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p.m.
043호 도시 보육 구역을 떠난 지 32시간 만에 소녀는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
리브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입가의 떨림에 목소리가 막혔고, 다리의 통증보다 가슴에 무언가 박힌 듯 아팠다.
그녀가 몇 번을 확인해도 앞에 있는 소년은 이미 차갑고 생기가 없었다.
오후의 햇살은 따스함을 전하고, 부드러운 바람은 천정을 지나 텅 빈 건물 속을 지나갔다.
자유로 가는 출구가 코앞에 있었지만 이곳에 갇힌 사람들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난 아무것도……
요 며칠간 마음속을 짓누르던 슬픔은 이미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까지 쌓였고,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감정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가냘픈 목양견은 죽은 주인의 곁을 맴돌며 그의 굳어 있는 피를 핥았지만, 상처는 더 이상 아물지 않았다.
성냥이는 고개를 돌려 그 붕대를 사용하라며 코로 리브의 손을 부딪쳤다.
…………
하얀 모습이 고개를 숙인 채 보고 있는 것은 31시간의 우여곡절이 주는 선물이었다.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을 때——
무수한 붕괴와 장애물을 피하고 침식체와 이합 생물의 포위를 뚫고, 과적된 구급차 2대는 13시간을 이동한 끝에 046호 도시의 보육 구역으로 들어갔다.
루시아의 예상대로 그곳에 머물고 있는 무장한 청소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충분한 무력으로 ‘교류’가 오고 간 끝에 그들의 대장은 구조체들과 ‘우호적’으로 논의하는 것에 동의했다.
꺼져! 이곳 사람들은 구조체한테 좋은 감정 따윈 없어!
이 보육 구역은 원래부터 우리 자리였다. 전에 약속하고 재건에도 참여했지만, 공중 정원은 그걸 다른 이들에게 넘겼지.
드디어 우리 것을 되찾았는데, 공중 정원의 개들인 너희가 주인을 대신해서 사람을 물려고 온 건가?
아니. 우린 단지 차에 타고 있는 부상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을 뿐이야.
하, 핑계는. 예전에 그들도 ‘안 좋은 상황이니 더 필요한 사람에게 양보하라’면서 우리를 재건이 필요한 다른 장소로 내몰았었지!
그,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이합 생물들의 습격으로부터 철수해야 했어요. 그리고 공간도 쓸데없이 쓰지 않을 거예요. 우선 저희가 하는 말을 듣고 다시 판단하셔도 늦지 않아요.
리브는 함께 있으면 좋은 점에 대해 알려줬지만, 상대방은 계속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들을 타협시킨 것은 043호 도시에서 발생한 이합 생물의 재난이었다.
그리하여 그 타협의 대가로 그레이 레이븐 소대 외의 구조체가 그곳에 남아 046호 도시 보육 구역으로 올 수 있는 이합 생물들을 정찰하고 방어해야 했다.
상황이 심각한 만큼 나도 이 시기에 더는 고집부리지 않겠다. 함께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땐 우리 사람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부상자를 데리고 들어가도 좋다. 약속한 건 잊지 말도록.
걱정 마. 난 한 번 한 약속은 절대 어기지 않아.
부상자와 난민의 수용을 해결한 뒤 046호 보육 구역은 다른 구조체들에게 맡기고,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다시 043호 도시로 돌아갔다.
문제를 해결한 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다시 043호 도시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043호 도시 외곽의 비교적 평탄한 황야가 아니라 붉게 물든 절망이었다.
그 적조들의 양은 075호 도시 때만큼 맹렬하지는 않았지만, 043호 도시 외곽을 둘러싸기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보육 구역이 높은 위치에 있어 아직은 잠기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상태로는 절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돼.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지하 통로가 하나 있어. 그런데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지하 철도라 시공 침식체들이 많이 남아 있을 거야.
