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잠에서 깬 인간은 바로 눈앞에 알파의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파의 귀 뒤로 흘러내린 흰 머리카락이 인간의 두 눈을 가렸고, 부드럽게 뺨을 스쳐 간지러운 느낌을 전해왔다.
멍하니 있는 알파는 인간이 깨어난 것을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
알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리며 방을 나가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어.
하... 잘 휴식한 것 같네.
알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 했다.
인간이 상체를 일으키고 나서야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있고, 몸 위에 담요가 덮여 있는 걸 발견했다.
안 길어, 세 시간 정도. 밖은 이미 어두워졌어.
롤랑이 음식을 준비했어.
알파는 방을 나선 뒤 문을 닫았고, 인간에게 혼자만의 공간을 남겨주었다.
인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알파는 구석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고, 롤랑은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의 음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라미아는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롤랑이 눈길을 돌린 순간 포크로 소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스테이크, 매시드포테이토, 푸아그라, 팝콘, 국수, 견과류... 별의별 음식이 한데 모였다. 이런 푸짐한 상을 준비하느라 롤랑도 꽤 많은 공을 들인 것 같았다.
내 견과류~
라미아의 비상 간식도 징발당한 모양이었다.
식탁 앞에 앉아 소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으며, 인간은 방금 전의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알파도 인간 곁으로 와 앉았다.
적어도 대부분은 처리할 생각이야.
도시 서쪽에 병기 공장이 하나 있는데, 진이 그곳을 기계체를 생산하는 시설로 개조했어.
롤랑은 단말기를 열어 일행 머리 위로 도시의 가상 지도를 투영했다.
롤랑은 즉시 가상 지도 위에서 도시 외곽과 서쪽에 있는 구역을 밝혔다.
매시드포테이토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인간은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전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건 어때?
인간이 도시 동쪽 끝자락의 폐허 광장을 가리키자, 가상 지도가 확대되며 고목 광장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오? 창의적인 발상인데. 그다음 여기에 기계체가 충분히 모이면... 쾅!
진이랑 기계체들이 다 박살 나는 거지.
나도 작전에 참여해야 해...?
농땡이는 금지야.
괜찮은 작전인 것 같아. 일단 EMP와 폭탄을 모을 시간이 필요해.
진은 내가 직접 끝장낼 거야. 롤랑, 그때 가서 네 무기를 좀 빌려줘.
롤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OK 손짓을 해 보였다.
롤랑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롤랑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한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다른 한 손을 높게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드높여 외쳤다.
롤랑의 비밀 무기 창고, 한정 개방! 원하는 걸 마음껏 가져가도 돼!
순간, 벽에 작은 틈이 생기더니 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벽이 천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안에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는 파란빛이 쏟아져 내려 방 안을 차갑게 물들였고, 금속 무기들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냉랭하고 살벌한 분위기는 이전의 낡은 사무실과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장검, 단검, 단도, 권총, 소총... 온갖 무기들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치대에는 동력갑이 걸려 있었다. 세심하게 관리된 듯한 동력갑 위에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 휘장까지 새겨 있었다.
익숙한 동력갑을 보며 인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암시장에서 건진 거야. 내가 정성껏 관리했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 중요한 건 지금의 네게 어울리는 무기라는 거야.
옆의 방수포로 덮인 물건에 눈길이 사로잡힌 알파는, 그쪽으로 다가가 방수포를 들어 올렸다.
반쯤 해체된 대형 오토바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알파는 가까이 가서 오토바이의 프레임, 엔진, 타이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건... 내가 고칠 수 있어.
수리 공구랑 예비 부품은 다 갖춰져 있으니, 마음껏 써. 알파 아가씨.
그럼 이제 각자 전투 준비할 시간이네. 난 폭탄이랑 EMP를 준비하러 갈게.
롤랑은 몸을 돌려 방을 떠났고, 그 전에 라디오를 켜서 음악을 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알파는 곧장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가 알맞은 공구를 찾아 작업을 시작했다.
인간은 탄산음료 한 캔을 옆쪽 작업대 위에 올려두고, 다른 한 캔의 손잡이를 당겼다. 곧이어 캔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알파는 렌치로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 지휘관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적어도 파오스 군사 지휘 학교 시절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특별히 기계를 수리하는 데 능숙하지 않았다.
