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관은 붕괴되고 망가져 있었지만, 폐기된 아파트의 내부는 의외로 멀쩡했다. 물론 여기저기 균열은 있었지만, 안팎이 뚫린 곳은 전혀 없었다.
시멘트벽과 창문마다 널빤지로 만든 경고판이 붙어있어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내부의 형광등마저 고장 난 지금, 어둠만이 이곳을 채우는 유일한 색이었다.
손전등이 유일한 광원이 되어, 겨우 어둠 속에 작은 공간을 밝혔다.
아마도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 때문이겠지만, 다음 순간 어둠 속 깊은 곳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희미한 빛에 비친 바닥은 많이 낡아 있었고, 의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의외로 지저분하진 않았다.
음~
이게 네 진짜 모습이구나.
테디베어는 이상하게도 주변 환경보다 지휘관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쿨럭...
가벼운 기침 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어쨌든, 우선 이상한 소리가 나는지 들어봐.
!
이 소리, 위층에서 나는 것 같아.
테디베어가 말하며 지휘관 쪽을 바라봤고, 이런 상황에서 거절한다 해도 어차피 끌려갈 것이었다.
소리를 따라 아파트 4층 404호실 앞에 도착했다.
정말 분위기에 딱 맞는 숫자였다.
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니,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게 분명했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돌리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지휘관은 테디베어와 눈을 마주친 후 천천히 문을 밀어 열었다.
무서운 광경은 없었고, 아주 심플하고 깔끔한 방이었다. 컨스텔레이션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침대와 책상이 한눈에 들어왔고, 벽 쪽에는 철제 옷장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오직 소리만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열어볼까?
옷장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힘껏 당겼지만, 문은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다.
두 손으로 힘을 주자 귀가 아픈 듯한 "끼이익" 소리와 함께 주먹보다 조금 큰 틈이 벌어졌다.
틈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바닥에 있는 물체를 더듬으며 찾아 꺼냈다.
단말기잖아?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자 이상한 소리가 멈췄다.
그러자, 머릿속의 긴장도 함께 풀어졌다.
돌아보니 방은 그대로였지만, 테디베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큰 소리로 테디베어를 몇 번 불렀다. 텅 빈 건물 안에 메아리만 울려 퍼지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손전등으로 방 구석구석을 비춰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반쯤 열린 방문을 보니 들어올 때와 똑같았다. 그 사이에 아무도 이 문을 통해 나가지 않은 듯 보였다.
정말로 사라진 건가?
폐기된 아파트 안에는 침식체도 이합 생물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위험하다고 할 만한 것들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테디베어의 실력으로 그녀를 위협할 만한 건 거의 없을 거였다.
하지만 이걸 알면서도, 테디베어를 찾을 수 없다는 건...
옷장을 열었을 때까지만 해도 테디베어가 바로 옆에 있었다. 문을 열고 안의 물건을 꺼내는 데 고작 십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새 사라져 버린 거였다.
어떻게 사라진 거지?
아니. 더 중요한 건 왜 사라진 걸까?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손에 든 단말기를 다시 보니 문득 깨달았다. 진실이 정말 이렇게 단순했다면, 이전에 이곳을 조사했던 이들이 이것을 놓쳤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함정이다!
쾅!
뒤에 반쯤 열린 방문이 갑자기 저절로 닫혔다.
따따따따따~
또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번엔 손에 든 단말기에서 나는 게 아니라, 철제 옷장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방금은 무언가에 걸려서 움직이지도 않던 그 옷장 문이 지금은 "끼이익" 소리와 함께 바깥쪽으로 열리고 있었다.
팔 모양의 그림자가 그 안에서 천천히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주운 단말기의 꺼진 스크린이 갑자기 켜지더니, 기이한 패턴을 띄운 뒤 오류 화면이 나타났다. 이어서 손상된 코드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WARNING: Memory overflow at테디%06B3.009
!FAULT@#009 - *Undefined_sequence베- 93%&
어: CRASH REPORT >> $Panic_overflow - log#58.331
옷장 문은 계속해서 열려 있었고, 단말기에선 깨진 코드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앞에 있는 옷장을 보았다가, 손에 든 단말기를 보았다가, 시선이 두 곳 사이를 바삐 오갔다.
