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 앞은 여과탑이 커버하는 범위니까 보호 마스크를 벗어도 돼.
……
반즈는 카무이로부터 건네받은 보호 마스크를 집어 넣었다. 산소를 코로 충분히 들이마시자 도시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반즈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공중정원의 모의 체험관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감촉과는 달리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구의 구성 원소였다.
반즈는 카무이를 따라 재건 중인 도시로 진입했다. 도시의 대부분 건물은 아직 무너진 상태지만 중앙의 여과탑은 다시 가동을 시작했고 몇몇 구조체 부대가 여과탑 아래로 이동하며 재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느낌이 어때?
음... 신선한 경험이긴 하지만 별거 아닌 것 같아.
계속 한곳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아?
헤헤, 위쪽에서 인간을 지구로 내려 보내는 일은 드무니 이번 기회를 잘 잡아봐.
카무이가 웃으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
뭐? 잠깐...
뛰어내려, 내가 받아줄게~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반즈는 제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고 벽에서 적당한 발을 디딜 틈을 찾아 천천히 땅을 향해 움직였다.
오래 기다렸지. 카무이 복귀했어.
그래, 다음 전투를 준비를 부탁할게.
...응? 네 뒤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따라온 거야?
아, 그는 반즈라고 해. 위에서 보내서 온 거야.
반즈는 보통 의사가 아니야, 엄청 대단한 의사야!
저번에 그렇게 당했던 내 기체를 반즈가 말끔하게 고쳐줬어.
약간 늙어 보이는 구조체가 생글생글 웃는 카무이와 긴장한 반즈를 번갈아 쳐다봤다.
반즈라... 아, 그 교수의 학생이구나.
당신이... 어떻게 그를 알지?
그래, 예전에 너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 너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하아...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과로 때문에 사망할 줄은 몰랐는데, 분명 생명의 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지.
과로 때문에 사망했다고?...
이 얘긴 그만하지. 옆 157호 도시의 방어선이 위급해. 침식체가 언제든지 우리를 덮칠 수 있어.
반즈, 전투가 시작되면 여과탑 근처 엄폐물에 숨어...
늙은 구조체의 말은 남쪽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폭음에 가려졌고, 뒤이어 한 구조체가 급히 그의 앞으로 달려가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대장님, 도시 남쪽 입구의 자율 포대가 폭파되었습니다.
도시 동쪽의 자주식 지뢰도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흥,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않을 거야.
방어선을 편성해 각자 맡은 자리로 돌아간다. 이 도시를 잃을 순 없어.
네!
의사, 당신은 내가 방금 말한 곳으로 가주게. 네가 의사를 엄호해.
네!
지령을 받은 구조체들은 곧바로 움직였다. 한 구조체가 반즈를 이끌고 빠르게 여과탑 쪽으로 전진해 반즈를 비교적 튼튼한 건물 엄폐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사 선생님,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말을 마친 구조체는 반즈의 어깨를 두드린 뒤 무기를 꺼내어 방어선의 최전방을 향해 달려갔다.
산발적인 폭발음이 곧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교전음으로 변했다.
침식체들이 사전에 배치한 방어선을 넘어 여과탑 인근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지상인가... 구조체들이 전투하는 전장...
침식체 무리에서 유탄 한 발이 날아와 여과탑 근처에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반즈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예전에 부상자들로부터 들었던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모습이 지금 반즈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우뚝 솟은 건물이 포화에 무너지며 그 아래 구조체와 침식체를 매몰시켰다.
한 구조체의 발목이 균열된 땅에 빠졌고, 잠시 주춤한 사이 주변에 수많은 침식체들이 집중 공격했다. 그 옆에 있던 구조체들은 지원하러 나섰다가 침식체의 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빛과 폭발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순환액과 기름이 섞여 지상의 포탄 구멍 사이로 흘렀다.
화학 연기가 반즈의 호흡기로 밀려들어와 불쾌한 반응을 일으켰고, 반즈는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구조체가 지나간 지역에는 침식체의 잔해가 쌓여갔지만, 더 많은 침식체가 지평선에서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전장을 뒤덮었다. 인간은 구조체를 만들어 전쟁을 하며 지구에 대한 자신들의 주권을 내세웠지만, 대다수 인간은 전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마치 예전의 반즈처럼.
반즈가 눈앞을 가득 메운 연기를 손으로 헤치자, 구조체 하나가 자기 앞에 서서 몸에 박힌 수류탄 파편을 빼내 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찢겨진 완장을 통해 반즈는 그 완장이 원래 보조형 구조체의 표시인 것을 어렴풋이 맞출 수 있었다.
!
제가 방금 정비한 인조 피부가 아깝네요.
그렇지만 이 정도의 무기라도 인간 몸에 맞으면 큰일나겠어요.
넌 보조형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제가 보조형 구조체이지만, 하지만 저는 의사이자 전사이기도 해요.
자, 이거 받으세요.
앞의 보조형 구조체가 제식 권총 한 자루를 반즈 옆에 두며 말했다.
전장은 순식간에 변해요.
이렇게 실시간으로 동료 옆에 서서 서로를 돌봐줄 사람은 없죠.
항상 동료가 가까이에서 보호해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침식체를 향해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톰슨, 동쪽 방어를 지원해.
알겠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톰슨이라 불리는 그 구조체는 이 말을 남기고 다른 권총을 꺼내 침식체를 향해 점사하며 여과탑 동쪽으로 달려갔다.
의사... 전사...
반즈는 권총을 들고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고, 멀리서 카무이가 외치는 고함소리가 침식체의 소리를 가르고 반즈의 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