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했어.
기진맥진한 청소부들은 반쯤 열린 문 앞에 서 있었고, 먼지가 덮인 문패에는 ‘관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가 이 탑의 관제실인가?
정말로 찾을 줄이야…… 여긴 괴물도 없는 것 같아. 혹시 층수가 높아서 그런가?
괴물들이 계단을 오를 줄 모르거나 아니면 우리가 운이 좋은 걸 수도 있지.
상위 일련번호의 여과탑은 일반적으로 실험형이야. 퍼니싱 누출과 기술 미숙 등의 문제에 대한 우려로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 실험적으로 건설한 거라 탑 내부의 설계는 최적화되어 있지 않고 규모도 비교적 작아.
관제실은 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비교적 찾기가 쉬운 편이지.
자크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먼지 냄새와 오랫동안 폐쇄된 기계실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았다.
먼지가 쌓인 콘솔을 만지며 자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표정에는 오랫동안 얽힌 증오와 스쳐가는 그리움까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뼛속까지 미워하면서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자크의 터치와 함께 콘솔의 화면이 켜졌다.
역시 아직 작동되는군……!
순간 흥분한 자크의 손은 살짝 떨렸고, 그는 콘솔에 기대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일단 좀 보고 있어 봐. 우리는 다른 방에 가서 챙길 물건이 있는지 살펴볼게.
자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를 숙여 복잡한 제어 시스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입구 쪽에 있는 방화문을 찾아야 해…… 뭐야, 명령을 입력해야 하는 타입이라니……
젠장, 몇 년 전에 설정된 명령을 나보고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비상구의 옆 문을 한 곳이라도 열 수 있는지 찾아보는 수밖에 없겠어……
잠깐, 이 제어 시스템, 마지막 작동 시간이…… 면역 시대 말기라고?!
여과탑 문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계속 작동할 수 있었던 거지?! 원심 분리기 배열을 점검하는 사람 없이 지금까지 작동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여과탑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탑 안에 퍼니싱과 관련된 괴물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있겠어!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은데.
이 탑……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건 당연하지. 친구, 주위를 봐봐. 이런 식물들과 괴물들이 있는데 문제가 없다고 하면 더 이상한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이 탑이 최근에 작동된 줄 알았어…… 탑 안의 운행 일지도 그렇게 나와 있지만, 이 탑의 제어 시스템에 따르면 이 장소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면역 시대 말기라고 나와있어!
그렇다면 이 탑은 어떻게 작동된 걸까? 누가 제어 인증을 피해서 이 탑을 작동시킨 걸까?
자크는 머리를 감싸 안고 두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이 탑은…… 최소 두 달 이상 작동됐어.
뭐가 문제라는 거야?
원심형 바이러스 여과탑. 간단히 말하면 이건 초대형 에어컨이야.
원심 분리기 배열의 작동으로 여과탑은 각기 다른 밀도의 기체 혼합물을 분리시키고, 공기 중에서 퍼니싱 바이러스를 분리해 탑 지하에 있는 필터로 이동시키지.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원심 분리기 배열을 점검해야 하고, 바이러스 농도가 상한에 도달한 필터를 처리해 줘야 해.
일반적인 도시의 공기 여과탑은 인구가 많아 한 달에 한 번 점검을 하지만, 숲 속의 여과탑은 두 달에 한 번 점검하는 게 한계야.
하지만…… 이 탑의 퍼니싱 농도는 우리가 편안하게 숨을 쉴 수도 있어.
혹시 누가 점검하는 건 아닐까?
불가능해. 여과탑을 점검하는 작업은 매우 복잡해서 단계마다 전문 지침에 따라 엄격하게 수행해야 해. 작은 실수라도 했다간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생각해 봐. 우리가 어떻게 12km 내 모든 주민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상태에서 실수할 수 있겠어?
‘우리’? 잠깐, 예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넌 어떻게 여기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거야? 네가 한때 기계 엔지니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여과탑에서 일을 했다는 건 몰랐어.
