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하
윽!
천지가 격렬한 전투로 빛을 잃었고, 붕괴 직전의 법칙으로 인해 만물이 부서지고 재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때 천막을 떠받치던 금빛 옥루도 총탄 속에 폐허가 되었고, 성당의 경이로운 위엄과 장엄함도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법칙은 이 세계를 여전히 구속하고 있었다.
네티아는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네 기사와 그레이 레이븐에 의해 "추기경의 잔해"가 놓여 있던 왕좌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아래에 있는 이들을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제시한 방법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이게 교착 상태를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너희들도 알텐데!
단순히 좋고 싫음만으로 내 계획에 반대하는 건, 오히려 이 잿빛 변방을 파멸로 이끄는 거야.
이 대륙은 정의를 주재할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철저한 변혁만이 필요할 뿐이야.
너희들도 이 비극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됐으면서, 왜...
인간이 긴 계단을 올라가자, 나머지 네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증오를 내려놓으라."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만, 자신의 복수를 위해 다른 이들을 대가로 삼아 이루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릴리스는 가차 없이 꽃패를 네티아의 뒤편, 망가진 성좌를 향해 날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직사각형의 철제 카드가 그녀의 뺨을 스치며 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다들 충분히 얘기했지? 그레이 레이븐, 네티아의 집착은 네가 원인이니까 네가 끝내.
베라는 이 결론 없는 논쟁을 충분히 들었다는 듯, 쌍날 검을 땅에 꽂고는 자신의 피의 맹세자에게 명령했다.
그레이 레이븐, 네가 선택한 대로 하면 돼.
적들은 우리가 옆에서 막아줄게.
칠천삼백사십오, 네티아, 잠들거라.
등불을 든 반즈는 성좌 아래 초라하게 서 있는 마계의 지배자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소용없을 거야. 난 태어나서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으니까...
네티아, 넌 꿈속에서 진정한 너 자신을 보게 될 거야.
반즈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엄숙했고, 저항할 수 없는 냉엄함을 띠고 있었다.
잠들어라.
반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네티아의 몸은 거미줄에서 떨어진 나비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맑은 바람이 들판을 스치자, 풍경소리가 울렸다.
유리색 하늘 가장자리는 눈부신 금빛을 띠었고, 온 세계가 새벽 전의 몽환적인 빛에 잠겨 있었다.
눈을 뜬 네티아는 봄빛 가득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끝없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품에 안았다.
내가... 결국 꿈에 들어오게... 된 건가?
정말... 긴 여정이었어.
네티아는 이 꿈속의 들판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왔다.
미안해. 이 모든 걸 이루기 위해 변명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어.
네티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가장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들을 변명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시련의 마지막에 너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이 낙원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잠시나마 "악마"가 되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모든 고난은 끝이 났다.
마침내 손에 든 낫을 내려놓은 네티아는 순수하고 선량했던 그 소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네티아는 꽃바다 사이를 걸으며 "꿈속에서 만날 수 없었던" 그들을 찾아 나섰다.
이곳이 한때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이라면, 그들을 분명 이 평원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였다.
전설에 의하면 모든 선한 이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고, 세계를 떠난 모든 영웅과 재회할 수 있는 낙토가 바로 수선화 평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만물이 변색했다.
상쾌한 향기가 가득했던 들판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품에 안은 꽃들도 어느새 모두 시들어버렸다.
썩은 꽃줄기에서 핏빛 물이 배어 나오더니, 완전히 성숙한 꽃술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터지며 네티아의 얼굴에 비린내 나는 액체가 튀었다. 그 순간, 그녀는 과거 유사한 순간을 떠올렸다.
네티아가 그 이상한 목소리를 따라 멍하니 돌아보자, 낯익은 형체가 멀리 서 있었다.
이게 바로 네 꿈이야. 그동안 네가 했던 모든 일을 잊은 거야?
피를 갈구하고, 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었잖아. 그게 바로 네 본성이야.
아니. 그렇지 않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을 마주하게 된 네티아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 잊은 거야? 그럼, 내가 전부 기억나게 해줄게.
어린 "네티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자, 세계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강제로 다른 방향으로 "왜곡"됐다.
잠깐, 꼬마 아가씨, 내 말 좀 들어봐! 난 저놈들이랑은 달라!
그래, 난 억지로 한 거라고! 방금 네 엄마를 죽인 건 고의가 아니었어. 나도 집에 딸이 있는데, 저놈들이 내가 일 처리를 제대로 안 하면 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단 말이야.
"더 많은 사람을 해칠 기회를 줄 수 없다."라고 했었나?
좋은 가르침이었어. 잘 배웠으니, 이제... 그대로 돌려줄게.
으아아아아아악!!!