독학한 거야. 많이 해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
지상엔 묻혀 있는 보물이 많거든. 시간만 들이면 웬만한 건 다 배울 수 있어.
알파는 인간의 손에 들린 음료를 힐끗 쳐다봤다.
...
인간은 작업대 위의 탄산음료를 따서 알파에게 건넸다.
라디오에서 갑자기 좀 퇴폐적인 포스트 펑크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난 믿어... 아직은 헛되지 않을 거라고..."
알파는 작업대에 기댄 채 손을 닦고,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알파의 눈동자에 회상하는 빛이 스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냥 걸림돌일 뿐이야.
날 걱정할 필요 없어.
누구에게나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전투 준비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인간은 장비를 꼼꼼히 점검하고, 무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며,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했다.
알파는 걸레로 오토바이 위의 기름을 닦아낸 후, 두 걸음 물러서며 완전히 탈바꿈한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걸레를 옆의 공구통에 던져 넣고, 옆방 소파에 앉아 있는 롤랑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자.
도시 동쪽 외곽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오토바이가 황야를 달리며, 뒤로 흙먼지 한 줄기를 남긴 채 동쪽으로 질주했다.
알파는 몸을 낮춰 오토바이를 몰고 있었고, 동력갑을 입은 인간은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멀리서 빽빽한 검은 점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진의 기계 군단이었다. 진은 균열 근처에 허술하지만 규모가 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오토바이의 속도가 다시 한번 올라가며, 속도계기판 바늘이 거의 레드라인에 닿았다.
둘은 곧 순찰 중이던 기계체에게 들키고 말았다.
고위협 대상 발견! 데이터베이스 조회 중... 조회 완료! 수배 등급: 최상위!
고위협 대상 발견! 행동을 즉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심판을 기다려라!
시끄럽군.
웅웅...
인간의 총에서 광선이 발사되었고, 순식간에 눈앞의 기계체를 관통했다.
잡졸이 너무 많아. 화력을 더 올려.
인간은 유탄을 유탄 발사기에 쑤셔 넣었다.
쾅! 쾅! 쾅!
유탄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기계체 군단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쾅!
곧이어 주황색 불덩이가 기계체 무리 한가운데서 터져 나왔다.
충격파는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환형으로 퍼져 나갔고, 수십 기의 기계체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산산조각 났다.
이후 불타는 잔해들이 땅으로 쏟아지며, 주위 기계체들을 사방으로 날려버렸다.
꽉 잡아.
알파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자, 오토바이는 노면에 검은 타이어 자국을 길게 그리며 180도 드리프트 후 멈춰 섰다.
이후 알파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장검을 뽑았고, 칼날에는 섬뜩한 진홍빛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첫 번째로 다가온 기계체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둘을 향해 덮쳐들었다.
알파는 앞으로 달려 나가며 장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선두에 선 기계체는 장검과 정면으로 맞부딪혔고, 곧 불꽃과 함께 귀를 찢는 듯한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기계체는 순간 두 동강이 났다.
알파는 칼날을 가볍게 털고, 눈길을 "균열" 방향으로 돌렸다.
진, 당장 나와!
알파의 말에 응답하듯, 여러 다리를 가진 기계체가 기계체 무리 사이를 뛰어넘으며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 하하하!
결판...&%내자!
진은 세찬 기세로 높이 뛰어오르며, 공중에서 절지를 활짝 펼쳤다. 그 모습은 마치 금속 꽃이 활짝 피어난 듯, 이내 굉음과 함께 둘이 있는 곳으로 거세게 내리꽂혔다.
인간과 알파는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진은 방금 서 있던 자리에 강하게 내리쳐 절지를 땅속 깊이 박았다. 이내 그 자리를 중심으로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아래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덤벼봐!
알파가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고, 칼끝은 진의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인간도 동시에 총을 쏘았고, 광선이 진의 펼쳐진 절지를 향해 날아갔다.
쾅!
진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고,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찼다.
다 죽여버리겠어!!
그의 말과 함께 더 많은 기계체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알파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고, 휘둘러진 칼날은 사신의 낫처럼 부서진 부품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전투는 10분간 이어졌고, 기계체의 잔해는 작은 산처럼 쌓여갔다.