‘한때’ 기계 엔지니어였지.
자크는 재빨리 강조했다.
난 여과탑 건설에는 참여하지 않았어. 그냥 딱 한 번 여과탑에 접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원심 분리기 배열을 점검한 적이 있었어.
……여과탑을 점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실수로 바이러스에 침식됐다간 끝장나니깐.
보수라고는 영양바 하나뿐이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엄청난 손해였지……
그렇다면, 그 걸러진 퍼니싱은 어디로 간 거야?
그게 바로 문제야.
우리가 길에서 본 식물들…… 그리고 괴물들……
……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자크가 단말기를 한참동안 조작하자 한 스크린이 밝아지면서 화면이 나타났다.
여과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수염’마저도 빨간 경고와 데이터로 가득 찬 화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뭐야?
화면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형태의 입체적인 허상이 나타났는데, 마치 심장 같기도 하고 어떤 생물의 알처럼 생기기도 했다. 그 안에서 수많은 붉은 띠가 뻗어 나왔고, 뿌리마다 고농도 퍼니싱을 띠고 있었다.
청소부들은 그런 띠의 모습에 익숙했다——숲의 인간형 괴물이나 탑 안의 식물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 탯줄들이 에너지를 공급하는 파이프처럼 저것들에게…… 퍼니싱을 제공하는 것 같아.
원래 원심 분리기 배열을 통해 필터로 보내져야 할 퍼니싱이 저 알 수 없는 것의 안으로 되돌아가고 있어.
자크는 콘솔 테이블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퍼니싱 농도가……
코데스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스크린에 계속 올라가고 있는 진행도를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망했네. 이 놈에 비하면 우리가 전에 봤던 적조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진행률 표시줄은 뭐야?
‘수염’은 스크린 아래쪽에 있는 진행률 표시줄을 가리켰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89.6%, 이게 꽉 차면 어떻게 되는데?
자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진행률 표시줄이 꽉 차면 절대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떡하지. 퍼니싱 괴물 한두 마리면 우리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겠지만, 저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했어.
그냥 못 본 척하고 도망이라도 갈까? 마주 본 세 사람은 서로의 눈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저건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이야. 그냥 놔둘 수 없어.
게다가 우리가 가려고 했던 보육 구역은 여기서 너무 멀어.
……구조……
구조 요청을 하는 거야……!
이 탑은 세계 정부가 건설했으니 통신 시스템과 경보 시스템이 있을 거야. 어쩌면 긴급 구조 주파수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면 무선 신호라도 괜찮아. 공중 정원의 군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받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구조하러 올지도 몰라! 그래! 어떻게 그 생각을 못 했지!
……알았어. 한번 해볼게.
하…… 저것 봐. 구조 요청을 하려 하네.
저들은 우리가 화면을 통해 자신들이 도망치고, 숨고, 발버둥 치고 심지어 구조 요청을 하는 모습까지 다 보고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롤랑은 화면 속 엄숙한 표정의 청소부들을 보며 배를 끌어안고 웃었지만, 정작 눈 안에는 웃음이 없었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의식의 바다에서 머나먼 잡음이 들려왔다. 마치 낡은 필름이 다시 재생되면서 오래된 스크린의 먼지가 조용히 없어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알지. 텔레비전에서 갑자기 그렇게 어두워지고 여러 대의 카메라가 연속적으로 바뀌었지만, 난 네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위기 속에서 도망치고, 숨고, 장소를 찾고 마지막으로 이 연락실에 도착 한 과정들을 모두 지켜봤어!’
롤랑은 어지러운 잡음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화면을 보니 청소부들의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지상군이나 공중 정원에 연락할 방법을 찾기 위해 관제실의 대형 조작 패널을 초조한 마음으로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이 여과탑은 신호 교란에 의해 이미 차단되어 있어, 그들의 구조 요청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화면 속의 청소부들은 콘솔을 둘러쌌고 이를 알아차린 듯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롤랑은 이런 절망적인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막다른 골목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침식된 구조체의 얼굴에서 그리고 삶의 희망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고…… 또 어떤 얼굴에서 봤더라?
