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생태 정원 밖은 여전히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천막의 보호 덕분에 내부에는 인공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생존에 필수적인 주거 구역 권한이 해제되자, 공기 순환 시스템이 다시 가동되었다.
하루 동안 순환이 이어지면서, 생태 정원 안에 퍼져 있던 오래된 녹과 곰팡내가 서서히 사라지고, 그 대신 싱그러운 흙내와 풀 내음이 공기를 채웠다.
[player name], 여기 공기 질이 꽤 괜찮은 수준까지 회복됐어. 구시대 시설치고는 안정성이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야.
지휘관의 옆에 선 카무이는 평온한 표정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며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생태 정원의 에너지 공급량은 아직 충분해?
지휘관은 카무이를 운송 장비 앞으로 데려갔다. 물자로 가득 차 있던 짐칸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량이 부족하구나.
조금 전의 여유롭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카무이의 미간에는 무거운 고민의 흔적이 새겨졌다.
오늘이면 다 떨어져. 물자를 실었던 운송 장비 두 대도 침식체를 따돌리는 과정에서 모두 잃었어.
[player name], 여기 좀 봐.
심각한 표정으로 텅 빈 운송 장비 앞에 서 있던 카무이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단말기에서 지도를 불러왔다. 지도 위에는 꽤 넓은 녹색 구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전에 생태 정원의 상태를 확인할 때, 이쪽 지역 지도를 미리 다운로드해 두길 잘했네. 여기가 원래 생태 실험 정원이었으니까, 분명 농업 생산 시설이 남아 있을 거야.
이쪽으로 가서 운을 한번 시험해 봐야겠어.
지휘관을 등지고 지도에서 경로를 계획하던 카무이가 쑥스러운 듯 살짝 몸을 움찔했다.
크흠... 경로를 찾았어. [player name], 내가 집사 로봇을 불러올 테니, 다 같이 가보자.
그 후, 집사 로봇의 안내를 받아 둘은 거대한 격리문 앞에 도착했다. 두꺼운 문이 천천히 열리자, 축축한 흙과 풀꽃의 싱그러운 향기가 확 밀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엄청난 규모의 농업 재배 구역이었다. 조금 어두운 천막 아래로 가지런히 정돈된 논두렁들이 이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이름 모를 양치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재배 구역에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지만, 규칙적인 논두렁의 형태를 통해 한때 이곳이 얼마나 비옥하게 가꾸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토양 상태가 아주 잘 보전되어 있어. 황금시대의 작물을 심기에 딱 좋은 환경이야.
밭 가장자리에는 메마른 자동 관개 수로들이 혈관처럼 얽혀 있었고, 다시 가동될 그날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player name], 확인해 봤는데, 관개 시스템과 배관 구조가 아주 온전해. 유지보수가 잘 되어 있어서, 물만 연결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지휘관은 잡초가 우거진 논두렁으로 걸어갔다. 발이 미끄러질 뻔한 순간, 카무이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붙잡아 주었다. 허리까지 자란 잡초들을 바라보며, 카무이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발밑 조심해. 잡초가 너무 많아.
지휘관은 몸을 돌려 뒤따라오던 집사 로봇을 바라보았다.
로봇은 키워드를 인식한 듯 재빨리 둘 앞으로 이동했다.
키워드 검색 결과, 가족 구성원 여러분이 "식량"과 "생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2단계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다른 가족 구성원을 소집하시겠습니까?
[player name], 이 집사 로봇이 새로운 임무를 주려나 봐.
집사, 모두를 이곳으로 소집해 줘.
집사 로봇은 즉시 생태 정원의 안내 방송 시스템에 접속해 난민들에게 농업 재배 구역으로 모이도록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은 방송을 듣고 하나둘씩 모여든 난민들로 북적였다.
응?
모두가 모이자, 집사 로봇의 음악 스타일이 확 바뀌었고, 추첨 발표의 전주와 같은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고조되는 흥분과 팽팽한 긴장감이 농업 재배 구역 전체를 가득 채웠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집사 로봇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 구성원 여러분은 현재 주거 구역 사용 권한을 해제하셨으며, 생산 및 생활에 필수적인 최저 등급의 에너지 사용 권한을 얻으셨습니다.
이제 "둥지 짓기" 시리즈 임무 2단계를 시작할 최적의 시기입니다. 비록 지금 들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여러분의 땀방울로 선조들이 남긴 선물을 수확하게 될 순간이 올 것입니다!