알파는 "힘겹게" 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두 걸음 물러섰다.
후...
수가 너무 많아.
인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옆에 있는 기계체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딱 들어맞는 "당황함"이 배어 있었다.
알파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가자.
알파가 칼을 휘두르며 주변의 기계체들을 물리쳤고, 둘은 오토바이 쪽으로 다가갔다.
차에 타.
엔진은 굉음을 내지르며 둘을 태우고 도시 외곽을 향해 달려갔다.
진은 흥분한 듯 절지를 흔들어대며 기계체들을 지휘했다.
쫓아라!!
기계체의 파도가 둘이 철수한 방향으로 밀려들었다.
고목 광장
도시 동쪽
롤랑은 높은 곳에 서서, 광장으로 달려오는 오토바이와 뒤에서 빽빽이 몰려오는 기계체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계획이 순조로운 것 같네.
오토바이가 광장으로 들어와 멈춰 섰고,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계체 무리도 광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늘에는 수백 대의 무장 무인기가 메뚜기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은 높이 뛰어올라 앞에 있는 기계체 부대를 넘어 광장 한가운데에 내리꽂혔다. 이후 그는 핏빛 어린 두 눈으로 둘을 쏘아보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어! ...%이제 죽어!
탕!
인간의 총알에 말이 끊긴 진은 더욱 난폭해졌다.
알파는 몸을 낮추고 단검을 뽑아 들어 진을 향해 돌진했다.
다음 순간, 고목 광장을 중심으로 지면에서 무거운 진동이 울리더니,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펄스파가 퍼져 나가며 주변의 모든 전자 기기를 마비시켰다.
돌격하던, 조준하던, 사격하던 기계체는 모두 동시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후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우르르 쓰러졌고, 하늘을 뒤덮은 무인기도 일제히 지면으로 추락했다.
뭐지?!
말이 너무 많아!
찬란한 붉은빛이 번뜩이며, 알파의 장검은 순식간에 진의 절지를 모조리 잘라냈다.
후...
알파는 숨을 길게 내쉬며 검을 허리에 거두었다.
도시 서쪽, 어두컴컴한 공장 안에서 생산 라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살육 병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히익...
라미아는 조심스럽게 공장에서 빠져나왔다.
폭탄은 다 설치됐고, 이제 터뜨리기만 하면 돼.
충분히 거리를 벌린 후, 라미아는 고개를 돌려 고요한 공장을 바라보았다.
음... 이걸 누르면 되겠지.
바닥에 쓰러진 진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셋을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효과 좋네~
총.
롤랑은 자신의 총에 특제 폭렬탄 한 발을 장전한 뒤, 알파에게 건넸다.
네놈들!!!
알파는 총을 받아 들고, 주저 없이 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와 동시에 도시 반대편 병기 공장 방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 폭발 연기 안에는 누군가가 준비해 둔 폭죽까지 섞여 있었다.
폭죽은 하늘에서 아바타 라미아의 얼굴을 그려냈다.
끝났다, 진.
알파와 인간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를 떠나 멀리 있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가 "그림자"에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오토바이 옆에는 자동차 한 대가 함께 달리고 있었다. 롤랑이 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라미아는 계속 아이돌 활동을 이어갈 거야.
난... 아마 시내 한복판에 사무소를 차리겠지.
아니면 루나 사장님을 찾아갈 수도 있고, 어쨌든 꽤 평온한 삶을 살 것 같아.
...
앞쪽의 "균열"이 서서히 선명해졌고, 함께 나타난 것은 십여 기의 기계체였다.
기계체 주위에 다다르자, 셋은 각자 차에서 내렸다.
어디 보자, 마지막 엑스트라들이 등장했네.
네 전술은 상상 이상으로 잘 통했어.
나한테 맡겨. 이게 내가 너희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야.
롤랑은 항상 짓던 웃음을 거두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알파 아가씨...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때.
설령 그게 물거품에 불과할 지라도...
무슨 뜻이야?
연극 속의 배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질 필요가 있어?
말을 마친 롤랑은 웃으며 기계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응...
둘은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엔진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균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