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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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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썩—

목에서 솟구친 피가 다음 사람의 얼굴에 튀었다.

뜨거운 자극에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알아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말할 테니까 제발 죽이지 마세요!!

말을 잘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 따위 없어.

붉은 그림자가 무심하게 검을 만지작거리며,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앞에서 세 번째 시체를 갑판 아래로 걷어찼다. 거친 파도가 순식간에 그의 흔적을 삼켜버렸다.

그 광경을 본 남자는 목에 든 칼이 두려워서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그녀도 쿠로노를 배신하고 다이달로스로 도망쳤어요.

처음에는 다이달로스에서 멀쩡하게 지냈어요. 임무도 잘 수행하고... 전혀 문제가 없었죠.

그래서 아무도 그녀가 "복수"하러 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저조차도 몰랐다고요!

남자는 뭔가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녀가 저한테만 "내일은 출근하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 말을 듣자마자 불길한 느낌이 들었어요!

널 꽤 믿었나 보네.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녀가 당신과 수행했던 "열쇠" 찾기 임무는 전부 거짓이었다고 고백하더군요.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이었고, 진짜 "열쇠"는 이미 다이달로스가 가져갔다면서...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어요.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성공했어요! 다음 날 바로 행동에 옮겼고, 당신들을 해친 책임자를 처단한 뒤, 진짜 "열쇠"를 가지고 사라졌어요! 심지어,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날 그녀의 말을 듣고 출근하지 않은 바람에, 모두가 저를 범인으로 의심했어요! 그녀가 저를 믿었다고요? 전혀요! 분명 절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한 거라고요! 그때는 정말 바보같이 그녀를 믿었는데... 제가 멍청했죠!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013팀 사람들은 다 쓰레기였어요! "하운드"!

...

붉은 그림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한 이야기는 이제 충분했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많이 떠들었는데, 결론은 한 마디네. 너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거.

아니, 아니요! 정말로 알고 있다고요! 제대로 된 사람한테 물어보신 거예요!

저는 예전에 쿠로노에서 구조체 정비를 담당했었고, 그녀와 매우 친했어요. 심지어 그녀의 몸에 위치 추적기도 설치했었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

팔이 단단히 묶인 남자는 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섬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기 저 외딴섬 아닌가요?

오? 그럼 제대로 찾아왔다는 거네.

잠깐... 아니, 잠깐만요! 그녀가 저 섬으로 도망갔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냥 절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고... 아니면... 처음부터 절 죽일 생각이었나요?!

원래는 그냥 그녀의 행방을 확인하려고 널 찾아온 거였어.

근데 방금 알았네. 그때 그 추적기가 네 짓이었다는 사실을.

네가 직접 말했잖아. 그 임무가 "013팀을 망쳤다"라고. 그럼 너도 알고 있었겠네. 네가 013팀을 죽인 살인자 중 한 명이라는걸.

이 세월 동안 잘도 숨어 있었네.

제...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충분히 들었어. 여기까지야.

진실을 깨달은 남자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 붉은 피가 흩뿌려지면서 그의 비명도 바다 위로 사라져 갔다.

곧이어 들려온 갈매기 울음소리가 베라에게 목적지인 섬이 바로 코앞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베라는 눈부신 햇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가까워지는 목표물을 응시했다.

흥, 이게 너희들이 말하는 "정토"야?

베라는 013팀의 구조체가 이 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여준 그 동경 어린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곳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했고, 심지어 환상을 덧붙여가며 이곳을 극락의 "정토"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허황한 것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꽉 붙잡고 있다 한들, 현실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

그들이 포위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벙커

무슨 소리지?

죄... 죄송해요... 제... 반려 로봇이에요.

그때, 쿠로노 특별 작전팀 소속인 013팀은 지친 난민들을 이끌고 방어 작전을 막 끝낸 참이었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언제 또 침식체의 습격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말 못 하는 소녀는 어설프게 발성 장치를 만지작거리며, 베라의 휴식을 방해한 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또 무슨 "말" 하려는 건데? 설마 또 그 아름다운 고향 얘기?

이런 상황에서도 "한가하게" 그런 소리나 하고 있네.

베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어두운 벙커 안에서 반려 로봇 스크린에 글자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전부 그녀가 써 내려간 아름다운 고향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소엔 눈길도 주지 않던 베라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그녀가 그렇게 자주 "자랑"하던 고향이 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그러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반려 로봇

<i>"우리 집 앞에는 해변이 있었어요. 우리는 그곳을 '무지개 해변'이라고 불렀죠."</i>

<i>"'무지개 해변'은 수심이 얕은 바다였어요. 밀물 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고기가 헤엄쳤고, 썰물이 되면 그 아래의 산호들이 모습을 드러냈어요."</i>

<i>"알록달록한 산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죠."</i>

몇 줄 훑어보고는, 베라가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냥 평범한 거지... 이런 걸 기록해서 뭐 하겠다는 거야.

