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높은 천장에 도금이 되어 있는 방으로 복도의 양측에는 책장이 가득 서 있었고, 각 책장에는 시간 순서에 따라 여러 데이터 자료와 종이 재질의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스크린은 지금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책장 끝에 있는 벽에는 구룡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은 이미 퇴색되었고, 어떤 것들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곳은 구룡 상회의 기록 보관실이다. 역사와 명예의 상징으로, 상회 선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이 자료에서 뭘 얻어야 하는거지?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를 생각해 봐야지.
이게 역사야? 난 사관들이 승리자를 찬양하는 화려한 단어와 실패자에 대한 부정적인 설명 밖에 보지 못했어. 이런 방식으로 승자의 빛을 조금이나마 함께 보려는 거겠지.
너도 상회가 통합될 때의 전투를 봤었지? 우리 조상들은 첨단을 추구하는 정의의 사도로 추앙되었고, 반대 세력은 전부 구시대의 잔당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어.
왜냐고? 오직 승자만이 옳고 패자는 전부 틀린 거니까.
구룡은 그들의 사회를 와해시키고 그들의 역사를 지웠어. 구룡이 생각하는 진리를 그 개화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적용시켰지.
쯧, 조금만 이성적이었어도 이게 얼마나 황당한 실수였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승자의 노력도 역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야. 그들은 결국 구룡을 통일했고 구룡은 더 안정됐어. 그것도 사실이야.
네가 말한건 단지 결과에 대한 이론일 뿐이야.
이 사건 좀 봐봐.
비리야는 손가락으로 태블릿을 가볍게 넘겼다. 대량의 암호화 데이터가 곡의 데이터 태블릿으로 전송되었다.
이건 뭐야?
지구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찾아봤어.
이 곳의 사료와는 좀 다른 내용이네...
맞아, 이 사람은 현재 역사에서 구룡을 파괴한 "죄인"이라고 불리고 있지. 그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인해 지난 재난에서 수많은 구룡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목숨을 잃었어.
황금시대에 그 정도 손실을 입는 건 불가능한데.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야. 이 사람은 자신의 생명으로 이 학살을 멈췄어.
인간은 진실 따윈 신경 쓰지 않아. 진실보다 책임을 부담할 상대가 필요할 뿐이지. 분노와 원한을 분출할 목표가 없다면, 마음 놓고 순수한 피해자가 될 수 없을 테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처음부터 더 편한 길을 선택해.
일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월의 힘 앞에서 결국 쓰러지지. 그들의 단단한 연맹도 완전히 와해되고 진실은 인류 사회의 편안함에 묻혀버려. 이익을 쫓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이야.
하지만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희생을 선택했어.
그래서 더 멍청하다는 거야. 이성적인 사고 없이 선택했어. 그런 상황에서는 적당한 홍보 기관에 강력한 수단까지 동원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지. 그랬다면 지금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을 거야.
인간은 도대체 언제 기계처럼 완벽해질 수 있을까?
승자든 패자든 다 자기가 맞다고 생각할 일을 할 뿐이야.
얼마나 제멋대로고 무지한지.
그런 건가?
적어도 이 자료에서 봤던 건 이것들이야. 참 추악해.
만약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여전히 그런 선택을 할까?
그럴걸? 인간은 실수를 고칠 줄 모르는 족속이거든.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 그게 아니었다면 역사에 비슷한 일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그 선택을 네가 했다고 해도 그랬을까?
…………
곡의 말을 들은 비리야는 흠칫하더니 곧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난 내 선택을 믿어. 그래서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역겨워.
말을 마친 비리야는 고개를 저으며 파일 보관실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한편 곡은 앞의 데이터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그런가...
곡은 앞에 펼쳐진 사진을 바라보았다. 승리를 거둔 포뢰파가 돌아왔을 때 찍은 홀로그램 영상이었다. 그는 웃으며 손으로 동료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이런 행동은... 기쁨이군.
다음 사진은 염유의 의료병이 부상자 옆에 앉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손을 부상자의 이마에 얹었다.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부상자의 복부는 이미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누가 봐도 이제 곧 죽을 사람이었다.
이런 행동은... 비극이야.
곡의 손은 마지막 사진에서 멈추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었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시도하고, 실패할 걸 알면서도 도전한다라.
이게 바로 인간인 건가?
이해가 가지 않아...
윤님, 오셨습니까?
그래, 두 분은 아직 안에 계시나?
네, 가문의 안배대로 다음 주 역사 시험을 마친 뒤에야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도 결국 형식에 불과합니다. 이게 중간 테스트 때 찍은 영상입니다.
호위는 윤에게 태블릿을 건넸고, 태블릿에서 곡과 비리야는 침착하게 산예 학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점검이 끝난 뒤 산예파는 만족한 표정으로 파일 보관실을 떠났다. 다들 곡과 비리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님, 이렇게 계속 두는 건 안 됩니다.
맞습니다... 구룡파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선일이 다가오면...
윤의 왼쪽에 선 청색 도포를 입은 문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은 그의 이마를 짚더니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었다.
쉿, 들었나?
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시대의 노래 말이야.
세월이 지나며 구룡의 영토는 계속 확장되었어. 그리고 수많은 왕조들이 나타났고, 파멸됐지.
이곳에서는 기적, 재앙도 있었고 구원, 폭정도 있었지. 이곳에는 격동의 역사와 영혼을 울리는 눈물도 있었어.
윤은 말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청색 도포를 입은 문관은 등이 복도 벽에 닿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뒤로 물러났다.
이것도 시간이라는 강의 분수령일 뿐이야.
선조들은 역사가 되어 후세들의 발에 밟히는 것.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건가?
아닙니다. 소인이 말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하, 가문은 나한테 이렇게 가르쳤지. 역사는 항상 이런 식이라고.
하지만 가문에는 분명한 규칙이 있어.
손에 잡은 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내주지 않아.
윤은 더 이상 손가락으로 문관의 이마를 짚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그의 볼을 툭툭 칠 뿐이었다. 그럼에도 문관의 몸은 두려움으로 인해 덜덜 떨렸다.
하, 운이 좋네. 오늘은 무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거든.
윤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청색 도포를 입은 문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벽을 따라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때 윤은 다시 왼손을 뻗어 권총 모양을 한 채 청색 도포를 입은 문관을 겨누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탕.
그 순간, 총알이 문관의 머리를 관통하고 피와 뇌액이 복도의 벽화에 흩뿌려졌다.
호위는 소음 권총을 거둔 뒤, 등 뒤에서 청소 도구를 꺼내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적색 도포를 입은 문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윤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윤은 파일 보관실 문이 굳게 닫힌 걸 보고 차갑게 웃은 뒤 자리를 떴다.
두 괴물...
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한다. 그게 우리가 배운거잖아?
소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