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광경은 온통 캄캄했다.
가끔은 또 하얗게 변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롤랑의 시야에서 우열을 가리는 듯 서로 밀치고 있었다. 마치 이 두 색깔에 의식이 있어서 영광스러운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이며 영역을 쟁탈하는 것 같았다.
그가 눈을 뜨자 검은색과 하얀색이 상대방을 향해 부딪쳤다. 양쪽이 함께 물러가고 난 뒤 옅은 재가 남았다. 재 속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그리고 그림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그 단지에서 몇 번째로 구해낸 사람이지? 난민을 실험 대상으로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너무 제멋대로인 것 같아.
까다롭게 굴지 마. 적합한 놈 하나 찾았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서둘러 수술 준비나 해.
…… 그래.
정말 불쌍한 아이야. 반평생을 가상세계에서 살았다니.
그게 뭐 어때서,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거지. 로봇의 뻔한 반응 보다 더 사실적인 볼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이런 아이들이 많아지니,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가족들로부터 아이들을 사서 폐쇄된 공원으로 보내기 시작했지. 그리고 아이들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어.
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중에 대스타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 그럼 그들은 만약 실패하면 풀이 죽은 채로 자기를 팔아버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물론이지. 그런 상황보단 아마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몰라.
이제 적어도 그들은 살아서 '구조체'라는 것이 될 수 있잖아. 그들이 좋든 싫든 간에 그들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지.
지금 밖은 바이러스가 퍼져 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이 다 괜찮고 전선에서 많은 병사들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해.
이런 일 또한 그에게 있어서 희망이라고 할 수 있지.
됐어.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수술을 시작하자.
회색 그림자 중 하나가 갑자기 확대되어 눈앞에 다가왔다. 롤랑은 자신의 가슴이 세게 한 대 얻어맞았다는 것을 느꼈고, 이어서 또 한 번 느꼈다.
한번, 두 번, 세 번.
…… 아파.
롤랑은 답답한 듯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때리는 그림자를 밀어냈다.
그는 딱딱한 철판을 만져 보았다. 철판에는 금이 가 있었고 안에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전선 틈 사이로 붉은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것은 로봇이었다.
삐——삐삐——
붉은 눈의 로봇은 여러 번 소리를 내더니 롤랑에게 밀쳐져 뒤로 넘어졌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잡음 속에서 롤랑은 무언가가 땅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어…… 여긴? H7M 구역? 여기 이런 세트는 없을 텐데……
내 시나리오는 어디까지 갔지? 다음 장면은 어떻게 해야 하지? 지시 신청……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손을 들어 텅 빈 귀를 만졌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 아니야. 단지는 이미 파괴됐어…… 이미 파괴됐다고.
그렇다. 몇 년 동안 그를 키웠고 몇 년 동안 그를 속인 배우 육성 시설은 거기 있는 로봇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쨌든 여기에는 적이 있어 위험하니까 먼저 떠나야 해……
떠나… 어디로 떠나야 하지?
삐——삐삐——
……윽!
방금 쓰러진 로봇이 마치 무언가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다시 롤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롤랑이 반응하기 전 그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 핵심 부위를 향해 힘껏 부딪쳤고 다른 쪽 팔은 기체의 열린 구멍을 파고들어 세게 잡아당기니 한 줌의 선로가 전깃불을 크게 번쩍이며 뜯겨 나왔다.
익숙하고 빠르다. 마치 이 피비린내 나는 육탄전을 자주 겼어 봤던 것처럼.
좋아! 제법인데 롤랑! 역시 동족끼리의 살육은 네 특기였어.
선로를 손에 쥐고 멍하니 있을 때 롤랑은 박수 소리와 익숙한 동요를 들었다.
…… 아니야. 난……
강제로 움직이던 팔에 갑자기 통증이 전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보니 금속 부품이 노출된 왼팔에 이미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액체가 흘러내렸다.
빨간색이 아니라 연한 파란색이다. 그는 이것이 순환액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봐봐. 네가 원하는 것처럼 너는 연기만 하는 로봇이 됐어. 앞으로는 자신을 몇 번이나 찌르면서까지 확인할 필요가 없어.
난…… 아니야. 이게, 왜……
하, 롤랑, 너 너무 오래 뛰어서 머리를 어디다 두고 온 거야?
내가 너의 추억을 회상하도록 도와줄게. 네가 잊은 좋은 일들.
소년 롤랑은 그 큰 단지에서 사육된 배우였어. 하지만 단지는 어떤 바이러스에 의해 파괴되어 미래를 잃었지.
하지만! 그는 신비로운 세력에 의해 구조되었고 대단한 수술을 받을 자격을 갖게 됐지 비록 과정이 험난하고 잔인무도했지만 그는 무사히 '구조체'라는 전사로 개조됐어.
그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어.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았고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퍼니싱에 맞서 밤낮으로 싸웠어! 음, 어차피 나라에서 주는 세금을 받으면서 연중무휴로 밤을 새우는 일은 그가 항상 하던 일이었지.
