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버틸 수 없다면... 그냥 의식 회수를 가동하는 건 어떨까?
괴로움에서 벗어난 기체의 의식의 바다를 공중 정원으로 되돌려 놓는 거야.
마치 생전의 상태로 돌아간 듯 따뜻하고 편안할 거야.
으윽...
그 구조체에게 한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반즈는 정비실을 떠나 빠르게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반즈는 위경련을 더 이상 참지 않고 두 손을 꽉 눌러 세면대를 힘껏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후... 후...
반즈는 자신의 호흡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마취의 부작용으로 떨리는 손, 수면 부족으로 움푹 패인 눈, 공허한 두 눈에는 반즈의 병적인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이것들은 거짓말과 타협한 주제에 쓸데없는 저항을 하는 자업자득의 모습에 불과했다.
거짓말로 희망을 품은 채 전쟁터에 나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알려 참혹한 현실에 맞서 괴로워하며 파멸시킬 것인가?
————
과거에 내가 했던 선택처럼...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렇게 변했구나...
언제부턴가 약물에 의지해야만 잠에 들 수 있었다.
나는 잠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과거의 한 장면이 자신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들의 고통과 분노는 임사체험하는 것처럼 나를 휘감고 밤을 새웠다.
약효가 작용하면서 졸음이 온몸을 휩쓸기 시작했다.
잠에 들기 직전에 축 늘어진 손가락 사이로 찬물이 흐르면서 졸음이 사라졌다.
……
찬물을 손으로 받자 물줄기는 순식간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반즈는 고개를 저으며 화장실을 나왔다.
반즈가 화장실을 나온 뒤 본 것은 생명의 별의 혼잡한 홀이었다.
수많은 중상을 입은 구조체가 간호 침대에 놓여있었고 의사는 그들을 각 병실로 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많은 구조체 부상자가 나타난 거야?
지상에서 또 어떤 대규모 작전을 벌인 것 같아.
하아... 모처럼의 한가함이 이렇게 없어졌네.
반즈와 얘기를 나누던 의사의 휴대용 단말기에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단말기의 데이터를 보더니 반즈의 어깨를 툭툭 치고 먼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자 반즈의 휴대용 단말기도 울리기 시작했다.
1호 중증 점검실... 하필 그런 곳에 배치되다니...
반즈가 1호 점검실에 들어서자 한 금발의 구조체가 눈에 띄었다. 그의 장비는 망가져 있었지만 그의 대검은 여전히 강인했고, 한 조수는 다른 사람이 그 구조체의 무기에 방해 받지않도록 그 대검을 수술실 한구석으로 힘겹게 끌고 갔다.
자료를 보니... 카무이라고 부르네. 지상에서 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거지?
이렇게 다친 정도라면 차라리 수리하는 것보단 새 기체를 만드는 게 낫겠어.
그를 잘 고쳐주게.
니콜라의 차가운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반즈는 점검실 천장의 감시 장치가 끊임없이 공간 전체를 스캔하고 있고, 그 감시 장치 뒤에는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공중 정원의 고위층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행동 모듈 손상. 혼수상태. 기체 내 순환 모듈 이상.
...대충 알겠군. 점검을 시작하지.
네.
저 의사 이름이 뭐라고?
반즈입니다.
반즈? 정말 특별한 이름이군.
저 정도의 솜씨와 판단력은 공중 정원 의사로 썩기에는 아깝군.
관련 자료 좀 주게.
네.
……
……
그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군.
장관님, 그 말씀은?
그의 재능을 계속 낭비할 순 없지.
지상으로 보내. 살아남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만일 살아남지 못한다면 불안 요소를 제거한 셈이 되겠지.
네!
점검 종료.
반즈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낸 뒤 점검 도구를 옆에 두었다.
조수들이 잇따라 점검실을 나왔고, 반즈는 오랜 시간 점검으로 인해 굳어 있던 몸을 풀은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
반즈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자신의 외투가 누군가에게 붙잡힌 것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점검대 위에서 카무이라 불리던 구조체가 어느새 깨어난 것을 발견했다.
어? 30분은 지난 뒤에 일어나야 한다니까.
그는 어디에 있지?
누구?
여긴 어디지?
공중 정원의 생명의 별이야. 넌 운 좋게도 다른 사람이 전장에서 데려왔어.
...그랬구나.
카무이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그들을 꽉 잡으려 해도 힘을 쓰지 못했다.
음... 통각 차단 효과가 아직 분산되지 않은 모양이니 좀 더 누워있는 게 좋을 거야.
반즈의 말에 반박하기 위한 것처럼 반즈 말이 끝나자마자 카무이는 두 손을 꽉 쥐었고 이어 두 손으로 점검대를 짚고 앉았다.
네가 나를 구해준 거야? 고마워.
카무이의 환한 미소는 반주의 우울한 감정을 완전히 없앴다. 또 상대의 빠른 태도 변화에 반즈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야.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카무이는 자신의 휴대용 단말기를 내려다보더니 점검대에서 뛰어내려 구석에 놓인 자신의 무기로 향했다.
다음 작전 지령이 내려왔어.
그럼 난 이제 그만 복귀해 볼게.
음... 생명의 별 수리실에 좀 더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손상 정도를 봤을 때 복귀를 미루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안 돼. 침식체는 우리가 고쳐지는 걸 순순히 기다리지 않는다고.
일찍 돌아가지 않으면 더 많은 동료들이 피해를 입게 되니까.
……
왜 그렇게 급히 돌아가려는 거지?
일찍 돌아가지 않으면 더 많은 동료들이 피해를 입게 되니까.
너희 구조체들은 왜 자신의 기체를 더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야?
...설마 의식 회수가 너희들을 지켜줄 거라 믿는 거야?
의식 회수? 그런 방법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런 걸 쓴다는 건 지상의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동료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겠다는 뜻이잖아.
그럼 왜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행동하는 건데.
걱정 마, 이건 마구잡이식이 아니야.
재도전 기회 없이 단 한 번에 게임 오버가 된다는 거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그 한번의 기회에 전력을 다해 도전하고 싶어.
너... 알고 있었어?
쉽게 짐작이 가잖아.
게다가 너는 의식 회수를 말하기 전에 망설였어. 그건 너도 의식 회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지.
음...
걱정 마.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거야.
이런 얘기가 돌아다니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너... 그 거짓말의 존재도 의심하지 않겠다는 거야?
의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아... 그랬군...
너희 구조체들은 지구를 되찾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야.
지구를 되찾는 건 결과고,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모두와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는 거야.
이게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야.
그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카무이와 반즈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점검실의 문이 갑자기 밖에서 열리더니 한 남성이 점검실 안으로 들어섰다.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입니다.
생명의 별 반즈는 지상 공동 주재 155호 도시로 전출을 명령합니다.
응?
155호 도시는 내 다음 임무 장소인데? 거기는 전투 구역이잖아. 왜 인간을 보내는 거지?
반즈의 기술은 다음 작전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만이 있을 경우 서면으로 이의 제기를 신청하십시오. 14일 이내에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카무이, 현재 당신에게 필요한 건 명령 수행입니다.
...알겠어.
좋습니다.
안내 요원은 명령문을 읽은 뒤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남기고 점검실을 나갔다.
너 지상에 가 본 적 없지?
응, 없어.
위에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155호 도시에 내 동료가 주둔하고 있거든, 우리가 너를 지켜줄 거야.
카무이는 말하며 점검실의 문을 열었고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반즈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냥 가끔씩 장소를 옮겨 산책한다고 생각하면 돼. 어쩌면 내가 말한 가장 중요한 일을 이해할 수도 있겠네.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