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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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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첫 번째 "희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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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 리브는 조용히 두 지휘관이 있는 격리실을 나와, 지하실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player name]님이 깨어날 수 있을까……?

어두운 달빛은 상처투성이가 된 땅에 평화의 베일을 씌워 밖으로 뛰어나온 생명들에게 산야에 가득한 죽음을 보지 못하게 했다.

수색자들이 떠난 지 얼마나 됐는지 계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보육 구역 봉쇄된 지하실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분과 초를 재는 기준은 시계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굶주림이었다.

사람들이 생체 리듬에 따라 하나둘 잠들어갈 때, 043호 보육 구역을 지키는 구조체들은 여전히 임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보육 구역 밖을 지키거나 계속해서 각자의 구조 임무를 수행했다. 그중 리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도 구조대는 새로운 부상자를 데려왔다. 생존자를 발견한 건 반가운 일이지만, 점점 줄어드는 자원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가슴속 유감이 바늘로 뭉치기 전에 리브는 그것을 가늘게 엮어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다.

리브

린지 씨는 오늘 정오에 구조된 사람인데 부상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이렇게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중상 환자를 구하려는 건 그녀의 고통만 연장될 뿐, 결말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인 것 같아요.

하지만 난 그녀의 눈 속에서 간절함과 살아가려는 의지를 봤다. 그녀는 희미하게 정신을 차릴 때마다,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입술을 떨며 뭔가를 전하려 애썼다…

분명 그녀는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최선을 다해 응급조치를 했고, 희박한 희망일지라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린지에 대한 기록을 마친 후,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글을 바라보았다. 남겨진 단서들을 뒤적이며, 어떻게든 고통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어떤 기회들은 손을 뻗기도 전에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남는 건 잔물결 같은 유감뿐이었다.

그럼에도 리브는 멈추지 않았다. 기록을 한 줄씩 넘기며,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집중했다.

리브

리스터 씨……

040호 여과탑 철수 작전 당시엔, 함께한 부대도 있었고 구조 시간도 충분하다고 믿었었다.

반드시 기회가 있고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생명이 과거의 잔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굶주림과 질병은 생존자의 몸을 좀먹기 시작했고, 시간은 더 이상 구원의 의미가 아닌, 그저 고통과 상실을 자라나게 하는 토양이 되어갔다.

리브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리브

…………

우주 무기가 강림한 그날 밤, 043호 보육 구역의 직원들과 주민들은 더 남쪽에 있는 044호 도시로 이동하려 했다.

하지만 철수하던 중에 이합 생물의 습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함께 남게 되었다.

043호 도시 보육 구역에 남은 모든 사람들은 그곳 원주민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견고한 보호소는 없었을 것이고, 리브는 지휘관의 혈종 제거 수술을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피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두 손으로 떠받쳐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결국 흘러내릴 수밖에 없다.

‘슬픔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수록, 수용할 수 있는 기쁨도 커진다.’

‘슬픔과 기쁨은 늘 함께한다. 하나는 당신과 밥을 먹고, 하나는 당신의 잠자리에 누워 있다.’

‘그대들은 슬픔과 기쁨의 저울 위에 매달린 존재, 마음을 비울 때에야 비로소 균형을 찾는다.’

리브는 이별의 순간들을 수없이 목격해 왔고, 그들의 침착하고 담담한 얼굴도 보았다.

하지만 리브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서툴고 미련하더라도, 끝까지 발버둥 치는 길을 택했다.

무력함으로 보냈던 수많은 밤, 리브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태워, 내일을 위한 불씨로 만들었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다면 그 원동력이 가져다준 결과는 그녀에게 기쁨을 안겨줄 것이다.

구조체는 인간보다 훨씬 강한 전투력과 생존력을 갖고 있기에, 종말의 재앙 속에서도 더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퍼니싱 침식, 전투 손실, 휴식실과 에너지 부족, 복구 불가능한 기체……

이 모든 것 속에서도 구조체의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루시아는 몸에 상처가 없어도 사람 무리에서 칼을 놓지 않았고,

리는 구조와 임무에 따른 소통 외에는 거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인간형 생물체가 태어난 그 순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이중합 모체와 인간형 생물체로 인한 비정상적인 영향을 두 배로 받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지휘관이 없었다면 여기 있는 세 명의 이름은 지금쯤 추모비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네사는 지휘관이 취한 행동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살아 있을 때 아무리 많은 걸 해도, 죽으면 다 무의미해져.’