그는 이 직업으로 인해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생존 의지를 찾게 됐어! 기사가 새로운 왕을 찾은 것처럼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이전처럼 곳곳에 출정할 수 있었어!
그는 진정한 세계를 접하면서 자신의 단지에서 읽은 기사 전설이 전부 남들이 지어낸 삼류의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그래서 그는 진정한 기사가 되려고 8가지의 미덕 수칙을 세워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했어!
오오! 얼마나 멋진 결말이야! 아름다워! …… 넌 항상 이런 미래를 위해 자신을 속여왔어, 안 그래?
인간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속이는 데 가장 능숙하지. 물론 자기 자신도 포함이고.
윽……!
기록된 장면은 의식의 바다에서 스쳐 지나갔고 몸의 각 장치가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회복된 것은 통각 시뮬레이션이었다. 두개골이 뚫리는 듯한 아픔이 그의 머리에서부터 그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그는 몇 걸음 물러서서 고철 덩어리에 기대었다.
아…… 아파, 아파……!
곧이어 촬영 장치도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시선은 캄캄한 폐허에서 멀지 않은 대형 로봇군단으로 향했다. 부서진 껍데기 밑으로 새빨간 빛이 새어 나왔고, 주먹은 눈앞의 커다란 철 무더기를 내리쳤다. 날리는 기계 파편이 롤랑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롤랑은 그 주먹의 아래쪽에서 어렴풋이 몇 마디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아, 맞다. 여기는 폐기물 처리장이지.
구조체가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우며 지구를 구하는 영웅을 연기했다. 모든 것에 밝은 미래가 있는 것 처럼.
그리고 재앙 강림했다. 퍼니싱에 감염된 대형 로봇들이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건물 전체를 파괴했으며 평온한 일상을 망가뜨렸다.
그렇게, 그게 다였다. 이것들은 그에게 더 이상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과학자들은 모두 로봇 더미 속의 진흙이 되었다. 용감한 전사들은 침식체의 힘에 무릎 꿁고망령이 되었거나, 반대로 조력자가 되었다.
나는…… 하, 부대를 따라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데 더 많은 침식체의 추격을 불러오기만 했네.
하지만…… 괜찮아. 방금 죽은 척한 게 날 살린 것 같아. 전사는 못 됐어도 적어도 난 훌륭한 배우야. 난 도망갈 수 있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살아남을 거야.
살아 있는 한, 나는, 나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지?
나는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롤랑은 찢어진 자신의 팔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는 붉은빛을 바라보며 웃었다.
…… 하하, 누굴 속이려고. 침식체.
방금까지만 해도 똑바로 선 몸이 갑자기 쓰러졌다.
어쩌면 의식의 바다가 일부 연산을 회복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소리 감지 장치가 적당한 위치에 붙여진 거일 수도 있었다. 롤랑이 땅바닥에 눕자 비로소 희미하게 들렸던 울부짖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쓰레기장이라고는 하지만 도망친 구조체가 이렇게 많이 모여있으니 북적거리는 수준이었다. 고함소리, 충돌음, 폭발음은 롤랑이 극단에서 봤던 송년회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했다.
단지 해를 넘긴 그 순간의 1초가 너무 길었고, 이 소리들 또한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었다.
아…… 아…… 아……!! 너무 아파!!
아, 맞아, 맞아. 이 대사 내가 몇 달 전에도 말했었지.
시끄러워! 시끄러워!! 누가 빨리 와서 내 소리 감지 장치 좀 부숴줘! 시끄러워 죽겠어!!
아하, 괜찮은 방법이네. 나도 구조체가 됐을 때 이거 때문에 좀 시달렸지. 그래서 나도 저렇게 소리 질렀던 것 같아.
싫어! 왜! 난 살아남기 위해 친구까지 죽였는데 왜 또……
음, 이 대사는 말한 적이 없어. 왜냐면 난 친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리를 질러보는 건 나도 시도해 볼 수 있어.
오, 이렇게 들어보니 여기 리듬이 꽤 괜찮네. 리믹스하면 적어도 1주일간은 음원차트 1위를 할 수 있겠어. 앨범 제목은《롤랑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누워있는 비밀 기록》으로 대충 짓고 말이야.
내가 가서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구조원이 이미 왔으니 곧 구조될 거라고 그들을 달래는 건 잘하는데. 근데 【삐——】 나도 온몸이 아파서 꼼짝 못 하겠어. 내가 이 모양인데 내가 누굴 속이겠어. 누굴 속이겠어……
사방의 울부짖는 소리에 따라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하면 몸 이곳저곳에서 전해져오는 아픔이 그 비명의 파도와 부딪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리듬을 타다보니 심하게 느껴졌던 통증이 정말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혹은 그가 통증을 느끼는 기능을 퍼니싱이라는 바이러스가 찢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에 완전히 침식된 몸. 눈앞의 경치가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소원과 가치를 실현하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흰색 빛에서 분리된 것은 거대한 로봇이었다. 그것에서 흔들리는 목소리 톤으로 재생되는 녹음 음성은 조금씩 깨져있었다. 온몸에 금이 갔지만 기체에 새겨진 커다란 미소로 미뤄 봤을 때 홍보용 로봇인 것 같았다.
