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는 바닥에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구조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녀의 속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걸까? 그녀의 눈은 왜 눈물로 젖어 있을까?
왜 그들을 버린 걸까?
이건 분명 그녀에게 내리는 벌일 것이다.
내 가족은 지상에서 죽었어. 그리고 나는 그들의 손을 잡을 수 없었지.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눈길에 축복이라는 것은 절대 존재하지 않았어. 그저 원한만 남아 있을 뿐.
버려진 사람은 증오뿐이고 떠난 사람은 후회뿐이었어. 이 에덴은 원한과 수많은 시신에서 탄생했지.
전쟁에서 사람은 짐승과 같이 존엄도 의미도 없이 죽을뿐이야.
신앙도, 명예도, 최후의 용서와 축복도 존재하지 않아.
오직 끝없는 증오와 분노르만이 있지.——젠장, 우린 왜 모든 걸 직면해야 하며, 왜 하필 우리가 거기에 서 있어야 하고, 왜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는 거지?
그 병사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건 원한과 분노 뿐이었다.
왜 그들을 버린 걸까? 그들은 인간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워왔는데. 왜 그들을 버린 걸까?
이제 세레나는 분노와 원한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생명력이 차가운 숫자로 변할 때 전쟁의 공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인간이 인간도 될 수 없을 때, 전쟁의 무력함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과거 그 구조체가 했던 말이 전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들이 부메랑처럼 그녀에게 돌아온 순간, 그녀는 병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남겼던 분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출전하기 전, 예술 협회 회장 앨런의 말이 지금까지 그녀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네 오페라가 한때 모든 공중 정원을 뒤흔들었을 때, 예술 협회의 모든 사람들은 너의 앞길을 좋게 보았고, 아무도 너의 재능과 실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지.
좋은 출신을 가진 너의 앞길은 다이아처럼 반짝거렸어야 했어. 넌 구조체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어.
그럼 넌 무엇을 위해 구조체가 되어 고고학 소대에 들어온 거지?
그 질문을 받았을 앨런 회장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지금 다시 그 질문이 떠올랐다.
오만이었다.
그것은 뼛속까지 새겨진 오만함이었다.
과거의 그녀는 순진하게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지옥"을 설명했었다. 그녀는 허상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노래했고 자신이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인생의 빛을 찬양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녀는 병사의 호통에 정신이 확 드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만에 대해 속죄하리라 결심하고 구조체가 되었다.
구조체가 된다면 언젠가 진정한 전장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진짜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진실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지옥을 경험한 뒤에야, 그녀는 "속죄"하려 했던 그 생각 또한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멍청한 이유로 구조체가 되다니. 그런 멍청한 이유로 전장에 서다니.
그녀는 틀렸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틀렸음을 인지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가벼운 이유로 쾌적한 정원을 떠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예술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녀가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오페라와 음악들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곳에 필요한 것은 적군을 소멸할 수 있는 무기와 적진에 뛰어들 정도의 뜨거운 열정이다. 예술에 대한 그녀의 어리석은 신념은 그저 믿음과 자기만족일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누구든지 좋으니까 그녀를 구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좋으니까 자신을 데리고 이곳에서 도망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했다.
연약한 생각이 그녀의 의식의 바다를 가득 채웠다.
너무나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곳이 없다.
복도의 저쪽 끝에서 또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기에 대한 경계심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일어서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적색 빛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적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녀의 품에 있는 기하체 조각을 조준했다.
오히려 여기서 죽는 게 더 편해지는 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미안해. 우리가 너희를 데리고 나가지 못할 것 같아. 하지만 세레나,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조각은 아마 아주 중요한 열쇠일 거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공중 정원으로 가져가야만 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어차피 공중 정원은 이미 그들을 버렸고 이제 돌아갈 곳조차 잃었는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공중 정원으로 가져가야만 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공중 정원으로 가져가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걸 공중 정원으로 가져가야 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레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의식의 바다에 떠오르는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걸 공중 정원으로 가져가야 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군이 다시 그녀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그 순간, 그녀는 무기를 바닥에 세게 꽂고 다른 한 손으로 에어록 문을 열었다.
우주의 진공 상태가 복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휩쓸어갔다.
세레나는 적들과 함께 우주로 날려가는 걸 막기 위해 무기의 손잡이를 잡고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수많은 로봇들이 출구에서 버티고 있는 그녀의 몸통과 부딪히며 밖으로 밀려나갔다. 밀려오는 고통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세레나는 로봇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들을 데리러 온 비행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수많은 별들 뿐이었다.
커다란 우주 공간은 여전히 고요한 모습이었다.
세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있던 로봇들이 전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에어록 문을 닫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야 해... 다른 생존자들은 없는지부터 찾아야 해.
상처투성이인 몸을 이끌고 그녀는 도망쳤던 그 길을 다시 돌아갔다.
세레나는 그가 아직 살아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상태인데도 아직 살아있다니.
