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의 살육이 지난 뒤 침식체는 또 다시 몰려들었다.
——!
윽...
익숙한 구조체 몸 안에 있는 기계장치는 꽤 많이 외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순환액이 모래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한쪽 팔이 부러진 상태라 반격하는 자세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하나라도 좋아. 얘라도 지킬 수 있으면 돼.
베라는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드는 침식체 무리를 베어가며 익숙한 구조체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지탱했다.
보조형으로 디자인되었다 보니 그녀는 자신의 전투 운산 모듈이 점점 더 무뎌지는 걸 느꼈다.
이봐, 흔한 얼굴, 너 공격형 맞지?
그래... 왜? 지금 이 상황에서 나 같은 공격형이 너보다 못하다고 말...
깔끔한 기계음이 구조체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베라는 자신의 팔을 떼어냈고 빠르게 나노 보강을 이용해 그 팔을 구조체에게 붙였다.
너...
내 전투력은 이미 한계야. 난 보조형으로 디자인됐으니까. 하지만 넌 구조만 제대로 갖추면 아직 싸울 수 있는 거지?
살아남은 팀원이 있으면 나도 더 이상 "사신"이라고 불리우지 않아도 돼.
이 팔로 방어벽을 뚫어. 그리고 도망가.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도망치라고!
더 이상 나에게 감정적인 고통을 남겨두지 마. 그건 몸이 아픈 것보다 훨씬 더...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 아닐까?
... 조심해!
베라가 상처를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차가운 순환액이 베라의 얼굴에 튀었다.
구조체는 완전히 부서지기 전 다른 팔로 갑자기 달려드는 대형 로봇 침식체의 코어를 가격했다. 그 덕에 기습을 해오던 침식체는 행동능력을 잃어버렸다.
살아남아.
구조체가 부서지기 전 베라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건 축복이자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살아서... 살아남아서 뭘 하라고!
베라는 구조체를 구하기 위해 칼을 들고 밖으로 달려갔다.
젠장, 젠장!!
이 모든 것 중에서 베라는 그 어떤 생존의 느낌도 느낄 수 없었다. 설령 살아남았다 해도 또 다른 공포를 맞이해야 했다.
점점 더 많은 침식체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의 공격은 베라를 명중했다. 한번, 두번... 그 뒤로 수없이 이어진 공격에 상처가 점점 늘어났고 고통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드디어 힘이 다 빠져 침식체와 구조체가 섞인 잔해 위에 무릎을 꿇었다. 고통이 그녀를 쓰러트리려는 순간, 베라는 통각 시스템을 끄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고통스럽다고 해도 상관없어. 부탁할게. 내 통각을 끄지 말아줘.
뭐...!?
고통스러운 기억이 갑자기 베라의 머릿 속에 나타났다. 그녀는 순간 힘을 발휘해 칼을 지면에 꽂아넣었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라는 자신의 모든 행동이, 심지어 그녀 스스로가 고통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고통은 그녀가 스스로의 존재를 똑똑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 그런 거였나?
——!!!
그 고통에 의지해 베라는 바닥을 세게 밟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을 거세게 휘둘렀다.
무기를 통해 느껴지는 촉감을 통해 베라는 침식체들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해 침식체에 둘러싸인 불쌍한 시민들의 비참한 비명에 베라는 더욱 더 고통에 잠겼다.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은 육체, 자아 그리고 남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래, 흔한 얼굴 네 말이 맞아. 적어도 난 느낄 수 있어!
그녀는 "그것"들과 달랐다. 그녀는 아직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하, 아파... 정말 아프네. 이 망할!
이 순간, 베라는 이 모든 것들을 보상으로 생각하고 고통을 앞다투어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난 살아갈 거야. 살아서 너희들이 느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너희들이 다시는 손에 넣지 못하는 것들을 빼앗겠어!
예정된 퇴각 지점, 쿠로노의 운송차량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쿠로노의 사람들은 구조체, 인류와 침식체들의 잔해만이 남은 전장을 누비며 순찰을 시작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있는" 물건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기계가 땅에 끌리는 짧은 소리가 몇몇 쿠로노 팀원들의 주의를 끌었다. 모래와 잔해 속에서 심하게 마모된 칼을 든 소녀 한 명이 외롭게 서 있었다.
순환액으로 적셔진 붉은색 머리카락 아래의 눈동자는 반짝 빛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눈에 비친 처참한 상황과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즐거운 미소가 비쳐있었다. 미친 것 같으면서도 외로운 사신 같은 모습이었다.
그 곁에 산처럼 쌓인 침식체의 잔해들이 그녀의 칭호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도... 살려줘.
소녀는 완벽한 발성장치를 이용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모델 BPN-13, 보조형, 이름은 베라 맞나?
그때와 같은 말투였으나 상황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날 베라는 군에서 이탈했고 그녀의 프로필에는 쿠로노의 도장이 찍히게 되었다.
그것은 축복이자 저주였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