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은 여유롭게 대관람차에 앉아 무료한 모습으로 창을 이리저리 돌렸다.
갑자기, 그는 모든 동작을 멈추더니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 미끼를 물어버렸네, 그레이 레이븐.
한편, 쇼메는 모래 위에 세운 전투기에서 내려 유원지 쪽으로 걸어갔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롤랑은 기지개를 켜더니 대관람차에서 내려 쇼메를 향해 다가갔다.
드디어 왔네. 정말 오래 기다렸어.
시간은 롤랑과 카무의 교전 이후로 넘어간다.
센 척 하고 싶으면 지금 해봐.
말을 마친 롤랑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카무 앞에서 등을 돌려 떠났다.
그리고 대검을 짚고 겨우 서 있는 카무만 남겨졌다.
아, 너희들에게 이별 선물 하나 줄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말한 롤랑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총을 들어 카무를 향해 사격했다. 롤랑의 예상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카무는 빠르게 사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총이 발사한 건 살상력을 가진 총탄이 아니라 단단한 체인이었다. 체인은 카무 뒤에 있는 벽에 단단히 박혔다.
그럼 안녕, 귀찮은 자식아.
말을 마친 롤랑은 체인을 가볍게 당겼다. 체인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롤랑은 그 힘을 빌려 카무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허공에서 롤랑은 품 속에서 꺼낸 리모컨을 눌렀고, 곳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후.
체인을 놓은 뒤 롤랑은 유원지 내부에 착지했다. 이때 롤랑의 얼굴에서는 평소 같은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남은 건 너한테 맡길게, 덩치.
격렬한 진동이 지표면을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폭발음도 에너지 중추가 무질서하게 확장하면서 내는 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롤랑이 타겟과 접촉했나 보군.
그럼 곧 여기로 오겠군.
가브리엘은 몸을 숨기고 조용히 쇼메가 오기를 기다렸다.
롤랑이 이런 곳에 나타나다니... 역시 들킨 건가?
하지만 괜찮아. 공중 정원 사람들이 때마침 롤랑의 다리를 묶어두고 있으니까.
롤랑이 날 쫓아오기 전에 내 실험을 완성하면 판이 뒤집힐 거야.
쇼메는 말을 하며 안경을 만지며 에너지 중추의 제어실로 향했다. 그의 두 손은 제어실 스크린을 빠르게 클릭했지만 쇼메는 곧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응? 생산라인을 작동시킬 수 있을 텐데. 젠장, 너무 오래 쓰지 않아서 어디가 막힌 건가?
쯧, 이러면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겠어.
미안하군요. 네 허락도 없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손 좀 대봤습니다.
가브리엘은 대사와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와 쇼메의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너였어!
쇼메의 놀라운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브리엘은 본론으로 돌입했다.
왜 여기로 온 거죠?
……
쇼메는 침묵하며 주위를 관찰했다. 가브리엘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가 제어실 출구를 막고 있는 이상 쇼메는 도망 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해주면 날 도울 건가?
당연히 아니죠.
들어봐도 손해볼거는 없을텐데.
그리고 네가 여길 중도 재난 구역으로 만들어 준 탓에 우리의 절차가 하나 줄어들었다고.
통제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인을 막기 위해서 그런 것 뿐입니다.
그렇다지만 중도 재난 구역에서 무질서하게 확산되는 기계는 우리 승격자들에게 쓸모없지만 막대한 데이터를 제공해줬지. 적당한 가이드만 해주면 이곳은 전 세계에서 생산력이 가장 뛰어난 기계 공장이 될 거야.
기계 개조에 관심있지 않았어? 우리 모두 한계를 돌파하는 힘을 원하는 거야. 네 실행력과 내 연구 데이터를 합한다면 실험 완성시간을 적어도 60% 앞당길 수 있을 거야.
가브리엘은 한 손으로 제어실의 벽을 세게 내리쳤다. 방 전체는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흔들렸다.
시간을 끄는 방법은 여전히 예전처럼 서투시군요.
가브리엘의 말을 들은 쇼메는 억지로 미소를 짓다가 안경을 올렸다.
마지막에 누가 강자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
?!
제어실의 바닥이 갑자기 조각으로 변했다. 가브리엘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미처 반응을 하지 못하고 조각난 타일과 함께 에너지 중추의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동안 가브리엘은 제어실 스크린 앞의 바닥만 멀쩡하고 쇼메가 그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할아버지가 나한테 남겨주신 유원지야, 다른 함정이 존재한다는 걸 배제해서는 안되지.
잘가.