그녀의 눈 밑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분노였을까, 아니면 끝내 삼킨 슬픔이었을까.

리브

…………

마지막 장의 중상자 명단을 보며 소녀는 생각에 잠겼다.

중상 인원이 고작 11명인 건, 대다수가 구조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던 푸나나라는 아이도 그제 밤 조용히 숨을 거뒀다. 바쁜 나날 중에도 이 기록은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문득, 오래전 난민들의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독성 버섯을 먹으면 환각이 일어난대! 재밌는 건 다 보인다던데? 기회 되면 먹어봐야겠어!’

그때, 리브는 웃으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충고했었다. 재미를 위해 독버섯을 먹지 말라고. 환각은 오지 않고, 간부전으로 고통만 남을 수도 있다고.

‘참나! 무슨 버섯인지 알 게 뭐야. 굶어 죽든 독 때문에 죽든, 그럴 바엔 내가 고른 걸로 죽는 게 낫지 않겠어?’

현실은 그만큼 잔혹했다. ‘재미있는 환각’이라는 말 속에 감춰진 건, 쇠약해진 몸의 고통, 그리고 ‘조용한 죽음’이었다.

푸나나, 너도 그래서 그걸 먹은 거니?

이미 떠난 사람을 향해 질문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리브는 고개를 저으며 물자 재고의 기록에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하고 뒤져도 그 기록은 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이 물자 부족에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이젠 지휘관조차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매일 최소량의 복합 전해질 주사액을 투여하고 있지만, 이제 이틀 치밖에 남지 않았다.

저기! 의사 선생님!

지하실 안쪽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손에 든 기록을 내려놓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아카네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가서 보시는 게 어떨까요?

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머리를 끄덕인 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옆방의 아카네와 유키가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아카네……

리브 언니……

리브의 품에 안긴 아카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 울음은 로비 안으로 번졌고, 모두의 마음을 조용히 흔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재난이라는 물살 속에서 자갈처럼 떠밀려가고 있었다. 깊어지는 절망 속에서, 누구도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공중정원의 다음 구조도 실패한다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과, 지휘관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리브는 펑펑 울고 있는 아카네를 가만히 안은 채,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살짝 얹었다.

리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녀는 작은 전환의 기회라도 간절히 바라며, 이 시련을 바꿀 수 힘을 갈망했지만, 또다시 무력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리브는 아카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 침통한 절망을 깨뜨리기 위해, 오래전 배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람의 시선이 되고 싶어……

호수 한가운데 삼천 주야를 거쳐…… 너의 그림자를 스쳐지나…… 더 머물고 싶어……

리브 언니, 무슨 노래예요?

오래전에, 전지 병원에서 유행하던 노래야. 그때는 다들 이 노래를 불렀거든.

이 노래! 들어본 적 있어요!

기타를 안은 채 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그는 깊이 잠든 유키를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곧 평온한 표정으로 아카네와 리브 옆에 앉았다.

면역 시대에, 한 작곡가가 친구를 추모하며 만든 곡이었죠. 당시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를 잃었고, 그래서 이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군요.

이 노래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힘이 있죠.

어때. 아카네, 아저씨가~ 이 노래 가르쳐줄까~

… 리브 언니한테 배울래요.

그럼, 제가 의사 선생님한테 먼저 알려드리죠.

그는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의 첫 구절을 조심스레 불러보기 시작했다.

기억났어요…

좋아요.

연주가1

어? 왜 여기서 기타 치고 있어?

연주가2

헤헤.

척이 연주하던 기타 소리에 이끌려, 옆방에 있던 연주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조심스레 격리 병동 안으로 들어오며, 병동 사람들을 호기심과 약간의 긴장감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의사 선생님이랑 노래 한 곡 부르려고 하는데, 어때? 같이 할래?

연주가2

좋지. 네가 부르려고?

당연히 의사 선생님이 부르지.

어…… 저는……

리브 언니, 불러주세요!

~이상하게 생각 마세요~ 랄라~ 마음을 열어요~ 음악은 일종의 기적이랍니다~

아…… 알겠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만,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면 좋잖아요.

