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 제발 누구라도… 절… 살려주세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어?
붉은색 장발…
당신은 "사신"인 건가? 우릴 죽이러 온 거고…
베라를 발견한 순간 구조체 병사는 자신의 운명을 눈치챈 듯 발버둥을 멈추었다. 퍼니싱은 빠르게 침식 한계치를 넘었고 그는 완전한 침식체가 되어버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죽어주겠니?
태도가 침식체의 가슴을 뚫었다.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순환액이 베라의 온몸을 적셨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최악이야…
하지만 "그" 사람이라면 적어도…
대장? 그럼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오늘 다른 일정이 없으니 바로 해산한다. 거기 둘, 남은 시간은 알아서 움직이도록.
응. "하지만 이상한 짓을 하려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명심해야지"
21호, 딴짓하지 마. 네가 물자 운반을 돕겠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깡통 로봇에게 실험 무장 장비를 설치해 주지 않았을 거야.
녹티스, 치사하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질 거야? 꼬마야, 넌 커서 저렇게 되면 안 된다.
하? 나처럼 멋진 남자가 되는 게 뭐가 어때서?
됐어. 너희 둘, 얼른 꺼져.
두 사람을 쫓아버린 베라는 주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집행 부대 소속 구조체 병사들로 보였는데 모두들 같은 곳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혐오하는 베라는 굳이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건 그녀의 곁을 지나는 구조체 소대가 다른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나서였다.
로이드야! "불사신 로이"가 돌아왔어!
베라는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전에 만났던 "영웅"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퍼니싱에 유린당한 지구의 곳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침식체들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상을 포기하고 공중 정원으로 도망치게 되었죠.
하지만 우리가 언제까지나 도망만 쳐야 할까요? 달로, 그리고 화성으로… 모든 걸 버리고 도망만 치는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를 자격이 있을까요?
과거 저희에겐 그 어떤 희망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베라는 천천히 인파의 구석으로 걸어갔다. 병사들은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로이드의 연설을 듣느라 그녀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구를 되찾을 희망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사령부, 지원 부대, 과학 이사회 그리고 집행 부대의 병사들 모두 인간들을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반격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전선은 계속 진격하고 있고, 보육 구역들도 하나씩 되찾고 있으며, 침식체들이 모여있는 곳도 점차 소멸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힘으로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 고향을 되찾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 회수 덕분에 더 이상 죽음과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살아남아 지구를 되찾는 그날을 함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병사들이 환호하더니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라는 이 모든 상황이 웃길 뿐이었다.
쳇... 참 웃기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지친 베라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이때 그 사이를 애써 비집고 들어온 구조체 병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병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로이드 앞으로 다가왔다. 급박함이 얼굴에 담겨있는 그는 그저 인파에 따라 몰려든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듯했다.
로이드! 정말 당신이 로이드인가요? 역시 의식 회수를 통해 공중 정원으로 돌아간 거였군요.
당황스러웠지만 로이드는 미소를 유지했다.
실례지만... 절 아십니까?
전 해크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 못 하신다고 해도 애나는 기억하시겠죠? 애나랑 같은 소대였는데…
얼마 전 전투에서 저희 소대는 침식체들에게 포위됐습니다. 저랑 다른 멤버들은 무사히 철수했지만, 당신은 애나를 엄호하겠다고 나섰고 두 사람은 우리와 떨어지게 되었죠.
로이드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어졌다. 애나라는 이름의 병사가 기억나긴 했지만 그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과거 "로이드"의 모든 작전 기록은 규정에 따라 반드시 사령부에 보고해야 했다. 따라서 로이드는 과거의 모든 기억 데이터와 전투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애나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과거의 "로이드"는 그가 가지고 있던 기억을 저장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당신 정말 의식 회수를 통해 공중 정원으로 돌아온 거죠? 그렇다면 애나도 분명 돌아갔을 텐데 만나지 못했나요?
그는 모두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존재였다. 설령 그게 허황된 희망일지라도 그는 "로이드"라는 이름의 영웅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는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음, 물론입니다… 그녀는…
애나? 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베라는 해크의 뒤를 따라 천천히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로이드의 말을 끊어버렸다.
베라? 어떻게 여기에…
베라… 당신이 바로 그 "사신"이지? 애나를 알아? 아니지... 어째서 당신이 애나를 알고 있냐고!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난 임무 목표는 항상 제대로 기억하지.
그리고 너희들처럼 도망칠 줄밖에 모르는 퇴물과는 달리 난 모든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지.
그게 무슨 말이야! 애나는 어디 있냐고!?
애나라는 구조체는 이미 의식의 바다 침식도가 한계점을 넘어선 상태였어. 이미 완벽한 침식체라 의식 회수도 불가능했다고… 그래서…
그래서 애나를 죽인 거야?!
침식체들을 죽이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니었나? 너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군인이 되는 건 포기 해. 언젠가 너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죽이게 될 테니까.
해크는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베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를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던 베라는 순식간에 해크가 몸을 지탱하고 있던 발을 공격했고, 중심을 잃은 해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베라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결국 해크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너… 이 냉혈한… 괴물 같으니!
해크의 원망 어린 시선에 베라는 차가운 칼날을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고는 마치 너 같은 건 내 상대가 될 수 없어라고 말하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말 잘 들어. 의식 회수가 너희들을 살려줄 거란 착각은 하지 마. 너희들 같은 퇴물들이야 뭐 언제 전장에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베라는 태도를 들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차례로 겨누었다.
침식체 손에 의해 새로운 침식체가 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어. 고통없이 깔끔하게 죽여줄 테니까.
베라의 말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구조체들은 분노를 느끼며 원망과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는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사신"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만! 베라 씨... 그만 하세요.
네가 바로 그 "영웅"이야? 참 대단하네~ 언젠가 내 손에 죽지 않길 바랄게.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베라를 향한 질책의 말들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리 꺼져.
그녀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번 훑어본 후,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태도를 칼집에 넣고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물론 그 누구도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베라 씨...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로이드는 멀어져 가는 베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붉은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녀의 말은 여전히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베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말에 숨은 진실을 아는 사람은 로이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