가브리엘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칠흑같은 금속 날개가 등에서 펼쳐졌다. 가브리엘의 추락속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안정적으로 허공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팔을 휘둘러 지팡이를 위쪽으로 던졌다.
쳇.
가브리엘의 지팡이는 쇼메의 얼굴을 스쳐 쇼메 뒤에 있는 벽에 꽂혔다. 지팡이가 지나가면서 생성한 바람이 쇼메의 인조피부를 찢어지게 만들었고 순환액이 그의 상처에서 천천히 흘러내렸다.
일단 이 귀찮은 것들을 떨궈내야 마음 편히 실험을 할 수 있겠네.
가브리엘의 자태를 본 쇼메는 빠르게 돌아서더니 제어실의 스크린을 터치했다. 그리고 스크린 하단에서 옅은 푸른색을 띈 사각형 칩을 꺼냈다.
얘를 믿을 수밖에.
쇼메는 말을 마친 후 남은 바닥 타일을 따라 제어실에서 뛰어나와 지상으로 달려갔다.
가브리엘은 끊임없이 추락하는 바닥 타일을 피하며 다시 제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멈춰선 가브리엘은 코트를 정리하더니 쇼메를 따라 제어실을 나섰다.
젠장, 폭발 때문에 대부분 출구가 다 막혀버렸어.
쇼메는 달리며 안경에 투영되는 에너지 중추 지도를 살펴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진동에 쇼메는 그가 남겨둔 함정이 딱히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네.
……
칫, 점점 가까워져.
화력 제어 모듈을 작동시키고 경비 안전 잠금장치를 해제해. 어서. 전부 가서 저 괴물을 막으라고.
——!
대량의 침식체들이 쇼메가 지나간 복도에서 몰려오더니 가브리엘 쪽으로 달려들었다.
의미없는 발버둥이야.
침식체 중 하나는 바닥에서 뛰어올라 가브리엘을 공격했다. 가브리엘은 살짝 몸을 비켜 기습을 피했다. 침식체가 허공에 떠있는 순간, 그는 일격을 날렸고 침식체는 복도의 벽에 아예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또 다른 침식체를 거칠게 잡더니 두 손으로 압력을 가해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달려오는 침식체 무리에게 던졌다. 대부분 침식체들은 이 충격으로 인해 바닥에 널부러졌다.
침식체들이 쓰러지자 복도의 벽에서 수많은 기관총이 나타났다.
세계 9735형 중기관총, 이 정도 총탄으로는 내 기체를 뚫을 수 없지.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하며 기관총의 공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꿋꿋이 앞으로 걸어갔다. 고속 사격으로 인해 발생한 불꽃과 연기가 좁은 복도에 퍼졌다. 연기가 걷히니 벽에 박혀있던 기관총은 온데간데 없고 전기를 내뿜는 기관총 받침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복도안 가브리엘은 가만히 서서 쇼메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클라이맥스가 끝났으니 모든 것이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이렇게 말한 가브리엘은 직접 뽑은 기관총을 버리고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헉, 헉, 헉
쇼메는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왔고 엘리베이터의 콘솔을 빠르게 눌렀다.
엘리베이터 잠금 프로그램 작동, 잠금 성공.
여러 조작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더 이상 쓸 수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쇼메는 제어 콘솔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위 광장을 둘러보니 이곳의 모든 것들은 할아버지가 그에게 보여줬던 설계도와 똑같았다. 중간에 있는 샥스빌 조각에서 미리 설정해 놓은 동요를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같이 놀아요!
샥스빌은 진저 쿠키를 좋아하지!
후, 후...
몇 번 심호흡을 진행한 뒤 쇼메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중간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을 향해 걸어갔다.
드디어 도착했네. 이제 조각상을 작동시켜 도망칠 시간을 벌어준다면...
도망?
어?!
장엄한 여자의 목소리가 조각상 뒤에서 흘러나왔다. 쇼메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식은땀이 인조 피부 위로 흘러나왔고 두려움으로 인해 몸이 덜덜 떨렸다. 다른 고민 따위 할 틈도 없이 쇼메는 돌아서 뒤로 도망쳤다.
아까 롤랑과 가브리엘을 봤을 때 마음 속에 일말의 요행이라도 바랐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머리를 채운 생각은 단 하나, 도망쳐야 한다 뿐이었다.
왜 루나 아가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거죠?
쇼메가 도망가는 도중, 가브리엘이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 쇼메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가브리엘은 앞으로 다가가 쇼메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도망치던 쇼메는 이 공격 한방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의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쇼메는 이제 모든 게 다 끝났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