이 웃는 얼굴은 롤랑의 모든 시야를 차지했고 주먹을 높이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지만 롤랑은 움직일 기력이 전혀 없었다.
괴물 짓밟기인가…… 엔딩치고는 정말 상투적인데…… 하하하하하……
하…… 제발, 한방에 죽이자.
롤랑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약점을 앞에 있는 로봇에게 드러내고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려는 듯 팔다리를 벌렸다. 그는 상상했다. 만약 주변 관객들이 이런 자세를 본다면 사형수들도 나처럼 여유롭지 못한다고 감탄할 것이라고.
당신의 소원을 이뤄드리고 당신의 가치를 실현해 드리리겠습니다. 우리 회사에 가입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본사는 진심으로 초청합니다……
소원…… 이라……
녹음 내용만 들으면 앞에 선 홍보 로봇이 정말 롤랑에게 미소를 지으며 미스터리한 회사에 초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침식된 후 붉은빛을 뿜어내는 눈동자는 롤랑에게 잔인한 집행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후의 장면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허, 허, 소원.
누군가 당신에게 '소원을 말해봐'라고 말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까?
힘? 돈? 권력?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침묵할 거야. 소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수만 개의 소원을 나열해 그중에서 가장 간절한 걸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지.
누군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질문에 인간들은 우습게도 많은 소원들 중 우선 순위를 정하겠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소원 요정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야.
인간은 그렇게 탐욕스러운 생물이며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무의식적으로 보낸다.
나 말이야……? 난 답하지 않겠어. 내가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할 문제니까.
'내'게는 소원이 없거든.
나는 소원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믿었어. 소원을 추구하는 여정 속에서만 사람은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의미가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배우로서 열심히 거짓말을 했고, 가족과 함께 하는 평화로운 미래를 추구했지.
그 목표를 위해 선한 영혼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속였어.
결국 마지막에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목격했을 뿐이야. 나는 이 황금 같은 시대가 그 거짓말처럼 쉽게 퍼니싱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봤어.
그리고 나는 구조체로 개조됐어. 내 뜻과 다르게 나도 영웅처럼 세상을 구하고 있었지.
어느 순간 구조체로 살아가고 세계 평화를 나의 새로운 목표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보다시피 퍼니싱은 나의 새로운 희망을 망쳐버렸어. 구조체, 첨단 기술은 바이러스 앞에선 그 어떤 거짓말보다도 더 거짓 같았지.
마치 나의 인생처럼.
그래서 지금은 '살아보겠다'는 가장 작고 끈질긴 소원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아.
…… 나는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했어. 어쩌면 나는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이 쓰레기 처리장에서 썩어갈 수도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눈을 감으니 시야 안이 텅 비었다. 백지장 뒤에서 커다란 주먹이 떨어지려고 했다.
바이러스의 영향인지 혼란한 기억 중추에 순간 만다스티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기꾼', 누군가가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움켜쥔 주먹에서 한 줄기 흔들림이 느껴지자 롤랑은 눈을 번쩍 떴다. 팔을 치켜들고 손목에 힘이 실어 앞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상대의 거대한 주먹은 그의 눈앞까지 다가왔고 0.5초면 그를 부숴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주먹에 맞서 말도 안 되는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팔을 들어 세게 찔렀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주먹은 그의 눈앞에 굳어졌고, 오직 관성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윽……
롤랑은 천천히 움직이는 주먹을 피하며 손목에 힘을 주어 거대한 침식체의 몸에서 철근을 빼냈다. 끊어진 전선에는 거대한 코어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침식체의 코어였다. 로봇의 몸집은 컸지만 코어가 껍데기 틈 사이로 노출되어 있었고, 기회를 노려 철근을 코어에 꽂아 살짝 비틀어 쉽게 로봇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롤랑은 바닥에 누운 채로 로봇이 자신에게 접근해 높이를 낮추고 코어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고는 손목만 살짝 움직여 이 거대한 침식체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 하…… 왜, 왜 내가 그래야지……
아니야, 됐다. 중요한 건 그다음에…… 그래, 그 다음에 또 주변에 뭐가 있는지 봐야 돼……
손에 꼭 쥔 것을 버리고 난장판이 몸을 겨우 일으켜 사방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비명소리는 계속 나는 듯했지만, 또 무언가에 의해 음소거가 된 듯했다.
……?
쌓여있는 폐기체 더미에서 롤랑은 날아가는 순백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 하얀 광경을 바라보기만 해도 주변의 비명소리가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두 묶음으로 묶여진 순백의 머리카락이었다. 순백의 머리카락의 주인공이 롤랑의 눈에 비쳤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인공 햇살처럼 눈부시게 밝았지만, 롤랑은 이 어두운 심연에서 그를 향한 시선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