카무이... 집사 로봇의 뜻은 이곳에 비축된 식량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 농업 재배 구역의 항온 창고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식량 비축분과 귀중한 원시 종자 은행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잘됐네요, 루크 어르신! 제가 사람들을 불러서 식량을 옮길게요!
집사 로봇이 다시 날카로운 경보음을 냈다. 노란빛으로 변한 외눈이 당황한 버니를 향해 고정되었다.
경고합니다. 가족 간에는 어떤 형태의 강탈 행위도 금지됩니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가족 구성원 신분이 박탈됩니다.
주거 구역 때와 마찬가지로... 식량을 얻으려면 새로운 임무를 완수해야 할 것 같아.
빙고! "가장"의 임무 요청에 따라 "둥지 짓기" 시리즈 임무 2단계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가족 구성원 여러분에게 농업 재배 구역을 개방합니다.
가족 구성원 여러분은 해당 구역의 땅을 정리하고 갈아엎은 뒤, 희망의 씨앗을 처음으로 파종해 주십시오. 보상으로...
임무 완료 후 농업 재배 구역 항온 창고의 사용 권한을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개방하겠습니다.
추첨 발표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집사 로봇이 보상을 공표했다.
임무를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에, 시스템 설정에 따라 전 주인님의 "경작" 관련 영상을 재생합니다.
카무이와 지휘관을 비롯한 모두가 모여들어, 집사 로봇이 재생하는 영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언젠가 우리만의 집이 생긴다면, 꼭 이런 밭 하나는 가꾸고 싶다고 늘 생각했어요."
이번 영상의 주인공은 단아한 여주인이 아니었다. 옷자락에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숨을 헐떡이면서 햇살 같은 활기를 내뿜고 있었다.
영상 속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흐릿하게 보였지만, 유쾌한 말투와 분위기만으로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이전 영상 속 여주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렌즈 너머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이 장면을 담아내는 여주인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예전엔 흙이 더럽다고만 생각했는데, 봐요. 생명은 결국 이 흙에서 시작되잖아요. 우리 감정처럼 말이죠. 정성껏 가꾸다 보면 언젠가는 수확하는 날이 올 거예요."
영상이 끝나자, 집사 로봇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가족 구성원 여러분은 임무를 확인해 주십시오. 각종 도구의 사용 권한이 임시로 개방되었습니다. 모두 힘내시기 바랍니다.
집사 로봇은 다시 경쾌한 음악을 틀며 우스꽝스럽게 농업 재배 구역을 빠져나갔다.
농업 재배 구역의 조명 시스템이 마치 새로운 임무의 시작을 감지한 듯 서서히 밝아지며, 현장의 윤곽을 부드럽게 드러냈다.
면적이 꽤 넓네. 오늘 작업은 쉽지 않겠어.
카무이, 그리고 [player name], 모두의 식량을 위한 일인데, 자네들만 고생하게 둘 수는 없지.
뒤에서 루크의 늙었지만 정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무이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루크 옆에는 버니를 필두로 젊고 건장한 난민 몇 명이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농사라면 저희가 전문가입니다. 게다가 우리 식량이 걸린 일이잖아요!
걱정 말고, 저희만 믿으세요.
역할 분담이 끝나자, 난민들은 도구를 하나씩 챙겨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떠들썩하던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카무이와 지휘관만 남게 되었다.
지휘관은 괭이 한 자루를 카무이에게 건네고 배정된 구역으로 함께 걸어갔다.
곳곳으로 흩어진 난민들의 작업 소리와 활기찬 구호가 드넓은 농업 재배 구역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카무이는 괭이를 쥔 채 진지한 표정으로 땅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잠시 망설이던 카무이는 신중하게 괭이를 들어 올린 뒤,
온 힘을 다해 땅을 향해 내리쳤다.
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 자루가 두 동강 나버렸다. 괭이날은 땅에 깊숙이 박혔고, 그 반동으로 커다란 흙덩이가 튀어 올라 카무이의 얼굴을 덮쳤다.
쳇...
카무이는 난감한 듯 "쳇" 소리를 내더니 땅에 박힌 괭이 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다.
흙투성이로 뒤범벅된 카무이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지휘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무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할게.
