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외전 스토리 / 길고도 조용한 밤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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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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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점차 위급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여과탑 인근도 포화로 뒤덮였다.

연이은 폭발로 인해 반즈가 숨어있던 엄폐물이 격하게 흔들렸다. 무너지는 엄폐물에 묻히지 않기 위해, 반즈는 침식체의 화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엄폐물 뒤에서 튀어나와 반대편의 비교적 안전한 건물로 향했다.

전진하던 도중에 반즈는 바닥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구조체를 보았다. 그의 기체는 침식체의 공격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조금 전의 폭격은 그의 마지막 행동 능력을 빼앗았다. 그는 그저 돌 하나에 기대어 총으로 멀리 떨어진 침식체 무리를 향해 사격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는 동작에 금세 제동이 걸렸다. 손에 들고 있던 총기가 오랜 전투로 고철처럼 못 쓰게 되자 그는 아예 총기를 내던져 멀리 있는 침식체를 쓰러뜨렸다.

이 장면을 본 반즈는 급히 구조체 곁으로 달려가 들고 있던 점검 세트를 꺼냈다.

지금은 일단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내가 긴급 점검을 해볼게.

콜록...

반즈는 정비 세트에서 연결선을 꺼내 구조체에 연결을 했고, 그 구조체의 가동 효율이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반즈의 행동을 지켜보던 구조체는 반즈의 손을 덥석 잡더니 힘겹게 다른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과 음성 모듈을 가리켰다.

구조체 손가락의 방향을 따라 반즈는 그의 가슴과 음성 모듈에 끔찍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순환액이 그 구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와 땅으로 흘러내렸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구조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른 부위의 손상이 더...

구조체가 고개를 저었다.

……

구조체의 의도를 알아차린 반즈는 침묵했다. 그는 정비 세트에서 도구를 꺼내 신속히 구조체의 음성 모듈을 수리했다.

하지만 옆의 출력 지수는 반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계속 알려줬다.

조금씩... 시도해 봐...

콜록... 저...

됐어요... 고마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구조체는 손을 뻗어 반즈 허리에 있는 톰슨의 권총을 빼내 반즈의 손에 올려놓았다.

들어... 보세요...

구조체는 반즈의 팔을 손등으로 가볍게 받쳤다. 반즈는 상대의 말에 따라 권총을 움켜쥐고 천천히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은... 어깨와 평행... 맞아요... 그렇게 하면 돼요.

얼굴은... 정면을 보고 시선은 가늠쇠와... 괴물들을 주시하세요...

반즈는 상대의 말에 따라 한 단계씩 자세를 가다듬었고, 그 구조체의 지도 아래 권총을 멀리 떨어진 침식체에 겨누었다.

검지를... 방아쇠에 놓고... 콜록... 힘을...

구조체는 반즈의 손을 잡고 가늠쇠의 방향을 조금씩 수정했다.

난...

이렇게... 누르세요...

구조체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가미되어 마침내 반즈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소리와 함께 튀어나가 그 침식체의 전자 대뇌를 정확히 관통했다.

사격의 반동으로 반즈의 두 팔이 높이 들렸다. 구조체의 손은 더 이상 반즈를 잡지 못하고 힘없이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총알이 가까이서 격발되는 소리와 전쟁으로 교전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반즈는 그 구조체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이겨서... 살아가야 해...

정비 세트의 각종 지수는 점점 0으로 향했다. 반즈는 그 구조체가 총을 격발한 뒤 생기는 화학 연기처럼 영원히 그 전장에 흩어져 없어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난 한때 전쟁의 장면을 무수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진짜 전쟁에 비하면 소꿉장난처럼 유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장은 고기 분쇄기였다. 그곳에는 명예와 영광은 없었고 그저 차가운 학살과 죽음만 있었다.

총으로부터 전달된 반동으로 손목이 저려오고, 시야에는 침식체와 구조체가 끊임없이 뒤엉켜 짧은 교전 끝에 기계 잔해로 남았다.

총알들은 로봇 부품에 섞여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고 발 옆에 떨어진 로봇 팔이 침식체인지 구조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이 이글거렸다.

침식체의 포효는 총포와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뒤섞여 끊임없이 내 고막을 때렸다. 그러나 그 타격도 이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반즈, 반즈.

……

끝났어, 이번에 습격한 침식체는 전부 우리에게 소멸됐어.

이랬구나...

