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저는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어요.
저 자신에게 있어 전 갈망하는 한 덩어리의 불안, 하나의 미스터리이자,
마법과 공포로 가득한 섬이에요.
모든 이가 그럴 거예요.
또 다른 별하늘 아래 살았던 당신처럼."
-보르헤스 <헝가리 최초의 시인에게>
밤이 여름 바람 속에서 조용히 잠들었고, 바다의 파도는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그녀는 죽은 항성으로 가득 찬 바다, 과거의 화석이 된 바다, 번개와 폭풍을 부르는 바다 등의 수많은 바다를 봤다.
그렇게 수많은 바다 앞에 그녀의 발자취가 남아있었다.
지금 그녀 앞에 펼쳐진 바다도 일반적인 바다가 됐지만, 지금 같은 밤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낮의 번화함과 소란은 사라졌고, 사방의 따뜻한 적막이 바다와 달 없는 별하늘
그리고 홀로 이곳에 남겨진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파도가 채 지우지 못한 낮의 고독한 발걸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뒤로는 흰색의 돌담이 늘어서 있었다.
바닷바람과 모래 먼지의 침식으로 피아노의 짙은 검은색 칠이 조금 벗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건반 위의 모래를 살살 털어냈다. 로봇 손끝이 어떤 온기 또는 어떤 기억을 그리워하고 있는 듯했다.
바람이 도시에서 바다를 향해 불었다. 그녀의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자, 푸른색 머리끝이 보였다.
건반 위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움은 어떤 인력이 된 듯, 그녀의 눈동자 속 별빛을 끌어당겼고, 그녀의 손을 이끌어 덮개를 열게 했다.
당신인가요?
흑백 건반이 오르내리며 흘러나오는 멜로디 속에서 인력은 낮과 밤을 엮으며, 닿을 수 없는 손끝에서 흘러나와 별들 사이를 향해 날아갔다.
알려줘. 세레나.
24시간 전.
짙은 색 후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컨스텔레이션의 해변에 선 세레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난 지 벌써 몇 달이나 지났다.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발길이 왜 자신을 컨스텔레이션으로 이끌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운명의 속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깊은 곳에서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안녕. 컨스텔레이션.
높은 풍차 사이를 수놓는 별빛을 바라본 세레나는 중얼거리며, 후드와 망토를 벗었다.
이 디자인 스타일은 좀 익숙해 보이네. 하지만 완전히 그녀 솜씨는 아닌 거 같아.
허름한 망토 아래엔 간결하면서도 새로운 트렌드의 여름 코팅이 있었다.
세레나는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생체공학 피부가 있어야 할 곳을 통과했다.
긴 여정 중 만난 나나미라는 신비한 소녀가 이 디자인과 지금의 세레나 기체가 어울리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세레나는 나나미 옆에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있던 로봇의 도움을 받아 일시적으로 이 코팅을 입을 수 있게 됐다.
세레나가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가짜 생체공학 피부 아래 로봇 손끝에는 진홍빛이 조금 맴돌고 있었다.
퍼니싱.
이것도 나나미가 말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나나미는 세레나 몸의 이상함에 개의치 않았다.
이 페인트와 생체공학 투영은 불안정해서 언제든 열화되어 사라질 수 있어.
어떻게 보면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마법 같아.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모든 마법을 버렸다. 그래서 쥐가 변한 마부나 호박 마차도 당연히 곁에 없었다.
세레나는 아직 찾지 못한 자신의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더 많은 걸 잃는다 해도 세레나의 흐릿한 안개 같은 생각 속에 가벼운 슬픔만 남길 뿐이었다.
가끔 악몽 같은 안개가 걷힐 때면,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때론 앞에, 때론 뒤에 있었다.
때론 이끌어줬고 때론 따라왔다.
야심한 밤의 해안에는 어두운 가로등 불빛만 있었다. 낮에 열었던 시설들은 밤의 품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세레나 눈앞에 있는 건 흰색의 돌담이었다. 암담한 별빛이 돌담에 비쳤다가 검은색 피아노로 반사됐다. 그러자 해변에서는 보기 드물게 눈에 띄는 물건으로 변했다.
여러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들의 그림자가 이곳에서 장난스럽게 노닐고 있었다.
그 그림자 위를 걷고 있는 세레나는 신발에 모래알이 들어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래는 세레나의 신체를 마모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세레나의 영혼을 마모시키는 건 따로 있었다.
세레나의 손이 뚜껑 열린 피아노를 가볍게 건드리며 음표를 연주했다.
안녕하십니까?
부드러운 로봇 음성이 흰색 돌담 너머에서 들려왔다.
로봇은 작은 화분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화분 안에 삽도 꽂혀 있는 것이 이곳 원예사인 것 같았다.
죄송해요. 방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이 피아노는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도록 이곳에 놓아둔 것입니다.