‘……어쨌든 빨리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너희들이 진행하는 이 관객 참여 이벤트는 정말이지 너무 힘들고 어려워. ’
‘……그럼 여러분들은 뭐가 진짜인지 아십니까?’
그 순간, 롤랑은 위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익숙함은 마치 영혼의 깊은 곳에 피와 살로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애써 참은 구토 욕구는 사라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선명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감정들은 ‘공연’이 계속되면서 마치 폐가에 숨어 있던 망령이 다시 그를 찾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점점 강렬해져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 하.
정말이지…… 한 편의 연극이네.
롤랑은 애써 웃으면서 쌓여있는 기계 위로 뛰어올라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런 것들이나 보고 있자니 너무 지루해. 잠이나 자러 가야겠어.
떠나기 전, 그는 벽에 있는 녹슨 탑 내부 구조도와 숨겨진 각 비상구의 위치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보통…… 방관자는 무대에 오를 수 없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었다.
관제실에서 청소부 세 명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참나, 지금 상황은 정말이지 최악이네.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이곳의 관제 시스템을 통해서는 여과탑의 문을 작동시킬 수 없어.
구조 요청 메시지도 전송되지 않고 문도 열리지 않아.
그럴 리가……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떻게든 해봐. 보육 구역과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수염’은 지친 몸으로 자크의 옷을 움켜쥐며 계속 물었다. 여태 장난기 있는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표정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으로 가득 찼다.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곧 끊어질 것만 같았다.
……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관제실 내부는 숨 막히게 조용했지만, 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여과탑을 감싸는 식물 소리는 세 사람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스크린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진행률 표시줄의 진행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자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니싱…… 침식체…… 전부 이것들 때문에…… 젠장……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상태이기에 어쩔 수 없이 콘솔을 짚고 몸을 지탱해야 했지만, 눈은 스크린 속의 빨간색만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잠자기 전에 부주의해서…… 기계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니, 아니. 그건 내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난 여전히 내 자신을 속이고 있어!
나는 ‘내 기계가 어떻게 바이러스에 침식될 수 있겠어. 그건 평범한 고장일 뿐이야’라고 말했어.
내가 기계의 문제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어……
그날, 내가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어보니……
익숙했던 기계들이 전부…… 빨간 눈으로 변해있었고…… 그들의 몸에는…… 붉은 피들이 묻어 있었어……
내가 신경 써야 했던 문제들을 무시하는 바람에 내 가족이…… 온 구역이……
자크, 진정해……
자크는 눈을 감은 상태로 심호흡을 했고, 콘솔을 잡은 손을 불끈 쥐었다.
여과탑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계야.
보육 구역은 여과탑 주변에 건설돼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야.
기계 엔지니어들이 만든 여과탑을 어떻게 이런…… 역겨운 괴물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둘 수 있겠냐고!
자크는 콘솔에 손을 올려 손가락으로 버튼들을 빠르게 눌렀다. 이어서 여러 페이지가 화면에 펼쳐졌다.
페이지마다 각각의 원심 분리기 배열의 번호와 상태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 탑의 원심 분리기 배열을 파괴해 탑에 공급되는 에너지를 완전히 끊어서 여과탑의 작동을 중단시킬 거야.
저 괴물들을 파괴하지는 못해도 진행도가 계속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있어.
여과탑은 인간의 희망이지 괴물들의 보금자리가 아니야!
귀를 찌르는 경보 소리가 여과탑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경고. 경고. A구역 원심 분리기 배열이 다운되었습니다. 점검요원은 신속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경고. 경고. B구역 원심 분리기 배열이 다운되었습니다. 점검요원은 신속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경고.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여과탑의 필터 기능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
전자 스크린 속의 그래프와 수치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 수치는…… 어머니가…… ‘두려움’을 느끼는 건가요?