~우리의 노래가~ 랄라~ 울음소리를 대신할 거예요~

네……

조용히 숨을 고른 리브는,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그 노래의 첫 소절을 조금 서툴지만 담담하게 불러나가기 시작했다.

한없이 고요한~ 호수에서~

리브의 노래에 맞춰, 악기 없이 손으로 리듬을 타던 연주가들이 함께 박자를 맞췄고, 척의 기타 소리도 부드럽게 그 곁을 채웠다.

노랫소리를 들은 유키도 눈을 떴고, 노래를 들으며 몸 위의 침대 시트가 상처를 잘 덮고 있는지 확인했다.

바람의 시선, 죽은 동료를……

그 노래엔, 그들이 겪은 상실과 애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카네는 눈가를 닦으며 조용히 유키의 곁에 앉았다.

방 안의 사람들은 점점 노래에 집중해 갔다. 어느새, 병동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안의 사람들은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며 침묵 속에서 음악을 감상했다.

생명이란 동그란 호수 옆에 흩어진 영혼들.

그 교점을 찾게 되는 날, 반드시 다시 만나리라.

우리가 변하더라도—

햇살, 저녁 바람, 그대의 그림자, 그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라도, 우린 반드시…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날 거라 믿어요.

이건… 그저 잠시 스쳐 가는 이별일 뿐이라고 믿어요.

노래의 마지막 음이 사라지자, 주변에서 조용히 박수가 퍼져 나왔다. 그제야 리브는 병동 문밖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난민3

그립네, 다들 노래하는 법을 잊은 줄 알았는데.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요? 다 같이 이 노래 배워보는 건 어때요?

난민4

환자는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 저도 듣고 싶어요.

저도요!

좋아~ 그럼 다 같이~ 우리의 노래가~ 울음소리를 대신할 거야~

045호와 044호의 도시 순찰을 마쳤어요. 별다른 물자를 찾진 못했지만 폐허 속에서 잘 익은 밭벼를 발견했어요.

이튿날 정오, 루시아는 무거운 자루를 들고 다른 구조체와 함께 봉쇄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수고했어요. 우선 선실에 가서 좀 쉬어요.

네, 루시아. 여러분도 푹 쉬세요.

그들은 손을 흔들며 지하실 왼쪽의 격리실로 향했고, 입구에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3명만 남았다.

부탁한 약에 대해 알아봤는데, 그쪽도 이미 다 떨어졌다네요.

다른 구역은요?

내가 확인해 봤는데, 다른 보육 구역은 이쪽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

오늘 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한 명 들어왔어요. 이 상태로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누구에게 물자를 써도 결과는 비슷할 겁니다.

…………

…… 미안.

루시아……

그녀는 루시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리 말이 맞아요. 지금의 상황에선... 모두를 구하기 어렵겠네요.

리브는 마치 가시밭길 위를 걷듯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죠.

그래.

전에 얘기했던 플란넬하고 솜을 조금 구해왔는데 필요해요?

……고마워요.

그 외에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

044호 보육 구역이 이합 생물의 대규모 습격을 받았어요.

난민이 그 일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일부 이합 생물들이 부대 전투를 학습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모인 곳을 노리고 공격하는 거죠.

우린 하루 종일 그 지역에 머물며 이합 생물들을 전부 처치했어요.

하지만 044호 보육 구역도 이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구조체 한 명을 남겨 여과탑을 수리하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대피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점점,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사라져 가네요.

인간형 생물체도 아직 041호 도시에 남아 있으니, 우리가 있는 이곳도 결코 안전하진 않아요.

공중 정원 구축 시도도 계속 실패 중이라, 철수 계획을 미리 세워야 할 것 같아요.

지금은 이 보육 구역에 인원이 몰려 있어서 철수도 쉽지 않겠지만요.

서해안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라인도, 이제는 더 이상 파괴될 지점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다음은… 인간형 생물체든, 떼 지어 다니는 이합 생물이든… 누가 먼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노리느냐의 싸움이 될 거예요.

공중 정원의 구조가 계속 실패로 이어지면……

셋은 그 말의 무게에 눌린 듯, 침묵에 빠졌다.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어 그 이후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지휘관을 치료하기 위해 지상에 남았다.

그들은 어둠 속 어딘가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믿었다. 적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지휘관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 모든 믿음, 간절함, 그리고 기도는 점점 밀려오는 절망 앞에 힘을 잃어갔다.