너희들은... 왜?
왜 이 아이를 건드린 거지?!
절대 용서 못 해. 지옥에 가서라도, 네놈들의 영혼을 영원히, 끝없이 사냥해 주마!
이 삼계 어디에도, 네놈들이 편히 잠들 곳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네티아는 "제삼자"의 시점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때, 네티아의 얼굴은 줄곧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비통함이 아닌, 운명이 자신에게 가한 불공정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살육에 빠져든 표정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남을 계속 모방하다 보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어린 "네티아"가 한 걸음씩 다가왔고, 그녀가 과거에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써왔던 모든 변명은 또 다른 "자신"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겨지고 말았다.
안타깝네. 하지만 넌 여기 영원히 머물 수 있어.
넌 악마야. 네가 그럴듯하게 인간을 구한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네 위선적인 죄악의 쾌감을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잖아.
내가 제안 하나 할까? 예를 들어... 그 "피의 맹세자"만 죽이면, 네 기사도 사라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야.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어린 "네티아"의 치맛자락이 비린내 나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광경 속에서도 "진실된" 미소라 할 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티아, 내가 바로 "너"인데, 왜 네 영혼의 본질을 부정하려고 해?
"역병"의 안내에 따라 인간은 네티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그녀의 꿈으로 들어갔다.
"검은 동굴"을 빠져나오자, 그레이 레이븐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성채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서 "강철의 눈물"과 대치했던 그 광경과는 달랐다. 이곳은 더 오래되어 보였고,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더 느껴졌다.
그레이 레이븐... 강철 군단의 총사령관.
그레이 레이븐이 고개를 들어보니, 네티아가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부평초처럼 공중에 떠서 잠든 "자신"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와 같은 "인간"이 되려 한다면...
나도 이런 장면을 꿈꿀 수 있을까?
네티아가 손을 들어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럼, 너와 같은 "인간"이 되도록 노력할게.
멀리서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인간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것을 연결 지었다.
그레이 레이븐, 그 질문의 답은 너 스스로 찾아야만 해.
대체 무엇이 한 악마의 영혼을 뒤흔들어, "좋은 이"가 되고 싶게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자격을 너에게 넘겨줄게.
그레이 레이븐, 안돼. 제발, 간청할게.
이제야 알겠어. 이 세계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되는 건, 너 같은 "인간"이라는 걸...
아니면...
예전처럼 자신을 희생하면 이 세계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맞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네티아의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구나.
꿈의 다른 한쪽 끝에서 칠흑같이 검은 까마귀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그 까마귀는 성채 중앙의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까마귀의 목소리와 말투는 인간이 알던 그 마법의 펫 까마귀와 똑같았지만, 태도는 예상 밖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인간이 망설이며 물었다.
내가 몰리간이긴 한데, 네가 아는 그 몰리간은 아니야.
인간의 말을 들은 까마귀는 고개를 저었고, 인간은 까마귀에게서 이런 침착함을 본 적이 없었다.
난 네티아가 과거에 알았던 그 "악마의 영주 몰리간"이야. 그녀의 인식 속에서는 단순히 기억이 쌓여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라, 외부에서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
하지만 이 꿈속에서만큼은 전지전능해.
왜? 이미 봤잖아. 그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뼛속까지 악마야. 그저 힘과 살육으로 모든 걸 정복하는 길만 알고 있지.
널 모방해서 "좋은 이"가 되려고 했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은 결국 네가 처음 죽은 뒤로 크게 갈라져 버렸어. 그리고 아직도 그 간극을 스스로 메우지 못하고 있어.
인간인 넌 네티아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없어. 그리고 수없이 그녀의 등대가 될 수도 없어.
그레이 레이븐, 넌 그녀의 망상 때문에 과거에서 나타난 "유령"에 불과해.
호오~
내게서 답을 기대하지 마. 난 이런 감상적인 대사를 제일 싫어하거든.
몰리간이 날개를 펄럭이며 인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들이 성당의 폐허가 된 정원에 온 이후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다시 느끼는 함께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쓸데없는 말은 이쯤하고. 내가 널 네티아가 있는 곳으로 보내줄 테니,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
이 몸은 바빠. 게다가 이 불안정한 꿈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건, 다 내가 유지하고 있어서라고.
까마귀가 인간을 흘겨보았지만, 목소리에는 그다지 꾸짖는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살짝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이 묻어났다.
아,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 진지하게 경고하나 하지.
몰리간이 말을 마치자마자, 둘 앞에 블랙홀 같은 큰 구멍이 갑자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인력이 새어 나오며, 이 꿈을 모두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건 바로...