막바지에 다다르려 했던 진행률 표시줄이 반복적으로 울리는 경고와 함께 천천히 멈췄다.
——94.5%
——94.5%
——93.9%
——93.5%
——곧이어 진행도가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머니!
진행도를 본 순간 하이디의 금빛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합 모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고 평온했던 이합 모체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붉은 탯줄은 퍼니싱의 공급을 잃어서 빠르게 시들어가는 식물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머지 붉은 탯줄은 더 많은 영양 공급을 위해 모체와 함께 퍼니싱 농도가 높은 곳을 향해 천천히 기어올라갔다.
저들의 행동 때문에 어머니에게 필요한 양분이 부족해요.
……원심 분리기 배열…… 4개는 이미 복구할 수 없는 상태에요.
……왜죠. 지난번 실험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었잖아요.
……저들이 어머니를 다치게 하고 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거예요.
실험에 불리한 요소는 모두 제거되어야 해요.
회색빛 소녀가 손을 들어 가볍게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장가는 겹겹이 쌓인 철골과 쇠 파이프를 조용히 관통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합 생물들은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하이디의 지시에 따라 한 방향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출산에는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요.
굳게 닫혀있던 천강의 공간은 하이디의 지시에 따라 틈을 파고든 이합 식물에 의해 강제로 열렸고, 십자형의 빛이 모체에 투사되었다. 하이디는 점차 열리는 틈을 통해 위를 볼 수 있었고, 모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지금까지 무수한 이합 생물들을 봐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해 충격을 받은 청소부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관제실 정면의 유리벽을 통해 여과탑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탑 꼭대기에서 희미한 빛이 투사되어 이합 생물에 의해 침식된 여과탑의 바닥을 비췄다.
굵고 단단한 넝쿨은 바닥에 있는 문을 뚫었고,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무언가가 나뭇가지와 넝쿨을 들어 올려 넝쿨이 점차 위로 올라갔고 여과탑 벽이 긁히는 소리가 굳어진 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그 짙은 그림자는 마치 탑 안에서 태어난 거대한 기생충처럼 뒤섞인 나뭇가지를 타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
저거였나…… 여과탑 밑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원심 분리기 배열에서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해서 밖으로 기어 나온 건가?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야.
자크는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제어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분주히 움직이는 손에 뚝뚝 떨어졌다.
안전 설명서에 있는 모든 금지 사항들을 하나씩 다 실천해 보다니…… 이렇게 정신없는 날이 올 줄이야. 근데……
에러. 에러. 여과탑 C구역 원심 분리기 배열이 다운되었습니다. 점검요원은 신속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런 행동으로 인간이 퍼니싱에 저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코데스와 ‘수염’은 방에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무거운 물건으로 관제실의 문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모체의 상승으로 더욱 미쳐버린 넝쿨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들겼다.
다른 두 사람은 문을 막고 있는 물건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여전히 콘솔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자크를 바라보았다.
‘수염’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듯 쓴웃음을 지으며 텅 빈 탄창을 만지작거렸다.
이젠 정말 돌아갈 길이 없어. 자크.
‘수염’, 만약 내가 씨앗을 몸에 넣으면 싹이 틀까?
하, 맨날 나보고 머리가 나쁘다더니 지금 보니까 그 똑똑한 머리도 별거 없나 보네. 농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꽃밭에 시체를 묻으면 뿌리가 버티지 못한다는 것쯤은 안다고.
……그냥 딸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할 것 같아서 아쉬울 뿐이야.
하지만 사후 세계에 도착했을 때 내 딸이 없었으면 좋겠어.
딸이…… 그냥 잘 살아남아서 서광이 밝아오는 그날을 볼 수 있길 바랄 뿐이야.
그때부터…… 아직 딸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다 큰 어른이겠네.
