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한 발걸음, 방향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발자국, 여기저기 부딪혀서 나뒹구는 인테리어 소품들.
모든 현상은 쫓기는 상황에 익숙치 않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자가 이토록 당황해 한다면 그게 누구든 쫓아갈 만한 가치가 있음을 설명했다.
네.
임무를 맡겨주세요. 차징 팔콘은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순환액이 떨어진 발자국에서 좌우로 흩어져 한참을 걷던 우리는 천천히 유원지의 대문에 도착했다.
전투의 흔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전투능력이 없어 보였다.
인간형, 동양인 얼굴을 가진 남자가 유원지 입구 쪽에 멈춰있습니다.
아직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타겟을 제압할까요?
생각한 대로였다.
이 구조체는 추적당하는 것에 익숙치 않아 중상까지 입은 것 같았다.
구조체의 입을 열 생각이 없다고 해도 지금 응급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리에게 제압당한 사람은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제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저 리브가 응급 치료를 진행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구속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완전한 역원 장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작동 구조도 신형 구조체의 디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카디아 작전 시기의 디자인처럼 보였다.
다이달로스의 기술인건가... 하지만 정화 부대는 지금 밖에서 임무 수행 중이라 비앙카와 확인할 수도 없었다.
……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지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이 남자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몸 전체에 아카디아 시기의 디자인을 사용했으니 공중 정원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이 자식의 정체에 대해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록 100% 기대를 품을 수는 없지만 물어본다고 딱히 손해를 볼 것 같지도 않았다.
... 공중 정원의 공용 채널에 지금 바로 협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야겠다.
어? 내가 알기론 너희들은 휴가를 떠난 게... 뭐 됐다.
무슨 일이지?
잠깐만 기다려.
……
이게 뭐야? 이런 기체로 어떻게 침식체의 공격에 대항한 거지?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군. 리브가 응급처치를 해주고 있나?
리브의 역원 장치를 잠시 빌려 강화 스캔을 해봐야겠어...
... 승격 네트워크야.
예전이라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곡이 나타난 뒤로는 이 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승격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너의 단말기 스피커를 빌리고 싶은데.
……
이봐, 듣고 있다는 거 알아.
네 몸에 승격 네트워크의 특정 신호가 있다는 건 이미 알아냈어. 하지만 기체의 "한 곳"에 설치된 정체불명의 암격은 뭐지?
죽이려거든 죽여.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내가 죽으면 자동으로 파괴될 거야.
그럼 루나 아가씨는 영원히 그것을 얻을 기회를 잃게 되는 거지.
어차피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꼭두각시일 뿐이잖아? 너희들한테는 그 무엇도 말하지 않을 거야.
이 일에 "루나 아가씨"도 연루되어 있다고?
모르는 척하지 마.
네 앞에 있는 사람은 공중 정원 소속 집행 부대다. 네가 말하는 "루나 아가씨"가 파견한 사람이 아니라.
[player name], 그 사실을 증명해 봐.
... 왜 공중 정원의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정체불명의 남자는 당신을 힐끗 바라보더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구조체들을 훑어보았다.
정말 승격자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거야?
만약 당신들이 승격자가 아니라면 어쩌면...
바로 이때 검은 그림자가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먼지가 일었다.
지휘관님!
루시아는 지휘관의 외골격 뒤에 있는 손잡이를 잡더니 분사 기능을 이용해 먼지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먼지가 사라짐에 따라 천천히 착지했고 그 중앙에 있던 그림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잘 알고 있는 롤랑이라는 승격자가 정체불명의 남자 앞에 착지했다. 대부분의 충격을 받은 정체불명의 남자는 또 다시 모래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롤랑은 남자를 들더니 그 자를 함께 착지한 두 감염체에게 던져버렸고 그들은 바로 남자를 제압했다.
그리고 롤랑은 돌아서더니 전처럼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Hola,amigos(안녕, 친구들).
모두가 멀쩡한 채로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거야.
그래야 너희들 모두를 파괴하는 즐거움을 나 혼자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
그래, 나야.
오히려 너희들이 여기에 나타난 게 난 가장 놀라운 걸?
아니, 아니. 설명할 필요가 있나? 우리 승격자가 이곳의 주인이니까.
주인은 손님에게 왜 자기 집에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지. 오히려 왜 왔는지 설명해야 하는 건 손님 쪽이잖아.
장난하지 마. 네가 여기 있는 이상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
나쁜 손님이네. 진상객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마침 난 진상객들을 좋아하지.
그럼... 게임을 하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