나고, 우린 그러한 인재가 필요해. 더군다나 머레이는 몇 번이나 적극적으로 지원했어.
하산은 리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너그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머레이도 너에게 어린애 취급받기 싫었겠지.
게다가 재난이 존재하는 이상,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어.
머레이의 유일한 후견인으로서 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머레이가 임무에서 사고라도 난다면...
만약 우리가 기밀 파일을 마음대로 열람한 행위를 문책할 생각이었다면, 넌 여기에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었을 거다.
넌 이제 쿠로노 소속의 구조체가 아니야. 그때 체결한 협의는 세계 정부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겠지.
아니면 자네 소대에 불필요한 폐를 끼칠 생각인 건가?
……
머레이가 하고 싶은 일을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냥 알고 싶을 뿐이에요.
머레이의 파일은 내가 계속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머레이의 모든 임무를 내 책임 범위 안에 둘 거야.
리, 네가 한 모든 일이 동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걸 알고 있어.
머레이의 건강 상태는 우리가 엄격하게 관리할 거야. 신형 원거리 연결 실험에 통과한 사람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머레이뿐이니까.
우린 승리로 이끌어 줄 모든 불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 하지. 우린 각자 해야 할 책임이 있으니, 이제 네 소대로 돌아가.
준비됐어.
시설이 가동되는 소리가 리의 생각을 끊었고, 아시모프는 캡슐 앞에 서서 새 기체를 내려다봤다.
준비 완료. 오늘의 기체 적합 실험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