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강기 통로에서 가벼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체인검이 당겨지면서 철골이 삐거덕하는 소리가 났고, 회색 망토를 입은 모습이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의 동작은 민첩하면서도 가벼웠고, 착지할 때는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 무대와 조명이 존재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장 주목받는 곡예사일 것이다.
그림자가 복잡하게 뒤엉킨 계단을 능숙하게 가로지르며 내려갔다.
그는 머리에 씌워진 후드를 벗고 엉켜있던 긴 머리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방에 앉아 있는 작은 그림자를 향해 공연의 엔딩 포즈를 취했다.
임무 완료. 숙녀분, 어떠셨나요? 제 공연이 만족스러우셨나요?
……
내가 퇴장하는데 체면 좀 세워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롤랑의 능력은 제 도움 없이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을 텐데요.
미안. 난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걸 좋아해서 말이야.
……그런 가요. 알겠어요.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가볍게 끄덕인 하이디는 감시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여과탑 내에서 원심 분리기 배열에 가장 가까운 위치였고, 여과탑 지하의 중심이자, 진짜 모체가 부화를 하면서 성장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하이디는 이곳을 지하 수도와 비슷한 온실로 개조했다.
온실의 중앙에는 단말기 콘솔이 설치돼 있었고 앞쪽에는 여러 개의 전자 스크린이 합쳐져 있었다. 각 스크린에는 여과탑 내부의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엉킨 넝쿨, 훼손된 시설, 떠도는 이합 생물, 그리고 식물 틈새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시체가 있었다.
대부분의 화면은 정지되어 있었고, 일부 화면에서는 인간의 활동 흔적이 보였다.
감시 카메라 화면의 각도는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끊임없이 전환됐고 각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기이한 그래프와 데이터가 표시되어 있었다.
숫자와 그래프의 변화를 증명하듯, 유리로 차단된 반대쪽에서 이중합 모체가 간혹 격렬한 ‘태동’을 일으켰다.
이야…… 이 카메라 각도 좀 봐. 황금시대였으면 넌 무조건 최고의 피디였을 거야.
이것들은 전부 어머니께서 보시는 거예요.
여과탑 전체와 그 주변 숲은 이미 ‘그것’의 감각기관의 연장선이 되었어요.
하이디의 눈은 깜빡거리는 화면과 데이터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롤모. 그, 그 녀석 떨어진 거야?’
‘……승강기 안의 깊은 통로 속으로 떨어졌어. 그 괴이한 식물들이 밑에 있었으니 아마……’
하하, 저것 봐. 그 와중에 나를 걱정하고 있잖아?
보아하니 내 연기 스킬이 아직 녹슬지 않은 것 같네.
변수가 도입되었고, 관찰을 시작할게요.
어두운 감시 카메라 속에서 얽힌 나뭇가지가 갈라졌고, 튀어나온 적색 조직은 끈적끈적한 눈매를 연상케 했다. 바깥에 드러나 있는 적색 구체들이 어두운 곳에 숨어 나뭇가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응시하는 듯했다.
……저 ‘눈’들이 본 것들은 어머니에게 전달될 거예요. 임무를 완료하셨네요.
어떻게, 이번 ‘손님’들은 연구에 좀 도움이 됐어?
여과탑 주변에서 전달되는 자극과 탑 내부에 있는 인간들의 정신 상태가 변화하면서 ‘어머니’의 부화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요.
4시간 후 마지막 전환이 완료되고 부화가 시작될 거예요.
곧 큰 성공을 거둘 테니 이제는 ‘모체’에 대해 얘기해 줘. 나 정말 궁금해 죽겠어. 그게 부화하고 있는 게 도대체 뭐지?
전 가브리엘이 못다 한 일을 완성하는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그가 남긴 자료를 계속 연구할 뿐이에요.
가브리엘은…… 정말 아쉽게도 알파에게 처참하게 베였지. 전자 대뇌를 아무리 완벽하게 보존했다고 해도 모든 데이터를 복구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가브리엘이 이런 이합 생물을 연구하는 동안 내가 계속 지켜봤거든. 그래서 실험의 세부 사항에 대해 내가 좀 잘 알고 있는데.
만약…… 그 ‘모체’에 대한 일을 나한테 알려주면 실험의 모든 세부 사항을 자세히 알려 줄게.
롤랑은 자신 있게 미소를 지으며 진심을 전했다.
우리는 지금 같은 배를 타고 있어——이건 너한테 손해 없는 거래야.