왼손을 제외하고 모든 팔다리가 없어지고, 머리 부분도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지만 겨우 남은 발성 모듈로 미약한 소리를 내고있었다.
고고학 소대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파괴되진 않았는데. 아마 그 뒤에 또 한 차례의 전투를 거친 듯싶었다.
누구...야...?
소리 수신 모듈은 아직도 실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다니.
세레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손을 꼭 잡았다.
누구야...?
저에요.
세레나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최대한 부드럽고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너... 너였구나... 고고학 소대의 세... 세레나... 맞지?
그의 목소리는 녹 쓴 악기처럼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마치 철사로 철판을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너... 왜... 돌아온 거야?
지원군은... 도착했어?
아니. 그들은 오지 않았다. 공중 정원은 그들을 버렸고 그들은 전부 배신 당했다.
순간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를 포기했음에도 왜 의식의 바다 안정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생리 현상은 남겨둔 걸까?
왜 구조체가 된 뒤에도 인간의 취약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네, 지원군이 왔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무사히 구조됐어요.
그래? 정말... 잘... 됐어...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거지?
완벽한 거짓말 하나를 위해서는 수많은 거짓말이 필요하다.
소리 접수 모듈이 파괴되어서 멀리서 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나 봐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곧 의료병이 리더님을 데리고 갈 거예요. 저희는 구조체잖아요. 기체를 세 걸로 교체하면 다시 괜찮아질 수 있어요.
정보... 그리고 샘플은...
전부 전송했어요.
말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전송했어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응...
이때 그의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세레나는 그가 이미 그녀의 얄팍한 거짓말을 간파했음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마워...
저한테 고마워 하실 필요 없어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건 저인데요. 그때 절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방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 대원들이... 너를 세레나라고 불렀을 때...
나도 생각났어. 어디서 너를... 봤었는지...
공중 정원의 오페라 극장... 맞지?
너... 거기서... 오페라를... 기획했던 거 같은데.
그 중... 한 장면의 배경음악은... 네가 직접 부른 아리아였지... 그래서 네 목소리가... 익숙했던 거였어...
그래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넌... 분명 인간이었는데... 왜 갑자기 구조체가 된 건지... 그래서 알아보지 못했어.
낯선 사람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들추어내자 당황한 세레나는 흠칫하더니 부끄러운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과거일 뿐이에요...
의미가... 없다니...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주인공이 죽기 전... 그 레퀴엠을 말이야.
그의 말에 세레나는 지금까지 숨겨두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선에서 세상이 공중 정원처럼 일사불란하게 돌아갈 줄 알아? 당신 공연의 그 성대한 추모회는 전선에서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추도사를 읽고 장례 음악을 연주한다고? 우리는 산 사람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죽은 사람을 위로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죽은 사람들은 너무 많아. 매일 수많이 별들이 어둠 속에 사라지 듯, 그들의 이름도, 그들이 쓰러졌던 그 장소도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
병사의 죽음을 위해 레퀴엠을 불러주는 건 얼마나 유치하고 우스운 짓인가—— 병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과거의 무지함이 부끄러웠던 그녀에게 병사의 외침은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는 악몽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위해 곡을 썼던 걸까? 무엇을 위해 시나리오를 썼던 걸까? 무엇을 위해 노래를 불렀던 걸까? 또 무엇을 위해 싸웠던 걸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왜? 이제 이 남자마저 숨을 거두기 전 그녀의 순진함을 책망하려는 것일까?
그날 그 병사를 마주했던 그때처럼 그녀는 입술을 다문 채 눈을 감으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렸다.
그런데 상대방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 전까지... 난... 인간은 죽음이 끝이고... 구조체는 파손되면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했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런 존재 말이야.
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어... 하지만 네가...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지...
세레나는 흠칫했다.
그건... 내가 이번 생에... 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어...
그녀는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멍청한 방식이었다. 오페라의 주인공이 죽자 흘러나오는 아리아, 저열하고 오만한 방식의 애도였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그건...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일방적인 순진한 환상이었다는 말이 그녀의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이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주... 순진한 방식이었지.
하지만... 정말...
아름다웠어...
만약 이 세상의 모든 게 그렇다면... 참 좋을 텐데.
정말... 미안해. 우리가... 더 열심히 싸워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너 같은... 사람까지... 전장에 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된 거겠지.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될까? 그때... 불렀던 그 노래 다시 불러줄 수 있겠어?
……
영광이에요...
눈동자에 맺혀있던 눈물이 드디어 흘러내리고 그녀는 엉망으로 된 그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과거에 얻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 기나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던 스스로에 대한 의심들.
지금 이 순간, 이런 장소에서 똑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서...
그녀는 또다시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얻은 가장 큰 영광입니다.
구조체의 발성 모듈은 인간의 목과 구조가 달라 노래를 시작하자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노하우를 찾아냈다.
어떻게 해야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그녀의 영혼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다.
아주 오래오래...
그녀의 눈물이 전부 말라버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