그레이 레이븐은 준비도 못한 채, 까마귀에게 한 대 맞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앞으로 함부로 내 이마를 툭툭 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그 짧고도 긴 "추락" 속에서 인간은 네티아의 "기억" 속을 계속 항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소녀가 당당히 살아갈 권리를 얻기 위해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마녀"로 즉위하는 모습을 보았다.
추락의 끝에서 인간은 다시 그 꽃바다로 돌아왔다.
누런 수선화가 피로 얼룩진 들판에서 흔들렸고, 비린내 나는 바람이 시든 꽃잎들을 몰고 왔다.
네티아는 더러워진 수선화 평원의 한가운데에서 엎드리며 무릎을 꿇었고, 그 아래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시체가 있었다.
인간은 그 시체의 주인을 알아볼 수 없어야 했다. 그리고 네티아의 얼굴은 어떤 강렬한 감정에 이끌려 완전히 할퀴어져 있었다. 하지만 시체가 입고 있는 수수한 교복을 보는 순간, 인간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
네티아는 고개를 들어 꽃바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인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던 것 같아.
난 정말 힘으로만 모든 걸 해결하려 했어.
"그녀"가 내 의식을 빼앗아 너희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 내 몸이 생각보다 먼저 반응해 버렸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손에 피가 가득했어.
인간은 꽃줄기를 헤치고 오느라 온몸이 피로 얼룩진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뒤늦은 답을 했다.
무엇을 위해서?
인간은 네티아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
네티아가 눈을 감자, 수천수백 가지의 가능성이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그녀는 이 대륙의 모든 "미래"를 보게 됐다.
네티아는 모든 미래를 보았지만, 동시에 그 미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절망"도 깨달았다.
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심혼에 남은 잔념이 또렷한 잡음이 되어 네티아의 귓가에 울렸다.
네티아, 이게 네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결말이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넌 과거로 돌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예전의 모습이 될 거야.
희미한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며, 네티아가 겨우 피워올린 희망의 불씨를 어둠 속으로 다시 밀어 넣으려 했다.
두 번째로 눈을 뜨자, 네티아는 다시 그 익숙한 파란 하늘을 보게 됐다.
인간은 네티아 앞에 서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밝은 대낮이 들판을 비추며, 네티아는 다시 한번 수년 전 밀밭에 누워 상상했던 그 "아름다운 꿈"을 떠올렸다.
이번에도 백일몽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손에 닿을 수 있는 미래였을까?
네티아는 알 수 없었지만,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은 너무나도 진실했다.
나는...
그렇다. 네티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네티아는 너무나도 긴 잘못된 길을 돌아왔을 뿐이었다.
확고하고 부드러운 힘이 네티아의 몸 안에 가득 차오르자, 그녀는 인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 함께 바꿔나가자.
그레이 레이븐, 네가 선택한 그 미래로 날 데려가 줘.
수년이 지난 후, 잿빛 변방의 사람들은 "영겁의 대낮"을 끝낸 그 긴 밤을 "새벽녘의 전야"라고 불렀다.
그 긴 밤에 모든 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아름다운 꿈에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부드러운 햇살이 하늘을 가르며 들어왔을 때, 그들은 모두 놀라운 기쁨을 발견했다.
담황색 따스한 햇살이 저 멀리 지평선에서 떠올랐다. 지금은 평범해 보이는 이 광경이 그때는 30년 만에 인간의 곁으로 돌아온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달려가 알렸다. 그렇게 모두가 지고천이 마침내 자비를 베풀어 이 대륙에 연민을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영겁의 대낮"과 함께 사라진 것들이 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어둠을 다스리는 마계의 지배자 네티아 그리고 성당의 천사들과 지옥의 악마들이었다.
추기경과 죽음의 군주의 권력을 찬탈한 그 마녀는 신격을 얻은 후, 왜 그랬는지 수천수백 개의 성문을 동시에 열어 천사와 악마들을 우주 깊숙이 보내버렸다.
그리고 성문이 닫힌 후에는 폐허가 된 정원 전체에 있던 그림자가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대륙 전체에 이름을 떨치며 그들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그레이 레이븐과 천계의 네 기사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레이 레이븐과 네 기사는 중생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자신을 희생해 마계의 지배자 네티아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는 전설이 변방에 이내 퍼져나갔다.
성냥 사세요. 아주 싼 성냥이에요. 이리 와서 한번 보고 가세요!
수년 후,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밤, 가여운 한 소녀가 길모퉁이에 웅크린 채 손에 든 물건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빠서 모퉁이에 소녀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이의 아주 작은 외침은 더더욱 들리지 않았다.
성냥... 됐어. 오늘은 그냥 일찍 집에 가야겠다.
한숨을 내쉰 여자아이는 차가운 손바닥에 하얀 입김을 불어 넣으며 이미 얼어버린 열 손가락을 녹이려 했다.