카무이가 거절할 틈도 없이, 지휘관은 손을 뻗어 카무이의 얼굴에 남은 흙을 닦아주고, 머리카락 사이에 낀 흙덩이도 세심하게 털어주었다.
카무이의 손에 새 괭이가 쥐어졌고, 지휘관은 자연스럽게 카무이의 곁에 섰다.
지휘관은 괭이를 쥔 카무이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리고 카무이의 자세를 조정해 주며, 힘을 주느라 뻣뻣해진 근육을 풀어 줬다.
윽... 저기.
지휘관의 따뜻한 온기가 불쑥 닿자 카무이의 몸이 다시 굳어버렸고, 호흡도 무의식적으로 한 박자 흐트러졌다.
지휘관은 카무이 옆에서 자세를 잡아주며 올바르게 힘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지휘관의 설명에 따라 괭이가 가볍게 들렸다가 부드럽게 흙을 갈랐다. 그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가벼웠다.
카무이는 자신의 손 위에 포개진 지휘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힘을 주고 있는 건 지휘관인데, 오히려 카무이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그러자 평온해 보이던 카무이의 얼굴도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 묘한 감각에 카무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좀 알 것 같아.
카무이의 목소리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지휘관의 숨결과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맴돌자, 주변의 소음은 아득히 멀어지고, 오직 곁에 있는 온기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player name], 요령을 파악했어. 이제 내가 직접 할 게.
지휘관은 카무이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듯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카무이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려는 듯 슬쩍 몸을 돌렸다.
요령은 알겠는데 진도가 너무 느려. 이제 속도를 좀 올려야겠어.
가까웠던 지휘관과의 접촉에서 벗어나자, 카무이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한 눈동자 속에서 스쳐 지나간 아쉬움도 이내 사라졌다.
이후의 작업에서 카무이는 유난히 말이 없었고, 오로지 기계적으로 괭이를 휘두르며 작업에 몰두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남아도는 힘을 어떻게든 쏟아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둘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구역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서툴기만 했던 손길은 어느새 능숙해졌고, 마침내 농업 재배 구역 전체의 땅이 새로 갈아엎어졌다. 그 위로는 미래와 희망을 상징하는 씨앗들이 심어졌다.
마지막 씨앗 위로 흙이 덮이자, 텅 빈 농업 재배 구역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이 그 함성을 인식했는지, 안내 방송이 때맞춰 흘러나왔다.
동글동글한 집사 로봇이 익숙한 음악과 함께, 모두의 앞에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 구성원 여러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완벽한 협력과 단합으로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시스템 평가 결과, 임무 달성도는 "완벽"입니다.
완벽이라... 그럼, 창고에 있는 비상식량을 쓸 수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부지런한 땀방울은 보상을 얻는 열쇠입니다. "둥지 짓기" 시리즈 2단계 임무 계획에 따라...
농업 재배 구역 항온 창고의 권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니, 수확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성대한 추첨이라도 시작되는 듯한 경쾌한 음악과 함께, 농업 재배 구역 먼 곳에서 두꺼운 창고 문이 양옆으로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아직 안쪽을 보지 못했는데도 모두가 벼와 밀의 향기를 맡은 듯했다. 난민들은 풍년을 맞이한 것처럼 환호했고, 흥분한 이들이 모자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어이! 참... 버니, 그건 우리가 먹을 식량이니 좀 살살 다루게!
식량 자루를 짊어지고 가던 버니는 옆에 있던 루크의 꾸지람에 정신을 차린 듯, 조심스럽게 자루를 주거 구역 로비에 쌓인 상자 위로 안착시켰다.
항온 창고의 권한을 얻은 후, 지휘관과 카무이는 난민들을 이끌고 필요한 식량과 씨앗을 모두 주거 구역으로 옮겼다.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던 난민들은 로비에 산더미처럼 쌓인 식량을 보며, 눈 속에 다시 희망의 불씨를 피웠다.
난민들이 식량을 한꺼번에 낭비하지 않도록, 지휘관은 비축된 식량과 앞으로의 지원을 고려해 세심하고 철저한 물자 분배 계획을 마련했다.
지휘관은 방 번호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식량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 상자네. [player name]한테 창고 재고 상황을 알려줘야겠어.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은 카무이는 허리를 펴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레이더처럼 무의식적으로 군중 속 지휘관의 위치를 찾아냈다.