아, 그러고 보니…… 가브리엘이 엉망으로 부서진 이합 생물들을 복구하는 것도 봤어. 그 기술은…… 정말 기가 막히던데.
하이디는 고개를 들어 롤랑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금빛 눈동자에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가브리엘이 저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준 적이 있어요.
탐욕스러운 모험가들이 땅속의 보물을 훔칠 때, 잠자고 있던 악마가 깨어나 인간의 탐욕과 나약함을 보고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기로 결심했대요.
응?
알고 있어. 그 인간들은 너희들이 데려온 ‘모험가’ 배우잖아. 그리고 탑 안의 모든 것은 ‘모체’를 위해 만든 연극이고, 안 그래?
……그럼 나도 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인가?
가브리엘의 말은 ‘어머니에게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 줄 겁니다.’라는 거였어요.
가브리엘은 당신이 사냥하는 쪽이라고 말했죠.
롤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큰소리로 웃었다.
내 입장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정말 고마운 걸.
제가 가브리엘의 기록을 보여드리는 것이 더 빠를 수 있겠네요.
하이디는 롤랑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인터페이스 확인<<데이터 복구<<
완료<<실행 대상자 신원 확인<<완료
데이터 재생 완료. 정지 전 마지막 명령을 실행합니다.
데이터 기록이 전자 스크린에서 순차적으로 재생되었다. 이것은 가브리엘이 이중합 코어의 조각을 발견한 것부터 그가 멈출 때까지의 모든 기록이었다.
기%……¥#록&*%@#¥%중:
개체 %¥알파&……의 파괴로 온몸이 모두 훼손되었다.
공격 가능 수단은 0이며 논리 사고 회로도 곧 작동이 중단될 것이다.
¥%예비 메모리 블록&%으로 전환한다.
메모리 회로는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므로 적절히 분석하면 실험의 완전한 기록을 얻을 수 있다.
퍼니싱 진화의 궁극적인 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다행히 그분의 약속으로 내가 완료하지 못한 일은 분명 계속될 것이다.
제가 고연화 개체가 있는 위치를 표시했고 하이디가 제 실험을 이어받을 것이다.
온몸이 다시 해체된 뒤 그런 자아들이 승격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일찍이 전자 대뇌의 데이터는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가…
알코올이 가득 든 유리병이 몸 위에서 깨졌을 때,
뜨거운 담배꽁초가 껍데기를 태울 때,
머리가 더러운 바닥에 여러 번 짓밟혀 일어설 힘조차 없어서 환호와 기쁨 속에서 떨고 있을 때,
무언가가 프로그램의 속박을 깨뜨렸다.
무기력, 증오, 달갑지 않은 감정과 광기. 사고 회로는 이런 무의미한 것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삭제된 쓸모없는 기억 데이터가 지금 다시 나의 전자 대뇌로 돌아왔지만 이제 오류의 원인을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몸을 승격 네트워크에 바치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기록 중단.
그 뒤로 들리는 것은 불규칙한 잡음뿐이었다.
스크린이 어두워지면서 ‘종료’라는 빨간 표시등이 어둠 속에서 깜빡거렸다. 그건 마치 미친 순교자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가면 속 꺼지지 않는 붉은 눈처럼 보였다.
하이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생되고 있는 기록을 종료했다. 그녀의 시선은 기록에 머물지 않고, 조용히 롤랑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가브리엘이 남긴 모든 데이터예요.
참…… 죽기 전까지 이렇게 집착하는 녀석은 보기 드문데.
퍼니싱 의지의 진정한 중합이라, 이 모체에 있는 것이 나방 여왕보다 훨씬 더 까다로워 보이네.
하, 솔직히 말해서 난 이런 거에 호감을 가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엔 공중 정원이 좀 바빠지겠는데? 이건 그들의 눈 밑에서 일을 벌이기 딱 좋은 기회니깐.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말투였지만, 가늘게 뜬 롤랑의 두 눈은 깊은 연못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 가브리엘의 실험에서 기록되지 않은 세부 사항을 알려주세요.
물론 알려줘야지.
난 약속은 잘 지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가브리엘의 ‘마지막 유언’은 뭐야?
하이디는 말없이 다른 데이터 파일을 열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죽음의 천사가 종말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부는 모습이 연상됐다.
‘이것은 고위의 의지에서 나온 선별이며,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퍼니싱 의지의 진정한 중합이……’
‘곧 탄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