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히든 스토리 / 15 절해성화 / Story
행정부와 후방 지원부의 보급이 차례로 끊기고 의료부 보급품까지 중단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묵묵히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의료부 인원들은 기지의 변두리에 집합했다. 그곳에는 바다로 통하는 출구가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흘러내렸는데 마치 인간들이 곧 맞이할 미래처럼 암울했다.
연구원들은 우산을 쓴 채 빗속에 서 있었다. 라스트리스와 이미 바닷속으로 들어간 라미아가 선두에 있었다.
수면 위의 유일한 광원은 아틀란티스의 건물들이 내뿜는 조명뿐이었다. 불빛은 바람에 흔들리는 반딧불처럼 암담하고 위태로웠다.
라미아, 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어.
우리는 너를 바깥 바다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바깥 세상의 정보를 수집하는 거야. 퍼니싱 재앙이 종료되거나 세계가 평화로워진다면—— 비록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돌아와서 우리한테 알려줘.
네.
……해야할 이야기는 다 했어. 하고 싶은 말 있어?
하고 싶은 말이요? 누구한테요?
라미아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더 할 말이 없는 것 같군.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의료부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의료 부장이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이제 우리가 도울 건 없어. 라미아, 어서 가.
라미아는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은회색 아틀란티스의 꼭대기층은 먹구름과 하나가 된 듯했다.
그녀는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수면 위에 거대한 물결이 일었다.
물결로 인한 파장이 옅어지기도 전에 라미아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그 어떤 미련도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다. 여기가 그런 감정을 가질 만한 곳도 아니었다.
잠시 후.
하, 하.
라스트리스가 곁눈질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왜 웃는 거지?
아닙니다. 그냥 성경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대홍수 사건 후 노아는 우연히 비둘기 한 마리를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가 물어온 올리브 가지를 본 노아는 홍수가 이미 끝났음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방금 전 저희는 저희만의 비둘기를 날려보냈죠.
라미아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고, 우리도 홍수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 없어.
하지만 희망을 남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난 연약한 그 아이가 "사명"을 기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아.
아니요. 아무런 목적 없이 떠도는 것보다 목표가 있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지금까지 자네가 그 아이를 돌봐왔지.
돌봤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지켜본 거죠.
왜? 너에게 임무를 맡긴 적도 없는데? 아니, 네가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맡기지 않았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가 제 앞에서 죽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더군요.
이게 자네가 라미아를 위해 수술을 해준 이유인가?
전부 다 핑계인 건 아닙니다. 저야말로 묻고 싶습니다. 애초에 왜 그 아이를 살리기로 하신 겁니까?
그 아이는 인간이니까.
저도 마찬가지일지도요.
라미아는 결코 똑똑한 아이가 아니야. 아니, 오히려 멍청한 쪽에 가깝지.
네. 반응도 상당히 느리고 아주 감정적입니다. 이성적인 잠재력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체력도 약해 허드렛일도 도울 수 없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꼬맹이를 돌보느라 힘들었겠군.
힘들 것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고를 칠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언젠가 내 사무실로 달려와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어. 엄마의 사진을 주지 않았다고 말이야.
그런 짓을 했다고요? 하긴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죠.
그럴지도 모르지. 난 "정상적인" 인간 사회를 너무 오래 떠나있었어.
이제 "정상"적인 인간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미아에게는 우리에게 부족한 무언가가 있어.
그게 뭐죠?
연약함.
그건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일반인"들이나 가질 수 있는 특성이야. 아틀란티스는 거대한 보루나 마찬가지야. 우린 이곳에서 전사할 각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 하지만 그 아이는…… 그저 우연히 이 전쟁에 휘말린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어. 태어나고 자라는 곳마저 선택할 수 없었지.
처음엔 그 아이를 보면 아틀란티스에 오기 전 포기했던 무언가가 생각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참 이상하지? 멍청하고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지만…… 우린 결국 그 아이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어. 알아서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대부분 인간"들은 다 그럴 겁니다.
이게 바로 아틀란티스를 제외한 세상이 멸망한 이유야.
하지만 저희가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일하는 건 그런 인간들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개조 수술이니 정보 수집이니…… 전부 핑계일 뿐이지?
의료 부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팀장님 눈은 속일 수 없군요.
개조 수술의 유일한 의미는 기지를 떠난 라미아가 퍼니싱에 침식된 세상속에서 살아남는 거야. 개조 수술 말고 라미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스스로 걸어나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해. 얼마나 살 수 있을지는 그 아이에게 달렸겠지.
팀장님은 라미아가 다시 돌아와 홍수가 끝났다는 소식을 알릴 거라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당연하지. 언젠가 퍼니싱 재앙이 끝난다 해도 우린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거야.
하하하, 팀장님에게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라스트리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깊은 눈으로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상대방의 눈동자에는 결연함이 담겨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업무를 계속해야겠어. 더 하고 싶은 말 있나?
의료 부장은 복도 밖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수평선 위에 드리운 구름층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들고 하늘에 은은한 은색 고리를 둘러주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하지만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의 풍경에 진작 질려버렸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보고 싶어.
거대한 압력속에서 몸부림치는 그 아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살아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거구나.
슬퍼할 수 있고 아파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고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거구나.
머리로는 모든 걸 맞이할 각오를 마쳤어.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하지만 저도 그 아이와 마찬가지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함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그저 어쩔 수 없이 "묻어"버렸을 뿐.
라스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해안가에서 한참을 침묵하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는 대서양의 바닷바람에 녹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