지휘관은 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모두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며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려 애썼다. 그곳은 웃음과 눈물로 만들어진 하나의 원 같았고, 원의 중심엔 지휘관이 있었다.
후...
카무이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이전의 전투가 끝났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는 지휘관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디뎠던 발은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가, 이내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너무 붐비네.
카무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지휘관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친절함"의 표현이라고만 여겼던 신체 접촉이 지금은 유난히 거슬려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모여 있어. 공기 순환이 잘 안될 거야.)
(이런 무질서한 접촉은 병균 전파 위험도 있고, [player name]의 체력 역시 크게 소모될 수 있어.)
(특히 [player name]은(는) 벌써 몇 시간째 중노동을 한 상황이라 더 위험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현장에 있는 이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player name]을(를) 쉬게 하는 거야. 배급은 내가 나중에 하면 되니까.)
카무이의 이성은 "지휘관을 빼내야 하는" 백 가지 정당한 이유를 미친 듯이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무이는 제자리에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로 지휘관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저런 미소는 나한테만 보여주는 게 아니었어.)
카무이는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가슴 깊숙이 박힌 듯한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축축한 감각이 밀려들었고, 숨을 쉴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먹먹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카무이는 눈앞의 광경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지휘관의 빛은 너무 밝았고, 인파 밖으로 밀려난 카무이는 그 빛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player name]은(는) 역시 인기가 많아. 좋은 일이지.
이건 난민 집단의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야.
카무이는 논리와 이성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지휘관을 위해 기뻐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입꼬리 근육은 고집스럽게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지으려다 만 그 표정은 어색하고도 우스꽝스러웠다.
보고는 나중에 해야겠다.
당장 보고해야 할 급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카무이가 내세우는 모든 망설임과 핑계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그 비뚤어지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카무이는 그 다정한 미소가 적어도 지금은 자신에게만 향하기를 바랐다. 자신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이 기묘하고 옹졸한 감정이 카무이를 당황스럽게 했다.
방금 재배 구역에 있을 때는 다들 [player name]와(과)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인파에서 나온 카무이는 기둥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난민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과묵하던 버니는 지휘관을 도와 식량을 나누고 있었고, 루크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무이는 지금 지휘관 곁에 서 있어야 하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지휘관의 미소를 보자, 카무이의 미간은 점점 더 찌푸려졌다. 핑계를 대서라도 지휘관을 "구출"해 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빽빽하던 인파가 마침내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자, 식량을 받았으면 돌아가서 쉬게! 다들 고생 많았어. 이제 [player name]도 좀 쉬게 해줘야지.
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가서 맛있는 밥 해 먹어야죠!
오늘도 고생이 많았어요, [player name].
[player name], 고마워. 그럼 먼저 가볼게.
...
축복의 인사와 함께 난민들은 식량을 안고 기쁘게 흩어졌다. 현장에는 곧 몇 명 남지 않게 되었고, 인파가 사라지자 버니는 문밖에 기대어 있는 카무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카무이! 방금까지 어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치 빠른 루크가 버니의 말을 끊었다.
버니, 우리도 그만 돌아가야지.
네?
가세!
버니는 그제야 루크의 암시를 알아차리고 카무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뒤, 재빨리 로비를 빠져나갔다.
지휘관도 밖으로 나와 기둥 옆에 서 있는 카무이를 발견했다. 카무이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어. 방금 인파가 너무 많이 모여서 혼란이 생길까 봐...
외곽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기면 바로 지원할 수 있으니까.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자꾸만 시선을 피하는 카무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휘관은 다가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카무이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player name]... 머리가 헝클어지잖아.
카무이는 지휘관의 손길을 피해 옆으로 쓱 피하면서, 원망 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지휘관의 말에 정곡이 찔린 듯한 카무이는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다들 네가 먼저 쉬어야 한다는 걸 고려해 주지 않는 거 같아서. 방금 밭에서 일할 때 나도 꽤 피곤했거든.
축하해주는 것도 좋지만 네 몸 상태를 생각했어야지. 뭐, 그래도 다들 널 그렇게 아껴주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횡설수설하던 카무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제롬이 자신과 [player name]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들켰는데도 제롬은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메롱을 하며 장난을 쳤다.
메롱... 카무이 형,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갑자기 뒤에서 조롱이 섞인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비아냥거리는 말투만으로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롬은 어른인 척 뒷짐을 지고 실룩거리며 다가왔다.