눈앞의 로봇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머리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렸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오신 겁니까?
전...
여길 지나가던 중, 그냥 잠시 머물고 싶었어요.
음... 괜찮습니다.
전에도 한 손님이 이곳에서 곡을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어떤 곡이었나요?
죄송합니다. 저에겐 연주를 인식하는 기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손님의 연주가 매우 훌륭해서 일부를 녹음해 뒀습니다.
세레나 앞 로봇에 달린 표시등이 깜빡이자, 음표 몇 개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산골짜기, 숲, 암석, 황야.
신성한 은둔자들이 산에 흩어지고,
바위틈에 살며...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숨을 쉰 세레나가 이곳에서 피아노로 교향곡을 연주했던 그 사람을 상상했다.
이 곡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고, 나머지 가사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이런 멜로디가 세레나의 머릿속을 맴돌며, 안갯속 <그림자>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세레나는 바람에 침식된 낡은 피아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멜로디와 닿기 힘든 <그림자>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망설였다.
음... 피아노를 연주해 보고 싶으십니까? 왜 연주해 보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지금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제 기억 속에서 잘못된 것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요.
혹은...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오류일지도 모르죠.
네. 아무튼 편한 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저은 원예사가 다시 말했다.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전 제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정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싶으실 경우, 얼마든지 둘러보셔도 됩니다.
정원이요?
네. 이곳은 세르반테스 님이 디자인한 정원이고 전 평범한 건축가입니다.
세레나 앞 피아노가 있는 곳이 이 정원의 입구인 듯했다. 낮은 벽부터 높은 벽까지 복잡하게 쌓인 흰색 돌담 사이로 수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이에요.
아침, 정오, 밤에 상관없이 정원은 정원입니다. 언제든 감상할 수 있습니다.
참. 이 정원은 매우 복잡합니다. 하지만 갈림길에서 항상 왼쪽으로 가신다면 길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세레나에게 과장된 인사를 한 로봇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담 사이로 사라졌다.
그 후 어느 순간, 세레나의 머릿속을 맴돌던 <그림자>가 그녀 앞에 생생하게 나타난 것 같았다.
그리고 인력에 이끌리듯 세레나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지휘관님. 그거 아세요?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기 어려운 건 그 장면들이 오직 우리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잊게 되는 법이죠.
쓰든 말하든 언어는 매우 중요해요.
그래서 전 지금처럼 이 모든 걸 적어내려고 해요.
지휘관님께서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이 기억들이 언어의 형태로 남을 거예요.
글자는... 참으로 이상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쓰고 읽는 순간 기억으로 되니까요.
그래서 글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수많은 길로 이어질 수 있죠.
저와 이 기억은 지휘관님께서 이 글을 읽는 순간 그 시공간에 머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과연 저일까요? 과거의 저일 수도 있고, 미래의 저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지휘관님. 제가 미노타우로스의 미로 속에 빠진 것 같아요.
전 제 생각을 모두 기록해 이야기와 시로 썼어요.
지휘관님. 언젠가 제가 글자로 이루어진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그 가느다란 실은 지휘관님의 손에 있을 거예요.
전 미로의 끝에서 지휘관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갈림길마다 왼쪽 모랫길에 얕은 발자국이 있었다.
왼쪽. 왼쪽. 왼쪽.
이건 로봇 원예사의 발자국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발자국에 가까웠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돌담은 조금씩 높아졌고 별빛은 조금씩 암담해졌다. 그럼에도 땅바닥의 발자국은 선명하게 보였다.
세레나는 누군가가 지나갔던 아마, 자주개자리, 제비꽃, 튤립과 라벤더를 지나갔다.
이 정원은 모래사장 위에 지어졌지만, 꽃들은 모두 흙에서 자랐다.
마지막 갈림길의 끝에 다다르자, 세레나 앞에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여기가 이 정원의 끝인 것 같네.
이 공터 가운데 작은 꽃밭이 있었다.
이 꽃밭도 흰색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위에 있는 더 높은 돌담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중앙에 있는 바람에 유난히 이목을 끌었다.
안갯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던 <그림자>가 이 꽃밭 옆, 발자국 끝에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순 없었다.
잠깐만요.
꽃밭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토양 외에 아무런 색깔도 없었다.
잘게 부서진 짙은 갈색 모래가 그녀의 가짜 손바닥을 통과해, 반짝이는 손끝의 진홍빛을 지난 다음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잡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꽃이 없는 정원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것이 깨어있는 꿈속이라면,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일까?
끝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알고 싶어요. 제발 알려주세요.
저... 지금 여기에 있어요.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꽃과 돌담만이 세레나와 별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밤이 끝나가고 해가 곧 뜰 것이다.
여명이 다가오면, 아침 안개도 뒤를 바짝 따를 것이다.
"넌 이 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이뤄지기 위해선, 이 꿈을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