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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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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기억 심층의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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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정원, 12:30 PM

데이터 복구를 실행할게요.

>>>>데이터 복구 실행 중

>>>>복원 진척도 89%, 손상이 심한 부분을 건너뛰고 재생합니다.

……

재생된 건 하나의 음성 메시지였다.

"다음 이론은 누구한테도 얘기한 적이 없다. '스폰서'도 아직 이 자료의 내용을 모른다. 그리고 이 자료를 찾을 방법은 오로지 승격자에게 있다."

"지금 이걸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난 죽었겠지. 하, 죽은 사람에겐 비밀이 없으니까."

"이건 내 연구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이 방향의 끝은 근원적인 지식에 닿게 될 거야.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것이 가져올 미래는 승격자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거야."

"게다가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그건 불가능해."

"퍼니싱의 언어 혹은 코드라고도 할 수 있어."

"그 진리에 도달하는 키는 더 높은 차원의 공간에 숨겨져 있어. 시간도 지배할 수 없는 우리가 그곳에 도달한다는 건 말도 안 돼."

"퍼니싱이 어떤 고차원 문명의 선별 도구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던져진 종자일 뿐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그것이 무질서하게 번식하면서 온 지구를 뒤덮어 버렸어."

"어쩌면 인간들은 천만년 후에 이 지식을 얻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순전히 이론적인 가설일 뿐, 허무 그 자체야."

"그래도 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이 예비 단말기에 남겨 두겠어. 가치가 있든 없든 연구 성과 자체가 묻혀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오디오는 수십 분간의 공백 상태로 있다가, 마지막으로 광기 어린 혼잣말을 남긴 뒤, 음성 메시지는 뚝 끊겼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자면..."

"'자비로운 자'..."

음성 메시지는 여기서 끝났다.

첨부 파일엔 대략적인 이론 모형이 들어 있어요. 쇼메가 부정한 연구 수단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거예요.

이 모형만 있다면, 이중합 조각 속 정보의 해석 효율이 최소 23.5%는 향상될 거예요.

새 기체엔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많지만, 이중합 조각 속 정보가 결정적일 거라는 예감이 들어요.

요즘 넌 이런 "예감"이 자주 드는 것 같네?

……

아시모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얼굴을 찡그린 채 앞에 있는 자료를 한 줄 한 줄 꼼꼼하게 읽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아시모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확실히 일리가 있어.

이 모형을 응용하면 이중합 조각의 해석 속도를 대폭 높일 수 있어.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자료의 존재는 당분간 의회에 알려지면 안 돼요.

출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인 건가?

네.

이게 규칙 위반이라는 건 알고 있지?

특화 기체 적합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 뿐이에요. 제가 왜 아시모프 님을 찾아왔는지 아시잖아요. 정규 절차를 밟았다면...

내가 무의미한 내적 소모에 관심이 없는 건 맞지만, 바보같이 너한테 말려들 생각은 없어.

게다가 난 특화 기체 프로젝트의 유일한 담당자가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들은 조만간 과학 이사회 연구자들에게 공개될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합리적인" 출처가 필요해.

알겠어요.

제가 적합 실험에서 수신한 이상 데이터는 이 자료 자체가 아니에요.

하나의 좌표였어요.

지상, 1주일 전.

통상적인 지상 전투 임무였지만, 임무 수행 완료 후 "겸사겸사"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 리는 그레이 레이븐과 함께 출동하지 않고 전투 지점 변경을 신청했다.

과학 이사회 연구자들은 이상 데이터로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지만, 곧바로 해석할 수 없는 단순 프로그램 오류로 처리하고 해석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역원 장치와 기체 연구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는 기체 적합을 종료한 후, 우연히 그 코드를 해석해냈다.

그건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마침 그 데이터에 대한 알 수 없는 익숙함의 출처도 알 수 있었다.

...암호 해독에 사용된 키는 어떤 세력이나 소대의 기밀이 아닌 아이들 사이의 단순한 게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그건 리와 그의 동생 머레이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키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수수께끼가 쉽게 해결될 거야."

키와 암호?

맞아. 이런 암호의 가장 대단한 점은 그 내용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거야.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키가 없다면, 그 정보가 눈앞에 있어도 넌 그 정보의 뜻을 해독할 수 없거든.

대단하지? 몇 개의 숫자나 글자의 배열을 바꾸거나 전치해서 암호화했을 뿐인데, 남이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가 돼 버렸어.

그리고 사용하는 원리도 매우 간단해.

대단해...

사실 나도 며칠 전에 읽은 거야. 공공 도서관에 이런 책들이 많은데, 머레이도 보고 싶으면 내일 가서 더 빌려 올게.

응!