아직 실패했다고 단정하기는 일러요. 전 공중 정원을 믿어요…

그녀는 ‘믿음’이라는 두 글자를 말할 때 갑자기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아?

괜찮아요. 만약 지금처럼 전술을 계속 고집하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될 거예요.

전술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격리실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야죠. 일단 구조……

와, 이 무거운 자루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거예요?

눈치 빠른 한 난민이 루시아가 가져온 벼를 보고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폐허에서 찾은 벼입니다. 오늘 저녁에 이걸로 죽을 지을 거예요.

와! 퀴나! 전에 가져온 냄비를 꺼내야겠어요! 이걸로 죽 끓이면 오늘 백 명은 배불리 먹을 수 있겠네요.

그의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켜 몰려들었다. 모두 벼를 바라보며 놀람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잘됐어요……

오랜만에 죽 맛 좀 보겠네.

뭐든 간에 좋은 소식이지!

제가 죽 끓이는 거 도와드릴까요? 여기 있는 버너는 가스가 부족해요. 비축 창고에 남은 휴대용 가스버너가 있을 거예요. 그걸 가져오면 저희가 여기서 끓일게요.

그래요,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가는 김에 정화된 빗물도 챙길게요. 요 며칠 비가 계속 와서 물은 충분할 거예요.

그럼 남은 사람들은 여기 앉아서 벼 이삭을 손으로 털자. 껍질부터 벗겨야 하니까.

어? 쌀이 아니었네.

자루 겉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않나? 구조체는 전투하느라 바빠서 벼 자루를 가져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가공할 시간이 있겠어?

역시 형님이시네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난민18

퀴나는 대장 말 아니면 말을 안 듣는다니까.

야야! 하루 종일 다른 사람 뒤에서 재잘재잘, 어우 시끄러!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운 대화 소리가 오갔다. 모두 줄을 서서 두세 개의 벼 이삭을 받은 뒤 병상 틈에 아무렇게나 앉아 서로 기대어 벼 이삭을 비볐다.

잠시 후 물, 정화 도구, 조리 도구가 준비되었고, 손으로 비벼낸 쌀을 물에 담가 걸러질 때까지 기다린 후 불에 올려 끓였다.

그때, 병상 한쪽에 누워 있던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벼 이삭을 가슴에 안고 있던 그는 지팡이를 짚고 누구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리브

칼리 씨…… 왜 그러세요?

그는 암 때문에 식사를 거부한 노인이었다.

칼리

……이걸 내가 가져도 될까?

리브

물론이죠. 이건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가져온 거예요.

칼리

……안 먹고 그냥 두려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리브에게 말했지만, 힘에 붙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단식을 시작하기 전부터 영양실조 상태였던 그는 조금 있으면 꺼질 듯한 바람 속의 등불 같았다.

리브

……물론 괜찮죠.

최근 이 노인은 자신의 몫이나 배급된 식량을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요구였고, 리브는 그걸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힘겹게 말하는 노인의 모습에 리브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침대 옆으로 부축해 그의 아내와 나란히 앉혔다.

노부인

고마워. 아가씨. 다리가 안 좋아서 일어서지 말라 해도 듣질 않아.

두 노인은 벼 이삭을 든 채, 나란히 앉아 인자한 미소와 함께 큰 솥 주변에 모여든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망과 궂은 비에 희망을 잃었던 눈빛에 다시 불길이 타올랐고, 끓어오르는 증기와 함께 어둠으로 가득했던 지하실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흐느낌은 잦아들었고,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 역시 하나둘씩 눈을 떴다. 그들의 흐릿한 시야에, 희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가려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작은 가스버너 위에 얹힌 죽 냄비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희망에 형태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

리브는 연인의 곁을 떠나지 않던 여성이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버너 속의 불꽃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코토씨.

네.

그녀는 예의 바르게 웃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린지가 방금 깼어요.

죽이 먹고 싶다면서, 저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얘기하더니… 린지가…

코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내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린지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의 흐느낌이 커지자, 주변은 점점 조용해졌다. 모두가 그 울음소리에 싸늘한 현실로 돌아갔다.

