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걸었는지 잊은 지 오래다.
소중한 것을 잃은 고통은 여전히 뼈저리게 남아 있다.
할 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앞으로 전진. 발을 멈추지 말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래야 뒤에 있는 이들에게 옳은 방향을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방관자요, 수호자요, 인도자다.
구룡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지금 광장에 모여 지도자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포와 불안으로 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고, 포뢰파 사람들은 광장 외곽에서 간신히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상회 본관 건물에서 요란한 벌소리가 들려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사람들이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곡이 구룡의 책임자들을 이끌고 본관 위에 서 있었다.
곡은 손을 들자 도시를 투영하는 스크린이 광장 위에 나타났다. 도시 외곽 구룡 상회의 관할구역에 밀집한 붉은 빛의 점이 끊임없이 도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퍼니싱 바이러스는 구룡의 영지를 차근차근 침식하고 있다.
몇시간 뒤에 침식체는 우리의 이 도시로 도착할 것이다.
저희는 어떻게 하죠!
이런.... 여기서 죽게 생겼군....
도망, 도망쳐야 돼.
곡의 말을 들은 군중은 다시 들썩였다. 의심과 절망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정말 진실을 백성에게 보여주실 건가요?
설령 진실이 절망적일지라도 군중은 알 권리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절망 속에서 거짓으로 엮어낸 희망이라도 만드는 것이다.
이 어둠 속에서 희망이 사라지면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멈춰버릴 수 밖에...
배를 타고 피난하는 것으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회피는 애초부터 장기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도시에 남아야 한다. 구룡의 지혜의 최고 산물—— 화서가 우리가 이 성에서 살아갈 방법을 계산해 내었다.
화서의 계산을 통해 우리의 의식을 데이터베이스로 저장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현실 세계가 어떻게 변해도 인류는 디지털 세계에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종족을 뛰어넘어 다른 문명의 흥망성쇠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별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이건, 화서가 퍼니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계산한 최고의 시나리오——만세명이다.
그러나 만세명을 실행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침식체가 이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 구룡에 있는 모든 사람을 백업을 마칠 수 없지. 이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우리 구룡파는 도시의 최전방을 지키며 만세명 계획에 참여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헛소리하지 마. 인류가 어떻게 저 많은 침식체를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군중의 말을 들은 곡은 손을 뻗어 눈 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투영 중인 광경은 계속 가까워지고 침식체의 무시무시한 형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들은 고함치며 전진했다.
보았느냐?
곡의 질문에 모두가 침묵에 잠긴 채 화면 속 영상을 보았다. 침식체의 고함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했다.
눈 앞에는 끝없는 탄두와 잔해가 뒤엉켜 있었다. 구룡 병사들의 외골격 아머가 부서진 채 전쟁터 위에 흩어져 있었고, 그 기갑 아래에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피와 살점이 보였다.
폭탄의 포효가 귓가를 휙휙 지나가고, 폭발하는 열풍이 몰아치자 인간의 시체가 비처럼 기계 조각에 섞여 병사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우습지 않은가?
이것들은 인간들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용되는 도구였지만, 결국 퍼니싱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구룡 상회 관할 지역 내에 이 천박한 하등 존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구룡은 이 행성에서 가장 큰 경제체계 중 하나로, 세계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동아시아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다.
인류의 도시가 점차 함락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편안히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구룡을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간 용감한 병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퍼니싱과 세계를 향해 구룡의 의지를 증명해 보였다. 우리는 이 녹슨 기계 무리들을 구룡의 땅에 영원히 잠들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같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신념의 확고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투영 속의 병사들은 손에 든 권총을 들어올려 뜨겁게 덮쳐오는 모래를 파헤치며 나아갔다.
총구의 화염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고, 그 분노는 강철 바다로 향했다.
지평선 위의 침식체의 정체가 바로 이 용솟음치는 바다이다. 모든 것을 삼킨 바닷물에 폭탄을 퍼부으면 잔물결이 흩어져 바다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 삼켰다.
한 포뢰파 병사는 과열된 무기를 버리고 어깨 보호대에서 남은 수류탄 세 개를 떼어냈다.
다음 순간 침식체들은 외골격 아머를 착용해도 키가 170도 안 되는 그 젊은 병사를 에워쌌다. 그리고 침식체 사이로 폭발이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침식체들은 바닥에 뒤집혔다.
대다수 침식체는 다시 일어나기도 전에 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구룡 땅에서 수많은 사람이 침식체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가족과 동료를 지킨다는 신념 하나로 죽은 동료의 무기를 주워 침식체에 맞섰다.
사람들은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지켜보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영웅들을 위해 애도를 표했다.
곡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광장의 사람들에게 말을 이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모여 오늘날의 구룡이 되었으며, 구룡인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쟁으로 구룡의 의지를 절대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이 행성에서는 우리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우리가 누구인가!
구룡!
우리가 누구인가!
구룡!
우리는 구룡의 자식들이고, 구룡의 의지가 우리의 신념이 가득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수적 차이만으로 우리 구룡의 앞을 막을 수 없다.
전쟁은 반드시 희생이 따르지만 최후의 한 사람만이 남아, 최후의 순간까지 구룡의 의지를 보여준다면 이 전쟁은 우리 구룡인의 승리가 될 것이다.
구룡의 역사에서 오늘의 전투만큼 달콤한 승리는 없을 것이다.
구룡의 백성이자 구룡 상회의 수호자들이여, 우리의 승리를 저 침식체들에게 각인시킬 것이다.
그들은 성스러운 구룡의 땅을 밟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영원히 발 들일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구룡의 문명은 지구의 종말까지 영원할 것이다.
여기는 구룡 상회의 도시다. 저 우스꽝스러운 기계들에게 구룡의 의지를 보여주자!
구룡 상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영원하라!
곡의 뒤에 있던 구룡파들은 감명을 받았다. 귀를 울리는 맹세가 구룡 상회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잦아들자 곡은 계속 입을 열었다.
상회의 항구는 계속 개방되어 있을 것이다.
도시에 남아 데이터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지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곡은 성벽 위에 서서 먼 곳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곡 님, 사람들은 이미 화서 쪽에서 백업을 시작했습니다. 형기는 백업의 진척을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항구의 방어 공사는?
연산은 침식체가 우리 항구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패하파를 거느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백령의 보고를 듣고 곡은 성벽을 내려갔다. 성벽 아래에는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재작년에 포뢰파에서 퇴역했습니다만, 이럴 땐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성을 수비하는 의미를 모르는 건가?
우리가 그 어떤 의식 백업을 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죠. 죽으면 그냥 죽는거죠.
음...
하하하하, 곡 님이나 다른 구룡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 이 점을 잘 알고 온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다른 구룡파 동료들처럼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동료..
그 자리에 서서 그 퇴역 군인의 말을 되새기고 있을 때, 백령은 한 걸음 먼저 나와 앞에 선 이들과 포옹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참, 정말 어쩔 수 없군.
곡은 백령과 군중들의 대화를 듣고는 허탈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럼 백령, 저들을 데리고 이문파를 찾아 군비 물자를 인도해.
시간이 많지 않아. 끝나면 날 찾아오고 우리는 외성 주변의 주민들을 엄호하며 성으로 철수시킨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