고개를 숙인 머레이가 알 듯 모를 듯 손에 든 책장을 넘겼다. 책 속에는 형이 쓴 메모지와 비고로 가득했다.

형이랑 같이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좀 더 건강해지면, 그때 같이 나가자.

응...

참, 머레이.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만들지 않을래?

만들 수 있을까?

물론이지! 우리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소통 방식이라니 멋지지 않아?

어디 보자. 암호화 방식은.... 아, 그걸로 하자.

위치 추적 성공의 알림음이 잠시 추억에 잠겨있던 리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리는 고개를 젓더니 시선을 손에 있는 전자 맵으로 옮겼다.

맵에는 최단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임무 지점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흔한 건물 폐허였다.

침식체 신호 반응이 없네...

집행 부대가 이곳에서 침식체와 교전을 벌인 뒤, 대부분의 위협을 제거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근처 에너지 공급 센터가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이 구역의 재건 작업은 종료됐다. 그렇게 이곳은 맵 상에 방치된 수많은 탈환 지역 중 하나가 됐다.

좌표가 산출한 정보론 반경 200미터의 오차가 있네. 일일이 조사할 수밖에 없겠어.

이건 머레이가 나에게 준 메시지일까? 왜 옛날처럼 통신으로 직접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

리는 우회적으로 머레이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건 동생의 의아해하는 눈빛뿐이었다.

이게 함정이라면, 너무 단순한 것 같은데.

정해진 임무 종료 시간이 40분이 채 남지 않았어. 일단 찾아보자.

찾는 과정에서 한 줄기 시선이 리의 주의를 끌었다.

이건...

이 로봇은 이곳에 버려진 다른 로봇과 달리, 방금 멈춘 것처럼 먼지가 거의 없었다.

로봇은 구석에 조용히 쓰러져 있었고, 꺼져버린 전자 눈은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듯 리의 방향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리는 앞으로 다가가 로봇의 몸을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황금시대 말기의 가정용 로봇... 아니, 이를 기반으로 개조한 건가? 침식된 흔적은 없어.

이 모델... 참 오랜만에 보네, 그때가 생각나는군.

비밀의 코드, 너무나 익숙한 로봇, 눈앞의 모든 것이 왠지 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 같았다.

에너지 부품 점검... 손상 정도 23%, 운이 좋군.

이건... 자폭 프로그램?

가정용 로봇에 왜 이런 프로그램을 탑재했지?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설정처럼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았다. 로봇이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든 시스템이 강제로 폐쇄된 것 같았다.

자폭 프로그램의 영향을 해제한 후, 가정용 로봇의 전자두뇌에 접속해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역시 제거됐어.

이 정도는 리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리는 구조체가 된 다음에야 로봇 구조와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 기능을 가진 게 아니었다.

처음엔 숫자와 수수께끼에 대한 아이의 단순한 관심에서 시작됐고, 청년이 된 후에는 기계 공학과 디지털 프로그램에 매료됐다. 그 후에는 살기 위한 생계 수단이 돼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 자신도...

생체공학 로봇?

음, 형이 일하는 데서 연구하는 과제야.

응. 알아. 그리고 신경망 알고리즘과 확률적 프로그래밍도 있었지? 형이 읽는 책들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어.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생체공학 로봇을 결합한다면, 사람보다 훨씬 더 강한 로봇을 만들 수 있어!

형도 만들 줄 알아? 언제쯤 형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거야?

음... 아마 오래 걸릴 거야. 네가 하루빨리 수술받는 게 지금 가장 급한 일이니까.

응. 형은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형도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참, 형. 저번에 남겨준 프로그래밍 문제 말인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

……

모리안은 책 속에 빼곡히 적힌 메모와 컴퓨터에 가득한 코드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는 머레이가 집에서 혼자 심심해하지 말라고,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가르쳐 준 거였다.

하지만 머레이는 모리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자신에게 어려운 지식과 기술을 흡수하려고 했다. 마치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를 쫓아다니는 아이처럼 자기 몸 상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푹 쉬라고 했잖아. 이거 하는 데 얼마나 걸렸어?

음... 사실 얼마 안 걸렸어.

다음부턴 이러지 마. 눈에도 안 좋아.

응...

머레이는 다소 의기소침하게 고갤 숙였고, 푸른빛이 도는 컴퓨터 스크린도 오래 대기했는지 수면 모드로 전환됐다.

모리안은 자기 동생이 똑똑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병약한 몸은 메레이의 뇌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게다가 그의 멘탈도 같은 또래의 대부분 아이들보다 강했다.

그래서 머레이의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을 보면서 모리안은 거절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모리안은 머레이의 부드러운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후, 책상 위 책을 들어 컴퓨터 스크린을 다시 켰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우리 함께 해결해 보자고.

