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생기 없는 오후. 걱정스레 내리는 가랑비가 땅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젖은 공기는 스며들 듯 땅속으로 퍼지며 이곳의 추위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기타를 꺼내 들고, 마음 맞는 몇몇과 함께 조용히 앉아 힘없는 선율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낡고 헤진 카드를 꺼내어 익숙한 손놀림으로 동료의 침대 앞에 던졌다.
어떤 이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꿰맨 틈 사이로 사라진 보리알을 두고 괜한 실랑이를 벌였다.
어떤 이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며칠째 식량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축축한 벽 모퉁이에 몸을 웅크린 채, 막 묻은 가족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어두운 바깥과 쏟아지는 비를 외면한 채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낡고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엔 이미 빛이 사라졌고, 남은 건 텅 빈 정적뿐이었다.
그러나 절망은 누군가 손을 들어 항복한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모든 부상자에 대한 정기 검진을 마친 리브는 무의식적으로 아픈 가슴께를 문질렀다. 휴식실이 부족해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 수색 임무 중, 리브는 구조 대상을 보호하다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료 물자를 나중에 올 인원에게 물려주기 위해 부러진 뼈대만 겨우 고정했을 뿐 자신을 치료하지 않았다.
이곳에선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인간이든 구조체든, 모두가 가라앉는 이 외딴섬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고, 피할 길은 없었다.
——쿵쿵쿵.
격리문 밖에서 갑자기 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두꺼운 강철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그 소리는 오히려 너무 가벼워, 털끝 같은 울림이었다.
누가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그녀는 곧장 두 눈을 감고, 문 너머의 활동 신호를 탐지했다——인간이었다.
이 위험한 황야를, 이합 생물들이 가득한 폐허를 어떻게 혼자 뚫고 왔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리브는 망설이지 않고 격리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격리문 틈으로 남녀 두 사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여자의 머리칼과 옷차림이 깔끔한 것으로 보아 세심히 손질한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성은 피투성이의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여기 의사 선생님 계신가요? 아이가, 아이가 등을 찔렸어요!
제가 의사예요! 아이 상태를 확인해 볼게요!
다행이에요. 제가 안고 갈게요. 빈자리는 어디에 있죠?
저쪽이에요.
그는 황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리브가 가리킨 쪽으로 달려갔다.
침대가 없는 것 같은데 바닥에 눕혀야 하나요?
사방을 둘러본 그는, 뒤따라 절뚝이며 들어오던 리브를 향해 물었다.
네… 그런데 여분의 침대 시트가…
여기요. 제가 만든 접이식 침대가 하나 있어요.
샌디는 성냥을 안고 침대에서 일어나 찡그린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
… 제 걸 쓰세요.
정말 고마워.
그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아이를 접이식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샌디는 벽 구석에 몸을 기댄 채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아이가 다치기 전, 앓고 있던 병이나 알레르기 같은 게 있었나요?
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은요?
저도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주사하기 전에 먼저 검사부터 할 게요.
리브는 아이의 옷을 벗기고 등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우선은 지혈만 했어요. 아이가 어떻게 다친 건지 알려주시겠어요?
이합 생물한테 당한 거예요. 제가 그때 같이 있질 않아서,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어요.
음, 혈청이 필요해 보이네요.
혹시 아이가 최근 며칠 동안 뭘 먹은 적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어젯밤, 며칠 동안 먹을 걸 못 구해서 너무 배고프다며 과자 한 봉지를 달라고 했어요.
…………
샌디는 그 남성의 가방을 슬쩍 훑어보았다. 한눈에도 안에 물자가 꽤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 먹고 나서 다음 보육 구역으로 가기 전에 물자를 좀 더 챙겨야겠다면서 방호복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그냥 가버렸어요.
두 사람은 리브가 아이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한 듯 발 디딜 곳을 찾아 앉았다.
… 왜.
왜 혼자 보낸 거죠? 딱 봐도 가방에 물자가 있는데… 왜, 자기 아이를 그런 위험에 빠뜨린 거죠?
뜻밖의 질문에 남성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려, 앞에 누워 있는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내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이 일그러졌다.