조금 위험하고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만, 우리라면 문제없이 제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변수가 없다면 그들은 3시간 후에 적조를 뚫고 보육 구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
지휘관 권한을 잃은 그들은 인간형 생물체가 현재 어느 도시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인간형 생물체들이 리브의 감지 범위 안에 나타났을 때,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그 절망과 재난의 화신이 이미 042호 도시를 넘어 그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
인간형 생물체들이 적조를 넘어…… 보육 구역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보육 구역에는 아직 칼리 씨와 리나 부인이 있고, 샌디와 성냥도 그곳에 있어요!
반드시 막아야 해!
하지만 우리는 적조를 뚫고 지나갈 수가 없고, 우회해서 갔다간 늦을 거야.
녀석들의 주의를 끌자.
그것들이 보육 구역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는 건 이 방법뿐이야!
알겠어.
리는 적조의 끝에 서서 3.8km 떨어진 인간형 생물체를 향해 총을 여러 차례 쐈지만, 사정거리때문에 총알이 명중되지 못했다.
쳇, 저격총이나 반즈가 있었다면……
잠깐만요, 저들이 돌아서서…… 우리쪽으로 오고 있어요!!
들킨 건가?
확실히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아마 소리가 들린 것 같아요.
어쩌면 저 생물체가 이미 습득한 걸지도…… 아니, 어떤 구조체로부터 활동 신호 감지 기술을 빼앗은 걸 거야.
그게 뭐든 간에 목표의 주의를 끌었으니 임무를 완수한 거야. 나눠서 후퇴하자. 저들과 정면 교전을 할 순 없어!
그래.
넌 저쪽으로 가고, 리브는 내가 업을게!
그들은 즉시 차량에서 뛰어내려 어둠의 엄호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분산 전술을 쓴 것을 눈치챈 듯 인간형 생물체는 걸음을 멈추고 몇 초 동안 생각했다.
잠시 후 그들도 그레이 레이븐의 전술에 따라 남성 인간형 생물체는 리 쪽으로, 여성 생물체는 리브와 루시아의 뒤를 따랐다.
추격전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인간형 생물체들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추격한다기보단 흉내를 내거나 노는 것에 가까웠다.
……속도로는 도저히 따돌릴 수 없어요……
전속력으로 쫓아오는 것 같지도 않아. 어떻게 해야 저것들을 따돌릴 수 있을까?!
리, 그쪽은 어때?!
네 상황과 마찬가지야.
끝까지 쫓아오고 있어.
보육 구역에 접근하려는 인간형 생물체를 따돌리려 했다가 그들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
절망감이 행동력을 지배하려 할 때, 그들은 공중 정원의 지휘부로부터 통신을 받았다.
인간형 생물체를 따돌릴 수 있는 이 유일한 기회를 놓지 않은 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Ω테스트형 무기의 첫 번째 테스트 프로젝트에 동의했다.
그리고 뒤이어…… 분주한 포화와 칼끝의 충돌에 휘말렸다.
그들은 각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리브는 간단하게 고정시켰던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루시아의 도움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되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그들은 043호 도시의 생존자를 찾기 위해 따로 움직였지만, 바네사와 밤비나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브는 애써 몸을 이끌고 보육 구역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 머물던 세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리브는 냉담해지지 않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후회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때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면…… 칼리 씨, 리나 부인, 샌디, 바네사, 밤비나타…… 전부……
……하지만 만약이라는 건 없어.
한편, 공중 정원의 연구원과 결정권자들은 ‘긍정적인’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레이 레이븐이 인간형 생물체와의 전투에 여유가 좀 있나 보군.
정말 여유가 있었다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쫓기지 않았겠지.
그는 보기 드물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다면 그들에게든, 결과든 더 좋을 텐데.
하지만 만약은 없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도, 인간형 생물체들에게 쫓긴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시간은 없어. 그 미친 것들은 더더욱 기다리기를 원하지 않을 거야.
……
기록 좀 주겠나.
니콜라는 세리카가 가져온 단말기를 건네받았고, 두 사람은 엄숙하게 기록의 내용을 바라보았다.
화면의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수송기의 추락 지점에서 구조를 마친 뒤 준비된 Ω테스트형 무기를 남성 인간형 생물체에게 던졌다.