중... 중요해요!

소녀가 온몸으로 자기가 섬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운 좋게 쿠로노의 개조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고향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곳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가 영영 사라질 거라고 했다.

언젠가는 퍼니싱 재난이 끝날 것이고, 그때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하하, 정말 순진하기도 하지.

퍼니싱이 전 세계를 휩쓸었어. 누구도 이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그 조그만 섬도 예외일 리 없지.

네가 말한 그 풍경들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어쩌면 네가 말하는 그 "무지개 해변"엔 네 고향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지도 모르지.

...

베라.

어머, 우리 착한 대장이 또 좋은 사람 코스프레 하시려나?

도대체 얼마나 더 고민해야 제대로 된 작전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궁금하네.

베라

BPN-13

베라, 번호 BPN-13, 쿠로노 소속의 보조형 구조체.

황폐해진 전장에서 쿠로노가 "발굴"한 독특한 구조체다.

베라는 직접 산더미처럼 쌓인 침식체의 잔해들을 쿠로노에 바쳤고, 그것이 가장 좋은 항복 문서가 되었다.

그때부터 베라는 쿠로노의 소유물이 되었다.

다만... 이 "소유물"은 누가 봐도 말을 잘 안 듣는 성격이었다.

베라,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쳇.

진지한 대장이 불만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베라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 부대의 "우애"에 베라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흥, 다들 쿠로노에게 길든 구조체들이면서 착한 척은.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에 다른 소대랑 경쟁하는 임무가 아니라는 거야.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래 갇혀 있는 동안 다들 진작에 본색을 드러냈겠지.

단체행동을 싫어하는 건 알겠지만, 이건 명령이야. 따라야 해.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혼자 "열쇠"를 가지고 돌아가서 단체행동 면제라도 신청해 보든가.

...

3일 전, 쿠로노 특별 작전팀 소속의 구조체 소대가 해안가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의 임무는 "열쇠"를 찾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쇠"는 정체불명의 권한이었다. 한때 쿠로노가 가지고 있었지만, 퍼니싱이 폭발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졌고,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 이 암시장이었다.

세상 끝자락에 있는 이 암시장은 여과탑의 보호 덕분에 퍼니싱의 침식을 피할 수 있었다.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고, 임무도 얼핏 보기에는 단순해 보였다. 적어도 이 세 명의 소대 대원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쇠"를 손에 넣은 바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 끝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퍼니싱 재난이 확산하고 있다며 비명을 지르면서, 마을의 마지막 피난처인 벙커로 도망치려 했다.

침식체의 수가 너무 많아서, 구조체 셋으로도 돌파할 수 없는 규모였다. 이런 예상 밖의 상황에서 결국 그들도 인파에 휩쓸려 벙커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지금까지, 연이은 방어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다.

벙커에 물자가 꽤 많이 남아있네. 여기 사람들은 그래도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군...

베라... 좀 도와줘. 부상자들을 후방으로 옮겨서 한꺼번에 치료해야 해...

대장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동안에도, 베라는 "배신자"에 관한 자신의 비밀 임무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두가 지하에 갇힌 상황에서, 더 이상 질질 끌 수는 없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걸까?

계속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상부의 암시대로 깔끔하게 처리해 버릴 것인가...

"하운드", 내 말 듣고 있어?

"비밀 임무"의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베라도 순간 움찔했다.

멍하니 있지 말고 움직여. 여기 구조체는 우리 셋뿐이야. 며칠째 굶은 난민들더러 부상자를 옮기라고 할 거야?

...

마침 잘 왔네. 물어볼 게 있어.

?

"열쇠" 어딨어?

뭐라고?

방금 네가 말했잖아. 자신 있으면 혼자서 "열쇠"를 가지고 돌아가 보라고. 지금 네가 갖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리 내.

진심이야? 이게 명령 위반이란 걸 알고는 있어?

명령 위반 같은 소리 하지 마. 쿠로노의 규칙은 적자생존이잖아. 난 그저 네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거야.

베라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어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모두가 소대 내에서 뭔가 미묘한 불협화음이 서서히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베라, 경고하는데. 더 이상 말로 분란을 일으키지 마.

철컥.