그러다 공중에서 멈췄다.
앞에 있는 옷장과 손에 든 단말기에만 신경 쓰느라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다. 뭔가가 지휘관의 바로 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테디베어...
목덜미에서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여기 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재빨리 뒤로 물러서서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뒤,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분홍 머리의 구조체는 배를 잡고 웃음을 참지 못해 거의 쪼그려 앉을 지경이었다.
뭐야 저거... 하하... 조금만 더 하면... 날아갈 뻔했어. 하하하...
동시에 옷장 문이 부드럽게 열리면서, 익숙한 기계체가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성공입니다! 대성공입니다! 하이 파이브 하시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인간을 뒤로하고,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웃어대는 구조체와 신난 기계체가 가볍게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음악이나 그림처럼, 도시 전설도 특별한 예술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 전설의 예술가가 됩니다! 이 폐기된 아파트는 제 작품입니다!
오호! 위대한 예술가! 자유로운 도시 전설 창작가라고 불러주세요!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버린 키스크에게서 더 이상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방금까지 한참 웃다가 겨우 진정한 테디베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음을 멈췄다고는 하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니 금방이라도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공짜로는 안 되지.
손가락으로 키스크를 가리키고, 다시 발밑의 건물을 가리켰다.
응. 저 각성 기계체들이 또 무슨 영향을 받은 건지, 화가, 수집가, 밴드맨을 하더니 이제는 도시 전설의 예술가라도 되고 싶은가 봐.
뭐 도시 전설의 예술가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사람 놀라게 하는 거지.
예를 들어 이 폐기된 아파트도 먼저 건물을 개조해서 숨겨진 통로랑 비밀문을 만들지. 이 방의 숨겨진 통로는 옷장 안에 있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 난 계속 네 뒤에 숨어 있었어. 구조체한테는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숨겨진 통로랑 비밀문을 다 만든 다음에는 인터넷에 숨바꼭질 같은 공포 이야기를 퍼뜨리는 거지.
누가 조사하러 오면, 방에서 소리를 내고, 사람이 다가오면 곧바로 비밀문으로 숨겨진 통로에 숨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꾸미는 거지.
다른 곳의 이상한 소문들도 다 비슷한 수법이군.
아, 진짜 걔네가 부러워. 하루 종일 한가하게 지냈으면 소원이 없겠네.
체리 맛 전해액 한 잔 값으로 조수를 한 명 고용했어. 이 모든 건, 그가 찾아내서 나에게 알려준 거야.
진짜 가성비 대박이었어. 이걸 낭비하는 사람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네.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궁금증이 더 커졌다.
공중정원의 조사는 다 폐기된 아파트 자체만 조사했잖아. 키스크 일행이 그 부분을 완벽하게 준비 해놔서 아무 허점도 찾지 못한 거야.
내 조사 방식은 달라. 네트워크 쪽으로 접근해서 폐기된 아파트 관련 정보가 처음에 어디서 유출됐는지 역추적해 봤거든.
처음엔 그냥 미끼를 던졌는데. 그 방면으로는 너무 허술해서 키스크의 계정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어. 그래서 물어보니까 다 실토하더라고.
전혀 쉽지 않았다고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님.
도시 전설 예술가를 외치고 있던 키스크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저희는 예술가고, 폐기된 아파트는 저희의 예술 작품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든 네트워크든 절대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네트워크상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역추적 방지 프로그램을 설치해 두었는데, 이 구조체 아가씨가 그걸 모두 무력화시켰습니다. 아마 열심히 하셨겠죠.
역추적 방지 프로그램을 설치해 놓았었다고?
미안. 너무 쉬워서 금방 풀어 버렸어. 그래서 눈치도 못 챘네.
그, 그래도 네트워크 상 준비가 부족했다 쳐도, 현실에서의 대비는 완벽했습니다!
키스크를 찾아낸 당신도 결국 하루나 걸렸잖아요!
네. 그래서 진실을 다 말씀드린 거예요. 바이러스를 심을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그 집념에 감동하여서요.