코데스는 품에서 투명 비닐봉지에 꽁꽁 싸인 사진 한 장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작은 씨앗 주머니는 그의 움직임에 의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코데스는 씨앗 주머니를 줍지 않고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노랗게 변한 사진 속 하얀 머리의 소녀는 꽃처럼 연한 핑크색 옷을 입고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딸은 나의 자랑이야.
…………
미안해.
내가 여기 오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더라도…… 너희들은……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우리도 그 보급만으로는 보육 구역까지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게다가 너도 우리를 떠날 수 없었잖아.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죽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아. 스스로의 힘으로 탑에 있는 퍼니싱 괴물과 맞서 싸운다는 건,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영웅 같잖아.
‘수염’은 마지막까지도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했다. 아마 그가 처음부터 팀에서 그런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동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 죽기 전에 자기 딸의 사진을 꺼내서 보는 조연도 있고 캐릭터가 잘 갖춰졌네.
자크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미안한 마음을 추스르고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좋아. 이제 D구역의 원심 분리기 배열도……
윽……!
배가 처음에는 차가웠다가 다시 뜨거워졌고, 그다음에는 뼈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크가 고개를 천천히 숙이니 붉은 나뭇가지가 배를 뚫고 나와 피가 나뭇가지를 타고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자크!!!
이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발생해 아무도 천장의 작은 환풍구 사이에서 갑자기 뚫고 나온 나뭇가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내장을 뚫은 극심한 통증에 자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미끄러져 땅에 쓰러졌다.
상처 부분에 퍼니싱 침식 증상이 나타났고 타는 듯한 느낌이 복부에서 사지로 빠르게 퍼졌다.
코데스, 혈청!
여, 여기 있어!
코데스는 황급히 가방에서 혈청을 꺼내 자크의 손을 잡고 주사를 준비했다.
아니야…… 소용없어. 이건 낭비야……
자크는 힘없이 손을 들어 혈청을 쥔 코데스의 손을 누르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의 동작을 저지했다.
하지만……
난 진작에…… 이 결말을 맞이해야 했어……
그는 힘겹게 머리를 들어 스크린의 진행률 표시줄을 보았다.
——79.9%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유리를 통해 그 이름 모를 거대한 알 껍질이 관제실의 높이까지 올라온 게 보였지만, 더 이상은 올라갈 힘이 없어 보였다. 알 수 없는 검은색 재질의 껍질 안에는 다소 부드러워 보이는 붉은 부분들이 촘촘히 감겨 있었고, 연결된 탯줄을 요란하게 흔들며 비명을 질러댔다.
————!!!
그 순간, 굳게 막혀있던 문이 바깥쪽의 엄청난 힘에 의해 열렸다.
문밖에는 창백한 소녀가 공중에 떠 있었다.
물고기 모양을 갖춘 두 마리의 이합생물이 그녀의 옷고름을 문 상태로 함께 공중에 떠 있었다.
반쪽 날개는 그녀의 뒤로 펼쳐져 있었고, 소녀의 금빛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어머니를 해치지 마세요.
그리고 이 탑에 대한 간섭을 멈추세요.
소녀는 가느다란 손목을 들어 멀리 매달려 있는 커다란 알 껍질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곧 가장 중요한 단계에 돌입할 거예요. 이럴 때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당신들은 원래 어머니의 부화를 돕는 손님이었어요.
……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를 해치고 있죠.
이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예요.
가벼운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 창백하고 여윈 소녀는 겉으론 약해 보였지만, 청소부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고, 동료는 더욱이 아니란 걸 느꼈다.
당신들은 이제 어머니를 위한 붉은 꽃다발이 되어주세요.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가장 잔혹한 사형을 선고했다.
하이디가 청소부들을 가리키는 순간, 옆의 벽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큰 구멍이 뚫렸고, 부서진 날카로운 쇳조각과 시멘트 조각이 하이디를 향해 날아왔다. 가볍게 회피한 하이디는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이로 인해 공격이 끊겼다.