그런 거 아니야!
제롬의 너무나도 직설적인 공격에 카무이의 방어벽이 무너졌다. 얼굴이 빨갛게 변해버린 카무이는 지휘관에게 허둥지둥 변명했다.
버니 형이 급하게 가면서 물건을 놓고 갔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 가져가려고요.
때마침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카무이 형이 왜 계속 문밖에 서 있나 했더니, [player name] 님이 달래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네요?
옆에서 부추기는 제롬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지휘관이 카무이를 어떻게 달래줄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지휘관이 의외로 진지하게 대답하자, 제롬은 당황한 듯 멈칫했다.
그제야 카무이는 지휘관의 목소리에 섞인 피로를 알아채고 무의식적으로 지휘관을 부축했다. 카무이의 눈빛에는 걱정과 자책이 뒤섞여 있었다.
[player name]...
쳇... 재미없어라. 물건은 찾았으니 전 이제 밥 먹으러 가볼게요.
방해 안 할게요.
제롬은 혀를 내밀고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을 남긴 뒤, 깡충거리며 사라졌다.
이제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카무이는 피곤함이 배어 있는 지휘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의 모든 어색함과 거리감은 이 피로함에 완전히 증발해 버린 듯했고, 오직 따스하고 둔탁한 자책감만이 조용히 마음속에 차올랐다.
내 실수야. 내가 도와줘야 했는데...
카무이는 자책감이 섞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먼저 가서 쉬어. 내가 바래다줄게.
밤이 깊어졌다. 생태 정원 밖에는 천둥소리가 낮게 울렸지만, 내부는 평온했다. 우뚝 솟아 있는 에너지 제어 센터의 불빛은 숨을 쉬듯 깜빡거리며, 어둠 속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카무이의 초저녁 불침번은 너무나 순조롭고 한가로웠다. 심지어 밤새우는 것을 좋아하는 제롬조차 방해하러 오지 않았다. 무사히 불침번 임무를 마친 카무이는 짙게 몰려오는 졸음과 피로를 안은 채, "이름 미정의 방"으로 돌아왔다.
카무이는 지휘관이 깰까 봐 문 앞까지 살금살금 다가간 후, 문밖에서 잠시 망설였다.
문틈 사이로 여전히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player name]이(가) 불을 끄는 걸 깜빡했나?
카무이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방 안에는 여전히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지휘관은 겉옷을 걸친 채 책상에 앉아, 단말기 위로 펼쳐진 홀로그램 화면에 무언가를 빼곡히 입력하고 있었다.
카무이가 돌아온 걸 알아챈 지휘관은 단말기를 끄고, 카무이를 돌아보았다.
[player name], 전에 불침번에 관해 협상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은 네 휴식 시간이야. 근데 뭘 작성하고 있어?
카무이의 평온한 얼굴에 놀란 듯한 주름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휘관은 카무이의 말에 미세하게 섞인 호기심과 원망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도와줄까?
극비라...
카무이는 멍해졌다. "극비"라는 이유로 도움을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입꼬리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그래도 일찍 쉬는 게 좋아. 낮에 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계속 이러다간 몸이 버티지 못할 거야. 나... 그리고 여기 모두가 너 없으면 안 돼.
카무이는 지휘관의 옆으로 다가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피곤함에 절어 있는 지휘관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라는 단어 속에 숨겨 전했다.
남은 불침번도 그냥 내가 설 게. 충분히 쉬지 못한 것 같아 보여.
카무이는 단말기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지휘관에게 더 쉴 것을 제안했다.
지휘관은 부드러우면서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지휘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
지휘관을 바라보는 카무이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따뜻하게 입어. 천막이 있긴 해도 방금 또 천둥소리가 들렸어. 밤에는 기온도 떨어지고, 악천후가 며칠이나 더 갈지 모르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자리에서 일어난 지휘관은 옷깃을 정리하고 손전등을 챙겨 문 쪽으로 걸어갔다. 카무이 곁을 지날 때, 카무이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지휘관의 흘러내린 외투 깃을 바로잡아 주었다.
잘 자, [player name]. 조심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카무이는 방 안에 홀로 남겨졌다. 그 사이 지휘관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곁으로 걸어갔다.
우르르릉... 천둥소리가 점점 잦아지더니 묵직하게 머리 위를 짓눌러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