아아… 누구는 이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또 누구는 다음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언젠가 누군가 말했지. 교회보다 병원 벽이 더 많은 참회와 기도를 들었다고.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생명 앞에서 아무리 기도를 올린다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저를 지키려다 그렇게 된 거예요… 차라리… 저도 같이…

리브는 코토에게 다가가 떨고 있는 두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지금 이 손길이 잠시 마음을 붙들 수는 있어도, 이들의 상황을 바꿔주지는 못한다는 걸.

생사이별 앞에서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의미를 잃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 가에 모여 웃고 떠들지만, 그 뒤에 드리워진 어둠을 잊어선 안 된다.

빛과 어둠은 언제나 함께 한다. 누군가 사라졌다는 건, 또 다른 누군가가 그로 인해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의사는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자신도 언젠가는 감정에 휘말려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리브는 그런 상황을 이성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거, 성격이 밝은 한 교수님께서 보기 드물게 한숨을 내쉬며 이런 말씀을 했었다.

낙관, 냉정, 생사를 가볍게 보는 것…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자기 자신을 다독일 수 있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꼭 긍정적으로 되라고 요구할 순 없어.

남의 슬퍼할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되고, 울음을 억지로 멈추게 할 수도 없어. 억누르기보단, 털어놓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으니까.

리브, 너에게 하는 말이야. 너는 죽음을 앞둔 생명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으니까.

자신의 슬픔을 허락하고, 가슴속에 남은 유감으로 다른 누군가를 구했으면 좋겠어.

이건 ‘위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위로’야.

‘억누르기보단, 털어놓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리브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고개를 들자, 척과 그의 품에 안긴 기타가 시야에 들어왔다. 척은 리브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타 줄을 조심스레 튕기며, 무언가를 암시했다.

리브

… '울음 대신 노래'인가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은 채 기타 줄을 튕겼다.

연주가들도 척의 리듬에 맞춰 연주에 합류했다.

예전에 이 노래를 익혔던 이들도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

[~생명은 동그란 호수~ 그 호숫가를 걷고 있는 너와 나~]

[~때로는 급한 발걸음으로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고~ 때로는 진흙에 빠져 지체되기도 하지~]

[~함께 가던 길인데 어쩌다 ~ 나만 남아있네~ 너는 어디에~]

모두의 합창을 들은 리브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속에 합류했다.

사람들&리브

[~바람의 시선이 되고 싶어~ 호수~ 한가운데 삼천 주야를 거쳐 머물며~]

[~너의 그림자를 스쳐지나~ 더 머물고 싶어~]

[~소리 없이 더 멀어져가~]

루시아

…… 이 노래는……

듣기 좋네요. 지휘관님도 여기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지휘관님이 깨어나시면, 리브한테 한 번 더 불러달라고 해야겠어요.

루시아

네, 그땐… 우리 넷이 함께 불러요.

……전 빼줘요.

루시아

음…… 지휘관님은 리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엄청 기대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

막막했던 분위기가 음악과 뜨거운 죽으로 조금씩 녹아들었다. 사람들은 합창에 박수를 더하며 따스함을 나눴다.

이 노래는 밝고 희망적인 가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억지로 웃기보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흘리는 눈물. 그 눈물은 이 노래처럼 흩어져, 잔잔한 여운만을 남겼다.

어때요. 제가 말했죠?

변하는 건 없겠지만, 억누르는 것보단 털어놓는 게 훨씬 낫다고요.

칼리

이 노래는……

노인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리브

무슨 일 있으세요?

노부인

별일 아니야. 이 양반이… 옛일이 떠오른 모양이지.

늙었어도 집념은 남는가 봐. 노래도 그렇고, 벼 이삭도 그렇고…

노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귀한 수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시선은 어느새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

노부인

황금시대 초기에, 영점 원자로 사고가 났을 때였지. 가축과 논밭을 관리하던 기계들이 다 멈추면서 식량 공급이 끊겼었어.

오랜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래도 누군가는 해냈어야 했고, 결국 누군가는 해냈어.

그때는 농업이나 목축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양식 기지를 노리는 침식체에도 맞서야 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고민했지. 씨앗을 가져가 더 안전한 곳에 심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침식체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굶주린 사람들이 우리 성과를 빼앗아 가기도 했지.

그녀는 세월이 가득 새겨진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노부인

그 겨울은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 끔찍한 흉작이었고, 오랫동안 안정적인 생산량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뭐든 닥치는 대로 입에 넣었어.

