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의식의 바다도 안정적으로 회복됐는데. 이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
의식을 되찾은 로이드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정체를 판단하기도 전에 극심한 고통이 그의 의식의 바다를 잠식했고 그 충격에 로이드는 두 눈을 번쩍 치켜떴다.
하하… 하…
거친 숨을 몰아쉬던 로이드는 극심한 고통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의 팔은 예리한 무언가에 베어 큰 상처가 나있었다.
조용히 해… 아프다는 건 아직 네가 죽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니까.
병상에 누워있던 로이드는 그제야 베라가 잔뜩 짜증 난 얼굴로 기기를 테스트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베라 씨… 어떻게 여기에…
난 그냥 니콜라의 명령에 따라 네 생사를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꼴을 보니 한동안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네.
하지만 너와 함께 있던 그 녀석들은 너처럼 운이 좋지는 않았지.
로이드는 그제야 니콜라 직속 구조체 병사들과 임무를 수행하다 날개가 달린 강력한 침식체와 마주친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병사들이 로이드를 철수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남아 미끼가 되는 걸 자처했던 것도 말이다.
그… 그들은 어떻게 된 거죠?
베라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다른 쪽을 바라보더니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에 답은 이미 명확했다.
어째서 저 같은 사람… 때문에…
너 같은 사람? 하…
베라는 차갑게 웃더니 로이드의 멱살을 잡아 그의 상체를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로이드와 시선을 맞췄다.
네가 영웅 놀이를 하든 말든 나한테 널 비난할 자격은 없어. 하지만…
베라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게 매섭게 빛났다. 그녀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은 로이드도 처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널 지키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어. 적어도 그 사람들에겐 네가 살아있는 게 생과 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는 뜻이야. 그 각오를 모욕할 셈이야?
네 스스로의 사명에 대해 똑똑히 알아둬. "불사신 로이"와 의식 회수는 병사들의 영원불멸한 희망이 되어야 해.
베라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지만 그 말투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너 말이야, 정말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능력도 각오도 없었다. 베라는 로이드를 그저 어처구니없는 책임감에 속아 착각 중인 착해빠진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진짜 전쟁의 잔혹함을 느끼거나, 다쳐서 직접 아픔을 느낀다면 그 순진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전…
로이드는 수첩을 꺼냈다. 전에 로이드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 수첩이었다. 그 수첩에는 과거의 "로이드"들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어쩌면 베라 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전 영웅이 되려는 각오도 없고 영웅이 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전 그저 이 수첩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로이드"라는 역할을 연기할 뿐이에요.
베라 씨… 한때 전 제가 훌륭하게 연기를 해낸다면 언젠가 진짜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로이드는 고개를 젓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이 말한 것처럼 영웅이 될 재목이 아닌 사람이 영원히 영웅이 될 수 없다면, 매일 늘어나는 거짓말들이 제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통뿐이라면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는 힘이나 진실을 말할 힘이 없는 한, 이 고통은 영원히 너와 함께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이 고통조차 견디지 못한다면…
베라는 일어서서 로이드를 향해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럼 죽어. 나약한 겁쟁이처럼 책임 따위는 전부 버리고 죽으라고. 모든 건 다음 "로이드"가 감당하면 될 테니까.
날카로운 칼날을 마주했지만 로이드의 얼굴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베라 씨… 다음 "로이드"는 저보다 더 훌륭한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지도. 하지만 어차피 그땐 넌 이미 죽었을 테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을테니까.
지금 네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지금의 너뿐이야.
로이드는 베라의 칼날을 향해 손을 뻗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바로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순환액이 상처에서 흘러내렸다. 순환액이 천천히 로이드의 수첩에 떨어져 텅 빈 수첩 페이지가 핏빛 순환액으로 물들었다.
정말 아프네요. 하지만…
칼날을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침식체에 의해 관통당한 상처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칼날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갈수록 고통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지금의 전… 여전히 "로이드"가 되고 싶어요. 진정한 영웅 말이죠.
제 스토리는 거짓으로 시작돼서 결국 거짓으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기로 했어요. "로이드"로서 싸우려고요.
로이드는 잡고 있던 베라의 칼날을 놓고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지 한참 느끼다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베라 씨… 다음 임무가 끝나면 따로 전투 훈련을 시켜주세요. 저도 베라처럼 위험에 부딪혔을 때 자신감을 보일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싶어요.
베라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태도를 칼집에 집어넣었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니콜라 사령관님께 부탁드릴 겁니다.
로이드의 진지한 표정을 본 베라의 미소가 점점 부드러워졌다.
하, 좋아. 그렇게 멍청한 건 아니군. 그래. 도전해 봐. 하지만…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나처럼 되고 싶다고? 난 "영웅"이라는 단어와 정반대에 있는 사람인데.
베라는 마지막으로 로이드를 힐끗 바라본 뒤 미소와 함께 단호하게 자리를 떴다.
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이드는 고개를 젓더니 수첩의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어쩌면 당신이야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