잘 봐. 여기 이 코드는...

눈앞에 있는 로봇을 조사하면 할수록 리는 이상할 정도의 익숙함을 느꼈다.

정보 전달 매개체로 사용된 이 로봇에 잔류한 기억 데이터는 여러 번의 입력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데이터 발원지의 추적 행위가 차단된 걸 보니, 상대의 수법이 상당히 정교했다.

게다가 로봇을 가동하는 기본 코드도 매우 복잡하고 흔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리는 이런 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리의 코드 쓰기 습관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매우 영리한 수법이지만, 나한텐 어설프게 느껴져.

그게 너일까?

머레이일까? 리는 이런 것들을 머레이에게 손수 가르쳐 줬다. 공중 정원에 와서도 공공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머레이는 수시로 통신을 통해 수업 중 모르는 부분을 형에게 보내곤 했다.

쿠로노에선 구조체가 통신으로 주고받는 모든 메시지를 감시했기 때문에, 리와 머레이는 암호문을 통해 교류했고 메시지 곳곳에 전하려는 말을 숨겼다.

리와 머레이의 휴식시간은 늘 엇갈렸고, 통신에도 "비밀"이라고 할 것 없는 일상적인 안부였다. 하지만 키를 사용해 해독한다는 건, 형제지간의 마음속 깊은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었다.

라미아가 머레이 행세를 해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승격자 주둔지로 끌어들였을 때, 리가 그녀의 위장을 간파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머레이" 자체의 수상함 때문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머레이에게 암호가 담긴 메시지를 전송했지만, 익숙한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자음

분석 완료했습니다.

복원할 수 있는 데이터가 한정돼 있어서, 리는 대부분 파손된 코드에서 자신이 찾고 싶은 걸 찾았다.

이다음의 일은 폐허에서 할 수 없겠어.

리는 정보가 저장된 메모리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합류할 시간이 됐어.

바로 이때,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묵직한 폭발음이 땅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길게 이어지더니 지면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편과 콘크리트가 줄줄이 땅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큰 먼지를 일으켰다.

리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에서 넓은 광장으로 나왔다. 이윽고 고층 건물의 대문이 리의 뒤에서 와르르 무너지면서 쌓여있던 로봇을 모두 묻어버렸다.

폭발인가? 이렇게 강한 진동이라면 폭발이 발생한 근원의 주변은 심하게 파괴되었을 것이었다.

주변 소대에 긴급 상황을 보고해야겠어!

근처엔 침식체 반응이 없었고, 퍼니싱 농도도 안전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진동은 전 세계가 격렬하게 흔들리듯 계속됐고, 공기 중에서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균열은 마치 독사처럼 벽과 지면의 구석에서 번져 나와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이건!

지진... 지진이다!

어서 도망쳐!

임무 지점에서 500미터 떨어진 쇼핑몰 폐허에 스캐빈저 무리가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곳은 스캐빈저들이 1주일간 휴식을 취한 거점이었다. 입구로 통하는 문은 침식체의 침입이 걱정돼서 일찌감치 막혀 있었고, 스캐빈저들은 오른쪽 안전 통로로만 드나들었다.

안전에 대한 보장이 도리어 탈출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스캐빈저들은 모든 짐을 버리고 계속 흔들리는 건물 속에서 도망쳤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갉아 먹힌 폐허 건물은 격렬한 진동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낡은 천장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스캐빈저들의 유일한 생의 희망을 막아버렸다.

출구가 완전히 막히기 전, 탈출하는 사람들의 맨 끝에 있던 스캐빈저가 자기 옆에 있던 아이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동작으로 인해 스캐빈저는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기울어진 콘크리트 벽에 더 많은 돌이 무너져 내렸고, 죽음의 수레바퀴처럼 스캐빈저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

진동은 잠시 멈춘 듯했지만, 시야는 조금씩 어두워졌고 폐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눈에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침식체의 습격과 적조의 위협을 피했다. 하지만 재난은 주홍색 퍼니싱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황량한 종말에 도움을 청하는 외침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땅속에 갇혀 자기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의식을 잃을 무렵에 스캐빈저는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생존자 신호 발견... 비켜주세요. 여긴 제가 맡을 게요!

윽!

세 번째 무거운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어 올렸을 때, 팔에서 탄탈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통각 신호와 신체 손상 경고가 의식의 바다에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즉시 통각 경고를 닫은 리가 힘껏 콘크리트 덩어리를 들어 올린 뒤, 깊은 어둠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 있나요? 대답해 주세요!

스캐빈저

콜록...

전 공중 정원 집행 부대의 구조체예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금방 구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