너 같은 애가 뭘 안다고…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임신한 데다 발목까지 삐어서 그렇게 빨리 걸을 수 없었어.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겠다며 먼저 가버린 아이가… 이렇게 될 줄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접이식 침대에 누운 아이를 슬프게 바라봤다. 마취제가 부족한 탓에, 아이는 상처를 꿰매는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
아이의 고통을 빨리 끝내기 위해 리브는 침착하게 손놀림을 재촉하며 봉합했다.
…………
샌디는 그 울음소리에 벽을 따라 주저앉았다. 곁에 있던 성냥도 그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조용히 샌디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멍.
… 그럼 왜, 임신한 거죠?
그의 낮은 목소리엔 꾹꾹 눌러온 분노가 실려 있었다. 평소 겸손하던 그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뭐라고?
제대로 키우지 못할 걸 알면서 왜 낳은 거죠…!
그는 이가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고 분노를 터뜨렸다.
………………
어린 소년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여성은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지금은 운이 좋아서 구조됐고, 좋은 의사도 만난 거죠.
하지만 앞으로는요? 이 아이는 저처럼 되거나… 어쩌면, 더 나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어요.
… 끄응.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라니요…? 제 부모도,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저를 낳고, 도저히 키울 수 없게 되자 길거리에 버렸어요.
… 아무 생각 없이 낳았다고?
네. 아이를 키워보셨으니 어느 정도는 아실 거예요.
보육 구역에서든 다른 난민 시설에서든,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나 임신한 어른들은 우대를 받는다는 사실을요.
…………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좋은 뜻에서였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호의를 악용하죠. 제 부모님처럼요.
그 사람들은 더 많은 배려와 지원을 받기 위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엄마는 임신 후에 원하던 대로 보육 구역 특별 지원으로 입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저와 제 동생을 낳았어요.
제가 두 살이 되던 해… 아빠는 보리죽 한 그릇과 바꾸겠다며 저를 다른 집에 넘겼어요.
양부도 친부모와 다를 바 없었어요. 저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의 동정을 사고, 그걸로 보육 구역에서 물자를 챙겼죠.
어느 부모 곁에서든 저는 늘 최소한의 음식만 받을 수 있었고요.
그리고 제가 커서 그런 ‘효과’가 사라지자… 마치 다 먹은 통조림처럼, 저를 길가에 버렸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주변에 모여 있던 난민들은 샌디의 말을 듣고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비슷한 얘기 들은 적 있어. 좋은 뜻으로 아이들을 돕는 건데, 저런 인간들이 있을 줄이야…
저런 인간들이니까 낳는 거지. 솔직히 지금 같은 세상에서 누가 애를 낳겠어?
그러고 보니 저들도 누구의 아이인지 말도 안 했는데 물자를 그냥 받았네.
알면 안 주게? 너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 지금은 생존이 제일 중요해. 남은 애는 누구든 키우면 되고.
하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사람들에게 짐 취급당하고, 쫓겨나고, 욕먹고…
그래서 묻고 싶은 거예요.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낳으려고 하는 건지…
눈앞의 잠깐의 이익 때문인가요? 아니면 아이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는 건가요?
…………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은, 낯익은 남성이 어색한 기침을 내뱉을 때까지 이어졌다.
뭐, 이게 제대로 된 대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난 이 아이의 아빠가 아니야.
물론 이 사람도 아이의 엄마가 아니고.
나는 원래 이 사람의 남편과 함께 다녔었어. 우리 셋은 교환 상인이었지. 지금은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그땐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물자를 구하러 다니던 때였거든.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자 절반도 이 사람의 남편 물건이야… 다른 사람이 준 걸 계속 먹을 수는 없잖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아, 죄송해요. 그런 사정이 있었네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두 분의 관계도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했네요…
괜찮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우리는 아이의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로부터 여러 얘기를 들었어. 너처럼 힘든 일을 많이 겪었더라. 친부모는 2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땐 겨우 여덟 살이었대.