알고 보니 이랬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거짓으로 치장된 현실로 구조체들을 끊임없이 이런 전장으로 내보내 황폐한 지상에 영원히 묻어 버렸던 것이었다.

나는 의사이자, 도살자였다.

가자, 우선 널 데리고 좀 쉬어야 할 것 같네.

카무이는 반즈를 부축하여 비교적 멀쩡한 건물의 엄폐물로 향했다.

엄폐물에 들어선 뒤 반즈의 눈에 띈 것은 방금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구조체들이었다.

……

이 정도의 부상이면... 그냥 의식 회수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 돼!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그게 아니라...

왜 그를 말리는 거지?

그래, 그들에게는 그게 인식 속의 진실이겠지.

의식 회수를 사용한다면 그런 끔찍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의식 회수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도 뭐 어쩌겠어.

내가 이 참혹한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어. 이미 오래된 일이야.

두 눈을 감았다.

지터, 홀, 라피란, 제투스...

내 손을 거친 모든 부상자들의 슬픔, 분노, 두려움, 기쁨이 모두 생생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감정은 죽음으로 변했고, 끝없는 윤회의 늪이 되었다.

늪은 온몸을 얽매이게 하고 차가운 현실에 숨을 막히게 했다.

그는 위에서 파견돼서 온 거야. 그가 안 된다고 말한 거면 분명 그럴만한 뜻이 있을 거야.

두 눈을 뜨자 앞서 권총을 건네준 톰슨이 땅에 앉아 있는 구조체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아, 아니야.

자, 너도 우리를 도와 같이 모두의 기체를 점검할래?

그랬구나, 그럼 내가 귀찮게 했네.

음...

반즈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떠밀려 부상자 쪽으로 쪼그려 앉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카무이가 평소처럼 방긋 웃고 있었다.

……

내가 너의 부상 입은 부품 좀 볼게.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까 왜 나 대신 포위망을 뚫어주려 한 거야?

구조체의 점검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반즈는 톰슨과 함께 지상의 각종 점검 도구를 거두었다.

아이가 있나요?

응? 아, 아니, 난 아직...

하하하, 그냥 물어본 거예요. 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 정도의 나이였을 때 결혼했어요. 얘가 제 아이예요.

톰슨이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두드리자 백발의 어린아이 홀로그램이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다.

홀로그램의 어린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자신의 품에 고무공을 안고 있었고, 촬영하는 카메라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주변은 공중 정원의 시뮬레이션이 황금시대를 모방해 만든 공원이었다.

너는... 구조체아냐?

제가 구조체로 개조되기 전에 아내와 낳은 아이예요.

후에 전쟁이 위급해지자 군대에 개조 신청을 했어요.

얘기가 본론에서 멀어진 것 같네요. 아이가 왜 홀로그램에서 화가 나 보이는지 아세요?

음... 모르겠어.

제가 약속을 어겼거든요.

아무리 전쟁이 격렬해도 아이들의 정신 상태는 쇠약해지지 않지요.

그의 지도 센터에서 축구 경기를 열었고, 저는 아이에게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죠.

듣기에 즐거운 일 같은데.

하지만 그들이 경기를 할 때 저는 여전히 지상에 있었어요.

돌아간 뒤에 저는 제 설비와 침대 같은 걸 모두 포장해 집 밖으로 내놓은 걸 보았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저를 못 들어가게 했어요. 알다시피 생활 구역에서 제 집 문을 수류탄으로 터트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모처럼의 휴가에도 결국 군숙소로 돌아가야 했고, 돌아간 뒤에는 혼자 일주일 동안 숙소에서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어요.

약속을 어기는 건 끔찍한 일이에요. 특히 어린아이와의 약속은 더 그렇고요.

나중에 어린아이와 지낼 때 반드시 이 점을 기억하세요.

어린아이... 어린아이?...

톰슨은 반즈의 어깨를 두드렸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한참 후에야 아이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알았어요.

이 나이대의 아이는 벌써 부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하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무거운 무게가 있지요.

저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전장에 나가기로 결심했어요.

자신의 아이를 이끄는 건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부모는 아이의 본보기이자 깃발죠.

어떤 방면으로 봤을 때 당신과 그가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나요? 걱정한다든지, 어떤 것을 털어놓기 싫다든지 이런 거 말이에요.

난......

그 일은 제가 잘못한 점이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제가 귀항하려 할 때 갑자기 새로운 침식체가 나타나는 바람에 동료와 함께 남게 됐어요.