"어이"는 칼까지 뽑아 들며 베라를 경계했다. 베라가 반년 전 013팀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이"의 얼굴에서 자주 보던 표정이었다.

베라의 예상대로, 그 경계심은 여전했다.

그래서 다들 너랑 한 팀이 되면 재수 없다고 했나 보군.

나만 그런 것처럼 말하지 마. 그 성모 같은 말 못 하는 소녀 빼고, 013팀에 온 놈들 다 문제 있는 애들이잖아.

너도 "전적"이 화려하잖아? 네가 지휘하던 소대는 네 잘못된 판단으로 전멸했다면서? 그런데도 뻔뻔하게 대장 노릇하고 있어?

그건 특별 작전팀 내부의 악의적인 경쟁 때문이야! 내 대원들은 다른 팀의 음모에 당한 거라고!

됐어. 너한테 이런 얘기 해 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 넌 이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어차피 넌 자기 대원도 해칠 수 있는 녀석이잖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번 임무 때 너의 대원들이 전부 죽지 않았어? 그것도 침식체한테 당한 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말이야.

? 하하.

베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에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는 "경계심"뿐만 아니라 "편견" 또한 그들의 관계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순간, 베라는 칼을 뽑아 그대로 찔러 들었다.

맞아, 내가 죽였어! 그런 쓰레기들을 살려둬서 뭐 하게?

쨍! 둘의 무기가 거의 동시에 부딪치며 귀를 찌르는 소리를 냈고, 구석에 있던 난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난민들은 두 구조체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두 마리 광견의 격렬한 싸움 속에서 먼지가 날아올랐고, 그 사이로 베라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보였다.

먼지가 가라앉고, 이 소대 내의 싸움은 마침내 승부가 갈렸다.

베라가 "어이"를 바닥에 눌러 붙인 채, 아름답지만 도발적인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어이"의 귀에 속삭였다.

베라

난 너 같은 겁쟁이가 제일 역겨워. 여러 가지 의미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감아줄까 했는데.

어이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베라가 "어이"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베라

얌전히 굴어. 약점 잡히고 싶지 않으면.

"어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즉시 반격했다.

베라

아직도 덤빌 거야?

베라는 일어서서 "어이"의 몸을 세게 밟고는, 칼을 들어 찌르려 했다.

베... 르! 베... 르! 그만, 해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작고 마른 그림자가 튀어나와, 서툰 말투로 말리며 베라 앞으로 뛰어들었다.

베라의 동작이 멈칫했고, 그 순간 "어이"가 칼을 들어 베라를 향해 찔렀다.

비켜! 이 녀석이 누군지 네가 알기나...

으윽!

진짜 승부는 그때였다. 소녀가 베라 앞을 막아섰고, "어이"의 칼은 베라 대신 그녀의 팔을 베고 말았다.

싸우던 두 사람은 동작을 멈추고, 충격에 빠진 채 똑똑 떨어지는 순환액을 바라보았다.

...

...

바보야? 왜 끼어들어서는!

"어이"도 창백한 얼굴로 일어났다. 방금 베라가 귓속말로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맞다. 그녀에게도 비밀이 있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비하면 이 소대도, "열쇠"를 찾는 임무도, 곧 퍼니싱의 위기에 함락될 이 마을까지도... 전부 중요하지 않았다.

음... 괜... 찮아요.

어서 붕대 감아! 저기 의료 상자가 있어!

아푸... 지, 아나요.

뭐라고?

"어이"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재빨리 의료 상자로 달려가 붕대를 찾아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이 둘은... 그냥 짐 덩어리일 뿐인데... 오히려 방해될 텐데...

"어이"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 아프지 않다고 했는데...

하지만 결국, "어이"는 인간이 사용하는 거즈를 들고 돌아와, 소녀의 상처를 꼼꼼히 감아주며 단단히 조였다.

네가 다칠 줄은 몰랐어...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 미안해.

베라는 "어이"가 허둥지둥 물품을 찾으며, 연신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 말 없이 소녀의 상처를 누르고만 있었다.

말 못 하는 소녀는 미안해하는 대장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대신해 "말하는" 반려 로봇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i>"괜찮아요. 제 통각 모듈은 거의 작동하지 않아서 아프지 않아요."</i>

말 못 하는 소녀는 인간이었을 때부터 통각 결핍 증상이 있었다. 개조된 후에도 통각 모듈의 임계치가 매우 높아서 불나방처럼 완벽한 선봉대원이었다. 이 정도의 상처는 그녀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안해.