정말 잔인한 세상이야. 우리 모두 내일을 보장받지 못한 채 살고 있어. 아이들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아이의 건강과 안전 역시 보장 못 해…
네……
여성은 천천히 샌디 곁에 와 앉았다. 한 손으론 조심스럽게 샌디의 등을 어루만지고, 다른 손으론 성냥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이렇게 버티면서 사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네가 한 말, 잘 새겨들을게.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할게…
……네.
하, 이런 얘기 좀 그만하지? 아이가 생겼으면 그냥 키우는 거지. 세상이 원래 그런 거잖아? 우리 모두 같은 처지야. 신은 누구에게도 불공평하지 않으니까, 괜한 불평은 하지 말자고.
……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불공평한 일은… 항상 존재해.
그녀는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발버둥 치고 있지만, 누군가는 무기를 들고 다니고, 누군가는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누군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짊어지고, 또 누군가는… 아직 아이인데, 뛰어다니며 살아남아야 하죠.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에요.
그래, 내가 잘못했어. 다들 이런 슬픈 상황을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어. 겨우 태어난 생명이 또다시 쫓겨나는 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샌디와 난민 여성을 바라보지 않았다.
좀 상투적으로 들릴진 몰라도 틀린 말은 아니야. 꼬마야, 네가 힘든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희망까지 꺾어선 안 돼.
…………
쌓여선 안 될 슬픔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는 희망 또한 빼앗겨선 안 된다.
어느 쪽이든 희망은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무슨 걱정 하는지 알아요.
상처를 봉합한 리브는 곁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침대 가장자리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기쁜 일이지만, 너무 큰 부담이 되면 엄마도 아이도 함께 무너질 수 있어요.
……네.
그래도, 그런 위기 속에서도… 때로는 그것이 큰 보답으로 돌아오기도 해요.
제가 말한 보답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물자를 얻는 그런 게 아니라, 희망과 의지를 뜻해요.
리브는 시선을 내려, 샌디 옆의 성냥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샌디가 성냥이를 곁에 두기로 한 이유가 물자를 교환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나요?
아니요.
성냥이와 함께 있으면 샌디의 입장이 더 어려워지겠죠. 식량도 더 빨리 줄어들 테고…
하지만 샌디가 그랬잖아요. 성냥이는 삶의 의미이고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맞죠?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에게 아이는 어떤 존재인가요?
…………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진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는 낳아야 해. 비록 지금 사는 게 고되고 매일 제대로 먹기도 힘들지만, 누군가 죽는 걸 보면 슬프기만 할 뿐이야.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면, 아무리 물자가 많아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 더 많은 사람이 살아 있어야 덜 외롭지.
맞아,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그는 이 말을 듣고 감정이 북받친 듯, 돌아서서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로운 생명을 지켜주는 건 결국 엄마야. 엄마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 아, 또 말이 너무 앞섰네.
그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치며 사과했다. 샌디와 여성도 ‘엄마’라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부터 말주변이 없었어. 그냥 흘려들어.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볐고, 두 손가락 사이에 낀 먼지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연거푸 재채기를 했다.
자, 이제 딱딱한 얘긴 그만하고 다른 얘기 좀 해볼까? 이름은? 어디서 왔고, 바깥 상황은 어때?
‘어디서 왔는지’, ‘밖은 어떤지’는 새로 온 사람에게 늘 묻는 질문이었다. 일종의 인사 같은 거였지만, 대답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따로 캐묻는 일이 생기곤 했다.
전 팡틴이라고 해요. 남쪽 045호 도시에서 왔어요. 원래는 044호 보육 구역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곳 여과탑이 고장 나서 가지 못했어요.
045호 도시랑 044호 도시는 지금 어떤 상태지?
045호 보육 구역은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044호 쪽은 여과탑이 고장 나 있었어요. 제가 지나갈 때, 구조체 하나가 막아서면서 말하더군요.
044호 도시에 이합 생물들이 자주 출몰해서, 보육 구역과 여과탑이 계속 공격받고 있대요. 그래서 주민들도 이미 대피 중이라고 했어요.
…… 044호 도시는 루시아와 리가 있는 곳일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주변 난민들이 웅성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남쪽이 가장 안전한 줄 알았는데, 결국 어디든 다 똑같이 고통받고 있나 보네. 두 인간형 괴물 제외하고도 메뚜기 떼 같은 이합 생물이 날뛰고 있고!