아이의 축구 경기보다 눈 앞의 동료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어떤 사람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마음에 남거나 후회하느니, 차라리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생각해요.

할 수 있는 것...

그럼 넌 일단 왼손을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

음... 내가 좀 테스트해 볼게.

네.

작전 능력이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 전선에 나서는 거지?

그게 저희가 지상에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전장에서 부상 입은 동료를 구하고, 전장에서 동료와 함께 싸우는 일.

그리고 이건 저와 아이의 약속이기도 해요. 언젠가 아이가 진정으로 지구상에서 숨 쉬고 달릴 수 있게 해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보조형 구조체는 전장의 날카로운 칼은 아니지만, 전장에서 가장 중요하고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예요.

...왜 그렇게 말하는 거지?

우리는 '깃발'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존재는 마음을 북돋는 최고의 강심제이죠.

마치 생명의 별이 부상자에게 어둠 속의 희미한 별빛을 제공해 방향을 이끄는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가 전장에 있으면 모두가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대담하게 앞으로 돌진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모두의 뒤에는 보조형 구조체가 강력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냥 단순한 지원일뿐이잖아...

지원 작업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요.

공격형 동료들에게 적절하게 공격 협조를 제공하는 것이지, 그들의 공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의 공격 패턴을 알아야 하고 모든 사람의 작전 스타일에 익숙해져야 하죠. 그건 어떤 교과서도 가르칠 수 없는 지식이에요.

그건 모두와 같은 땅, 같은 전장에 서서 오랫동안 피와 땀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는 열매예요.

그게 아까 전투 중 맨손으로 EMP를 터뜨린 이유야?

알고 있었나요?

동부 전선에서 돌아온 구조체들이 말해줬어.

하하, 뭔가 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나요?

생사를 함께 겪으면서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진 느낌이요. 방금의 전투 이전에는 우리 구조체가 이런 것까지 인간에게 알려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

톰슨의 말을 듣던 반즈는 침묵했다. 어느덧 테스트가 완료되고 톰슨은 왼손을 움직였다.

대단하네요. EMP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됐어요.

난 그걸 얻을 자격이 없어...

네?

반즈는 일어나 공구를 옆에 두고 엄폐물을 나왔다.

막 엄폐물을 나온 반즈는 엄폐물 밖에서 뜨거운 화학 연기를 들이마셨고, 이글거리는 열기는 반즈의 콧속으로 들어가 기침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반즈가 기침할 때 갑자기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카무이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좀 나아졌어?

...괜찮아.

내 말은 너 숨 막히지 않냐는 거야.

과거의 틀에 얽매여 숨이 막힐 지경이야.

너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너무 의식해.

...어쩌면 그럴 수도.

모든 사람이 너처럼 말하면 바로 실천하는 행동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반즈, 넌 거짓말을 폭로할 용기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올바른 답이 아니야.

거짓말도, 진실도, 우리 구조체에겐 그냥 무의미한 거지.

당연하죠. 거짓말 뒤의 진실을 본 뒤 저희는 결말을 알았어요.

인간을 위해 죽는 건 구조체가 저항할 수 없는 결말이지요.

다만 일찍 죽거나, 좀 더 늦게 죽거나 아니면 어디서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게 현실이에요.

이게... 현실이... 에요.

다음에 버틸 수 없다면... 그냥 의식 회수를 가동하는 건 어떨까?

괴로움에서 벗어난 기체의 의식의 바다를 공중 정원으로 되돌려 놓는 거야.

마치 생전의 상태로 돌아간 듯 따뜻하고 편안할 거야.

너의 낙관적인 세상에는 처음부터 이른바 현실의 중압감과 무력함이 존재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거짓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생물이야.

자신이 누구인지, 현실이 어떤지 잘 아는데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거짓말로 현실의 평온을 유지하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지, 그것도 우리가 짊어져야 할 대가야.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난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야.

아니.

나도 이런 구조체지만 무기력할 때가 있어.

나도 후회해 본 적 있고, 생각해 본 적도 있어. 내가 더 강해지고 잘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후회하고 자책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과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너는 나약하지 않아. 그저 진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

전장은 죽음에 가장 가까운 장소야.

죽음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지.

그 성가신 것들은 일단 뒷전으로 밀어놔도 상관없어.

지금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주변 동료들을 살릴 수 있는지, 이걸 생각해야 돼.

넌 톰슨을 도와주는 걸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건...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고.

그런 건 다 중요하지 않아.

……

중요한 건 네가 더 이상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