방금 테디베어의 무심한 말투를 들었을 땐, 공중 정원에서부터 키스크를 이미 특정하고, 착륙하자마자 바로 찾아내서 진상을 파악한 줄 알았다. 그래서 전체 과정이 빠르고 쉬웠던 것처럼 들렸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키스크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도 하루 종일 찾아다녀야 했다. 어렵게 얻은 그 짧은 휴가 중 하루를 조사하는 데 써 버린 것이다.
쿨럭.
테디베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이 좀 많은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짓자, 키스크는 다시 한번 도시 전설 예술가를 외치며 그 자리를 떠났다.
키스크 일행은 악의 없었어. 그냥 휴가를 재미있게 보내고 싶었던 건데, 운·이·없·는 누군가한테 일거리가 더 생겼을 뿐이지.
그리고 관련 상황은 이미 보고했어. 저녁쯤 공중 정원 쪽에서 당직자들한테 메일을 보냈어. 이제 저들도 자유지.
특례 제외야. 너한텐 보내지 말라고 부탁했어. 그러지 않았으면 다 들통났을 거 아니야?
☆~
테디베어가 윙크를 하며 입모양으로 "천만이야"라고 말했다.
테디베어는 신나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파도 소리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기 바다랑 꽤 가깝네. 그리고 너도 당직 아니고…
테디베어가 몸을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같이 바람 좀 쐬러 갈래?
모래사장을 거닐자, 나란히 발자국이 생겼다.
음~
바닷바람을 맞으며 테디베어가 기분 좋게 기지개를 폈다.
저 멀리 반쪽 하늘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더니,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화려한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불꽃놀이…
콘서트의 피날레인가? 꽤 성대하네.
테디베어가 고개를 들어 지휘관을 바라보자, 그 불꽃들이 그녀의 눈동자에 오색찬란하게 반사됐다.
응?
테디베어가 몸을 옆으로 돌려 지휘관을 바라보더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콘서트뿐만 아니라 해변 별장이라든가, 선셋 록, 해저 산책로... 내가 짜놓은 공략에 있는 건 다 기대했거든.
결국 하나도 못 가보고, 하루 종일 컨스텔레이션을 뛰어다니면서 그 폐기된 아파트의 소문 조사만 했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가 한번 따끔하게 혼내줘야겠어. 안 그러면 오늘 밤 제대로 쉬지 못할 거야.
말 안 해도 돼. 사실 그게 제일 재미없었거든.
휴가를 망쳤는지 아닌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
콘서트도 못 가고, 관광지 하나 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휴가 시간에 일까지 했지만...
그래도 난 오늘 하루가 재미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근데 너를 놀라게 하지 못했거나 네가 심드렁하게 반응했었다면, 조금 서운했을 것 같아.
아직도 말대꾸하는 거야?
네가 이번에 나한테 얼마나 빚졌는지 알아? 자, 계산해 볼까?
첫째, 너는 조수의 업무 범위 밖 자료를 사용했으니, 추가 비용이 필요하지. 아, 이건 인상된 요금이 적용돼.
둘째, 아이스 음료수 한 캔 빚졌어.
셋째, 설명을 요청할 때 분명히 말해주잖아. 공짜가 아니라고.
어쨌든, 이 세 개 합산할 거야.
테디베어는 어떤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지휘관, 이렇게 많이 빚졌으니 내가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지?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오늘처럼 하면 안 돼.
나한테 폐 끼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안심해. 내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라면 단호하게 거절할 테니까.
어쨌든, 난 거절할 권리가 있고, 너는 나한테 의지할 의무가 있는 거야.
괜찮지? 이건 너한테만 주는 특별 대우니까, 다른 이는 원해도 받지 못하군.
분홍 머리 구조체가 고개를 살짝 가까이 기울이더니, 발끝을 살짝 들고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한테 더 많이 의지해 줘.
그러고는 지휘관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너보다 더 똑똑하니까, 당연하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파도를 밟으며 바다를 향해 두어 걸음 걸어간 분홍 머리 구조체가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달빛과 조명이 어우러져 그녀의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비추었다.
약속했지? 어기면 절대 안 돼!
얄미운가? 아마도.
사랑스러운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