우리도 여기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빨리 철수해야 해!
철수? 어디로 철수하게?
지금 밖에 안전한 곳이 있나?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떡하긴, 공중 정원에서 더 이상 구조를 보내지 않으면 망각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망각자……
사실 이 분도 망각자가 있는 곳에서 왔어요.
오? 망각자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쪽은 지금 어떻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제가 교환상이다 보니 망각자들과 자주 접촉이 있었어요.
아직까지 난민을 받아주고 있긴 한데, 거의 모든 거점이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어요.
… 그럼 철수는 사실상 어려워졌단 얘기군.
그래도 여전히 대부분 보육 구역보다 여건이 좋아요. 식량도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고, 다만 혈청은 부족한 상황이에요.
제가 이번에 이쪽까지 온 것도, 여유 있는 보육 구역을 찾아 혈청을 교환하려고 온 거예요.
교환상이라…
자네, 저 사람 남편과 동행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남편은 지금 어디 있지?
제 남편은 저를 지키려다 적조에 빠졌어요… 다시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그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인간형 변종의 목소리가… 너무 그 사람 같았어요.
이분이 마침 물건을 찾으러 오지 않으셨다면, 전 아마… 그 괴물에게 당했을 거예요.
그것들을 대처하는 데 경험이 많나 보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을 건넸다.
젊은이, 이름이 뭔가?
슈렉이라고 합니다.
슈렉...?
그 이름을 듣자 리브는 눈앞의 청년이 낯익게 느껴졌던 이유를 떠올렸다.
처음 그 이름을 접한 건, 취서체를 발견하기 전이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버려진 폐허’에서 화서가 남긴 좌표를 탐색하던 중,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했었다.
<가면 기사의 창조 전설>……?
그녀는 퇴색된 표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봤고, 이야기를 다 읽은 후 뒤표지에 끼워져 있는 종이에 예쁜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는 이미 수많은 재난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재난도 결국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품고,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기증: 슈레크’
그 책에 특별한 단서는 없었지만, 이후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도시의 폐허를 지나던 중,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하게 됐다.
다들 이것 좀 보세요. 벽에 뭔가 적혀있는 것 같아요.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오래전에 방치된 건물 벽에 또렷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는 이미 수많은 재난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재난도 결국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도 희망을 품고,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용기를 주는 말이네요.
필체로 봐선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혹시 청소부들이 남긴 걸까요?
그 아래에는 다소 지저분하게 적힌 ‘당연’이라는 글자가 있었고, 그 뒤를 잇는 문장은 누군가에 의해 지워져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당연’ 두 글자 뒤의 문장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기억……
‘이 별에 끝나지 않은 겨울은 없었어. 얼음이 전부 녹고 따뜻한 봄이 되었는데 넌 이곳에 없네.’
슈렉... 넌 분명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미지를 탐색하는 임무는…… 나한테 맡겨줘.
…………
리브는 예전, 파오스의 창을 통해 슈레크의 과거 일부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혈청? 무슨 물자로 혈청을 바꾸려고?
원래는 그가 직접 교환하러 갈 예정이었는데…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길래 제가 대신 찾으러 온 겁니다.
음… 근데 저희도 혈청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요.
이 정도 물자면 혈청 네 개는 충분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일단 세 개만 교환할게요. 혹시 또 부상자가 생기면 대비해야 하니까요.
네, 알겠어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빗물에 젖은 머리를 긁적였다.
전 망각자 쪽에서 왔어요. 길에 있는 보육 구역들은 전부 혈청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래도 여긴 그나마 나은 편이죠. 그쪽은 약탈자들이 날뛰고, 쉴 틈조차 없거든요.
지금 밖에 이합 생물이 많아서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 될까요?
의사가 괜찮다면 우리도 의견없어.
붐비는 게 상관없다면 저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는 약간 산만하게 하품을 하며 벽 구석에 기대 눈을 감았다.
…………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이곳에 한가득 모여 있고,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지휘관님이 깨어 계셨다면, 뭐라고 하실까…
지금 곁에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휘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