그러자 큐브에 닿은 ‘피부’가 짓무르며 녹아내리듯 벗겨졌다.
인간형 생물체는 인간처럼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졌다.
이 정도 상처밖에 없다고?
……그런데 몸에 있는 퍼니싱이…… 흡수된 것 같은데?
무기를 회수하고 여성 생물체에게 똑같이 테스트해 보자.
네!
고전 끝에 Ω테스트형 무기를 여성 인간형 생물체에 명중시켰고, 똑같이 짓무르는 현상이 생물체의 손과 가슴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무기로 인해 짓물린 곳은 빠르게 아물지 않았다.
데이터를 전부 수집했어. 테스트 결과는 약간의 차이만 빼고 똑같아.
임무를 완료했으니 철수하자!
그녀가 돌아섰을 때, 리브의 다리가 이미 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리브! 어서 가자!
그녀는 리브의 손을 잡고 분사기로 힘껏 일어나 위험한 두 목표로부터 철수했다.
인간형 생물체의 진화 습득 속도는 굉장히 빠르지만, 지금의 지능으로는 당분간 Ω무기를 간파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거야.
기록 속의 두 인간형 생물체는 리브 일행을 멀리 떠나보낸 뒤 서로의 상처를 살피며 뒤틀린 소리를 냈다.
——‘신경 쓰지 마, 신경 쓰……’
——‘널 두고 가지 않을 거야……’
하, 저건 또 누가 한 말을 따라 하는 거야?
그들이 시야 끝에서 사라지자 인간형 생물체는 땅에 떨어진 Ω테스트형 무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인간형 생물체들은 큐브를 더 이상 몸으로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주변에서 도구를 찾아왔다.
하산이 ‘희망’이라 부르던 ‘Ω테스트형 무기’는 곧 과부하와 돌덩이의 이중 공격으로 작동이 중단됐다.
기록은 여기서 멈췄다.
인간형 생물체들이 아직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쫓고 있나?
아닙니다. 아시모프의 추측으로는 인간형 생물체들이 Ω테스트형 무기에 경계심이 생겨, 그걸 사용한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쫓는 걸 포기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저들은…… 아, 아닙니다.
그가 처음에 추측한 대로, 이번 테스트가 확실히 그레이 레이븐 소대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줬습니다.
Ω테스트형 무기를 운송하고 있는 자들의 상황은 어떻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구조로 4명이 생존했지만, 6명이 희생됐고 가져갔던 물자는 1상자만 회수에 성공했습니다.
그 잔혹한 숫자를 마주한 두 사람은 그 ‘구조’가 전혀 대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작은 큐브——Ω테스트형 무기를 전달한 것은 단순히 구조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자비로움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책임한 행동이야.
데이터와 기록을 아시모프에게 전달했나?
네,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아시모프가 Ω테스트형 무기가 퍼니싱을 흡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형 생물체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산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
리브의 그리움이 후회로 변하려고 할 때, 우렁찬 멍멍 소리가 그녀를 생각을 끊었다.
성냥……
목양견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 얌전히 리브 옆에 앉았다.
혼자 여기에 남았군요……
——데려가야 할까?
성냥이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너무 분명해서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유가 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떠돌아다니는 적이 성냥이를 공격할 수도 있고,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브는 답을 찾지 못하던 중 그의 상의에서 어떤 하얀 것을 발견했다.
……이건……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며 그의 가슴 앞에 있는 주머니에서 피가 묻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펼치자 리브는 한 쌍의 날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고, 필체가 깊어 거의 종이를 뚫을 뻔했다.
그 글씨들을 어루만지며 종이를 뒤집자 소년의 앳되고 난잡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성냥이가 걱정되요. 만약에 돌아왔는데 성냥이가 여기 있으면 데려가 주세요.
차에서 내린 거 후해 안 해요. 그 친구를 도와주고 싶었어요.
저를 봐도 슬퍼하지 마세요.
여기로 돌아왔다면 저를 속이지 않은 거겠죠. 그것만으로 기뻐요.
고마웠어요. 전 이만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