앗! 미안! 조준을 잘못했네. 다치진 않았지? 휴, 힘이 약해진 뒤로 정확도도 떨어졌지 뭐야.
벽의 갈라진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체인검을 휘둘렀다. 폭발로 인한 먼지가 그의 움직임과 함께 점차 흩어졌다.
롤랑?
……아니에요. 다음부턴 조심해 주세요.
먼지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왔고, 그는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도록 하지. 그런데 내가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놓친 건 아니겠지?
저들이 어머니를 다치게 하고 가브리엘의 계획까지 방해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해요.
이런, 여기 계신 손님들이 아주 겁에 질린 거 같은데.
내가 저들과 몇 마디만 해도 될까?
하이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날개를 접고 내려왔다.
고마워.
곧이어 롤랑의 환하게 웃는 눈빛이 다른 쪽에 있는 청소부를 향했다.
쯧쯧, 이거 정말 끔찍한데. 특히 자크…… 상처가 너무 심각해. 너희들 그냥 얘를 버리고 도망가는 게 좋겠다. 그를 데리고는 절대 멀리 도망칠 수 없을걸.
너…… 넌 롤모잖아……
오호, 정신을 거의 잃어가는데도 나를 알아보다니. 감동인데?
탑에 들어갈 때부터…… 너를 의심했는데…… 콜록, 콜록……
뭐라고?! 저 녀석이 길을 안내했던 난민이라고?!
왜 우리를 속인 거지……
청소부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놀람의 정도는 롤랑이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반응이 격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난 너희들을 속이지 않았어.
숲, 여과탑, 보급——전부 사실이었잖아. 너희들도 다 봤고.
내가 정보를 알려주면서 위험하다고까지 경고했었는데, 너희들이 이곳에 오기로 선택했잖아. 아니야?
지금까지의 모든 건 너희들이 선택한 거야. 난 그저 길만 안내했을 뿐이고.
롤랑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고 말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청소부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것도 그의 또 다른 연기일지도 모른다.
너……!
너무 화내지 마. 내가 너희들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줄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네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
아, 미안. 방금 말은 좀 무게감이 없었네.
롤랑은 손을 뻗어 ‘수염’과 코데스 쪽을 향해 가볍게 두 번 찍었다.
너, 그리고 너. 너희들이 지금 자크를 포기한다면, 안전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어때?
장난치지 마……
우리는 죽더라도 같이 죽어.
자크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고, 다른 두 사람에 의해 힘겹게 일어섰다.
왜 이래, 나도 너희들이랑 같이 있었는데. 너희들 살고 싶은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자크만 놓고 갈 수 없어!
하…… 난 너희들을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 왜 내가 악당처럼 보이는 거지?
나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 너희들이라도…… 살아야……
너 【——】, 입 다물어. 절대 두고 가지 않아!
어, 나왔다. 관객들을 가장 초조하게 만드는 공포 영화의 대사 TOP3, ‘너 먼저 가. 안 돼. 널 버리고 갈 수 없어!’
롤랑은 두 팔을 벌려 영화 속 장면을 따라 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평소 같았으면 심심풀이로라도 좀 즐길 텐데, 아쉽네…… 시간이 얼마 없어.
이곳의 퍼니싱 농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어? 이건 누군가가 원심 분리기 배열을 파괴하려고 노력한 덕분이지.
롤랑은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고는 곧바로 번쩍이는 차가운 체인검을 주저앉은 청소부들에게 휘둘렀다.
의식이 남아 있던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고, 무언가에 의해 묶여 거칠게 내던져진 것처럼 하늘을 빙빙 돌았다.
어두운 계단으로 떨어지기 전에 코데스는 손 안에 차가운 카드가 있는 것을 느꼈고,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림에 보이는 방향을 따라가. 지하실에 외부로 통하는 길이 있어.’
‘아, 그리고 생각난 김에 말하는 건데. 겸사겸사 청소도 해놨으니 너무 감동받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