갑자기 어떤 형체가 여자아이 앞에 나타났고, 고개를 들어보니 회색 후드를 쓴 이가 가판대 앞에 서 있었다.
후드를 쓴 이의 이목구비는 후드를 깊게 쓴 나머지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콧등에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게 보였지만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이 도시는 어쩜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
설마 천사들만 떠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조급해하지 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하암... 오늘 눈이 많이 오네. 이 성냥은 내가 다 살게. 어서 들어가.
후드를 쓴 이의 뒤로 그를 따르는 몇이 수다스럽게 떠들고 있었고, 여자아이가 반응할 틈도 없이 손바닥에 묵직한 맘몬 코인 주머니가 쥐어졌다. 그러고는 가판대의 성냥이 모두 의사처럼 보이는 남자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잠, 잠깐만요. 손님. 너무 많이 주셨어요.
후드를 쓴 이가 맨 뒤에서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앞서 걸어가는 다섯 형체는 여전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주전과 그 별문들이 함께 떨어진 곳을... 지금 사람들은 "성당의 폐허가 된 정원"이라고 부른다고?
어. 지금 빨리 가면 큰 눈이 길을 덮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저게 떨어지고 난 뒤에 왜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을까요?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부드럽게 할 걸 그랬네요.
그레이... 아니. 지휘관, 가는 길에 뭐 가져갈 거라도 있어?
알았어.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고, 그들의 목소리도 점차 날리는 흰 서리 속으로 사라져 더 이상 메아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영웅을 이끄는 한... 그리고... 네 기사...
마지막엔 세계를 파괴하려던 어둠을 다스리는 마계의 지배자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
설마... 그냥 아이들을 달래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거야.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의 영웅 전설을 모두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인간은 깨끗한 수선화 한 송이를 깨진 벽돌과 기와로 만들어진 "묘비" 위에 올려놓고, "성좌" 위에 맺힌 흰 서리를 살며시 털어냈다.
성당의 주전이 떨어져 생긴 이 "묘지"는 평소에도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마계의 지배자 네티아가 언젠가 지하 세계에서 돌아올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발적으로 이곳에 가까이 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가냘프고 연약한 수선화가 홀로 눈보라 속에서 피어나면서 얼음 고드름에 계속 흔들렸지만, 끝내 꺾이지는 않았다.
그레이 레이븐, 그 여인 말이야... 네티아가 정말로 떠났다고 생각해?
베라가 벽에 기대서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따뜻하고 미약한 떨림을 그레이 레이븐이 절대로 착각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이 네티아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그 후 그녀는 "추기경"과 "마계의 지배자"의 권능을 내려놓는 대가로 성당의 모든 별문을 열게 된 거잖아요.
게다가 당시는 연이은 전투 후라 네티아에게 남은 힘도 얼마 없었을 텐데...
그때, 인간이 네티아를 꿈에서 깨워낸 후, 그녀는 곧 자신의 권능으로는 더 이상 법률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네티아가 강제로 "뒤섞어 놓은" 삼계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천사와 악마를 모두 이 잿빛 변방에서 추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그저 잠깐 여행을 다녀올 뿐이야.
모든 힘을 거두어들인 네티아는 인간의 손을 놓아주며 홀로 우주 깊숙이 열린 "별문" 저편으로 걸어갔다.
이 "심장"도 네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러면 혼자 가기엔 역시 좀 외로울 것 같아.
네티아의 형체가 조금씩 "별문"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얀 빛에 잠겼고, 그녀는 이 찬란함 속에서 수선화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네 "마음"을 계속 간직하게 해줘.
그리고 다음에는 꼭 운명보다 더 빨리 다시 한번 날 찾아와 줘.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알겠어? 어쩌면, 네티아는 이 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그저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걸지도.
와타나베의 말이 인간을 생각에서 끌어냈고, 초점 없던 시선이 서서히 앞에 있는 하얀 수선화로 돌아왔다.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베라가 살짝 웃으며 벽에서 몸을 일으켜 먼저 걸었다.
릴리스가 월산을 펼치며 그 뒤를 따랐다.
반즈는 등불을 들어 일행의 앞길을 밝혔다.
그럼, 가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짧은 휴식을 마친 그들은 자신들의 긴 저항의 길을 계속 걸었다.
이 길은 분명 가시덤불로 가득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전진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승을 버린 그들의 굳건한 "사명"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신도, 천사도 없는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어. 메리 크리스마스.
희미하고 가느다란 축복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고, 인간이 소리를 따라 돌아보았지만 하얀 눈밭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는 그 설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렇게 천천히 걸으면, 너 버리고 우리만 갈 거야.
이 말을 들은 네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