하늘의 새, 땅에서 뛰어다니는 쥐, 잡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잡았지. 소, 양, 돼지, 개는 물론이고 논에 심은 벼와 채소는 말할 것도 없었어.

침식체가 우글거리는 곳까지 목숨 걸고 다녀온 사람도 있었지만, 돌아온 이는 거의 없었지.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번식이 빠르고 눈살 찌푸릴 것들까지 키우기 시작했어.

노부인은 손가락으로 약 4센티미터 길이를 가리켰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노부인

하지만 먹이가 모자라자, 그 징그러운 벌레들도 황금시대의 영화에 나오는 단백질 덩어리만큼 자라지 못했어.

평소엔 다들 기피하던 것들이었지만, 상황이 바뀌니 그마저도 빼앗겼어.

결국엔 모든 게 사람들 뱃속으로 들어가, 더는 남지 않게 되겠지 싶었어. 그래서 누군가 규칙을 정했고, 입소문을 통해 그 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어.

——씨앗은 무조건 남겨라. 새끼 동물은 먹지 말고, 식물은 뿌리까지 뽑지 마라. 임신한 동물은 잘 보살피고, 비상 상황이 아니면 놀라게 하지도, 음식을 빼앗지도 말 것.

이 규칙 덕분에 서서히 상황이 나아졌어. 숲엔 동물이 다시 나타났고, 밭에도 새싹이 돋았지.

그게 우리가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견뎌내는 데 큰 힘이 됐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재난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고 상황은 매일 더 심각해져만 갔지…… 때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기 위해 규칙을 어기기도 했어.

누군가 규칙을 어기면, 그 피해를 입은 이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선 같은 선택을 해야 했지.

그리고 우리는 ‘치즈’를 만났지. 하…… 지금도 그의 본명이 뭔지는 몰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었는데, 그게 인상 깊었나 봐. 그 뒤로 다들 그를 그렇게 불러.

노부인이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들이마시자 담뱃재가 손가락에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노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연기 속에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노부인

사실 그리 아름다운 얘기는 아니야.

그 녀석이 치즈도 먹고 밭 옆에 살길래 우리는 그가 그런대로 넉넉하게 사는 줄 알았어.

영감이 먹을 걸 찾겠다고 그 집 밭을 죄다 털었어. 씨앗 하나 남기지 않고…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고, 그 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어. 그의 아내는 죽을 고비를 넘기다…… 아이까지 잃었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도 바로 그날이었어. 그 녀석이 텅 빈 밭에서…… 울다가 기절한 아내를 품에 안고 부르던 노래야.

우리는 치즈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빌 용기가 없었어. 그에게 물자를 조금 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를 갔더군.

그 이후로 습관이 생겼어. 뭘 먹든 씨앗은 반드시 남겼지. 아무도 이 규칙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우린 스스로 그 규칙만은 끝까지 지켰지.

지금이야 보육 구역도 생기고, 농작물도 기를 수 있게 됐지만……

너희도 봤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저것들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손 안에서 타버린 담배를 껐다.

노부인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죽도 다 된 거 같으니 어서 먹자.

난민 아이

좋아요!

죽이 끓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노부인의 이야기엔 관심이 없었고, 냄비에서 피어나는 향기에 더 관심을 보였다.

선실에서 쉬고 있던 구조체들도 그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구조체 대원

저희도 죽 배급하는 일 도울게요.

리브

고마워요.

구조체 대원

한 명씩 한 명씩, 밀지 마시고요.

난민 아이

네~

자기 차례가 오자 사람들은 숟가락에 담긴 쌀알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듯 조심스레 그릇을 들었다. 줄을 선 모두가 낙관적인 태도로 자기 식기를 내밀며,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받아 갔다.

코토는 조심스럽게 죽을 들고 구조체 대원과 리브 일행에게 감사를 전한 뒤 린지의 침대로 돌아갔다.

3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던 칼리도 아내의 권유로 그릇에 담긴 죽을 맛보았다.

샌디, 슈레크, 팡틴…… 아직 깨어나지 못한 부상자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한 그릇씩 손에 쥐었다.

그 따뜻한 온기는 손끝을 타고 전해졌고, 오랜만에 ‘음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고요하게 죽의 온도와 맛을 곱씹었다.

루시아

리브……

모두가 음식에 집중하는 틈에, 루시아가 조용히 리브를 불렀다.

리브

네?

루시아

따라와요.

리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