"어이"는 배신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이"는 사과했다. 아마도 자신의 동료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쯧.

베라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고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라는 진심으로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의 반응에 날카롭게 곤두섰던 마음이 어느새 조금씩 누그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실토할 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이"는 베라의 추궁하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3일째 벙커에 갇혀있었다. 생존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쿠로노를 탈출하겠다는 희망은 더욱더 희박해졌다.

"어이"는 베라가 어떻게 자신의 도주 계획을 눈치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갇혀있다 보니, 왠지 모르게 자신의 비밀이 들통난 것조차 짜릿하게 느껴졌고, 묘한 흥분감마저 들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고백해야 할까?

그 이기적인 욕망을 털어놓아야 할까?

나는...

삐———!

갑자기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포위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화는 여기서 강제로 끝나버렸다.

침식체들이 또 허술한 방어선을 뚫으려 하는군.

...

자리에 앉아서 서로에게 솔직해질 시간은 이제 없었다. "어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작전 기록 장치를 꺼내 들고 그것을 향해 말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어이"는 부대를 이끌어야 했다.

이제부터 쿠로노 특별 작전팀-013팀의 최신 작전을 기록한다.

고립된 지 <color=#ff4e4eff>3일째</color>, 아직도 본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지금 또다시 침식체 무리가 몰려왔다. 우리는 침식체를 전력으로 저지하고, 임무 목표물인 "열쇠"를 우선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난민 구조도 시도할 예정이다.

임무 수행 멤버: 대장 "허밍버드", 선봉대원 "모스", 지원대원 "하운드".

"모스"가 다쳐서, "하운드"가 임시로 그녀의 선봉 자리를 대신한다.

기록을 마친 "어이"는 작전 기록 장치를 내려놓고 두 대원을 바라보았다.

가자, "하운드". 이건 우리의 임무야.

내 코드네임이 이렇게 싫어 본 적 처음이야. 진짜 개처럼 부려 먹고 있잖아.

"하운드"-베라는 짜증 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칼을 들고 마지못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됐어. 너희들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내가 지은 별명으로 부르면 되지. 공평하잖아.

...

베라는 말 못 하는 소녀를 뒤쪽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대장 "어이"의 뒤를 따랐다.

동료를 실수로 다치게 한 일은 "어이"에게 꽤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지하에 오래 있어서 의식의 바다가 혼미해진 것 말고는, 베라는 "어이"가 이렇게 넋이 나간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베라는 갑자기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벙커 천장에 틈이 보였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셨다.

...

베라는 자신에게 내리쬐는 햇빛을 어루만지듯 손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벌써 정오가 됐나?

벙커에 너무 오래 있었다. 난민들이 하나둘씩 죽어가지 않았다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오직 말 못 하는 소녀의 반려 로봇에 표시된 날짜만이 오늘 며칠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이곳에 갇힌 지 벌써 <color=#ff4e4eff>30일</color>이나 지났다.

베라는 아직 "어이"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어떻게 살아남을지만 고민했다. 가능하다면 임무까지 완수하고 싶었다.

같은 정오, 똑같이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파도가 거품과 함께 흠뻑 젖은 인간 한 명을 해변으로 밀어 올렸다.

인간은 부유하는 꿈속에 잠겨 있었다.

불현듯 선명한 붉은 모습이 눈앞을 스치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꿈같지는 않았다. 이건 마치... 잃어버린 기억같이 너무나 생생했다.

??

머리가 아직도 아파?

??

혈종이 가라앉지 않는 한, 이 빌어먹을 상태가 계속되겠지...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뻗어 "그림자"를 붙잡으려 했다. 손끝에 다시 느껴진 익숙한 비단결 같은 감촉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

쯧, 내 머리카락에 대체 무슨 집착이 있는 거야? 손 놔.

안 들려? 놓으라고.

됐어, 그냥 손을 잘라버리자.

엄청난 압력이 얼굴을 강타해서, 본능적으로 손을 놓아버렸다.

철썩...

또다시 파도가 얼굴을 때렸다.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 속에서, 물에 빠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인간은 눈썹을 찌푸린 채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리고 힘겹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버려진 섬처럼 보였다. 섬에 있는 건물들은 비바람과 햇빛에 심하게 침식되어 있었고, 벽면의 페인트도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

호기심 많은 갈매기 외에 다른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물에 잔뜩 젖어 무거워진 외투를 벗자마자, 자신의 모든 장비가 털린 것을 발견했다.

리가 준 특별 위치 추적기마저 사라져 버렸다.

상대방은 신중한 행동 방식과 더불어, 공중 정원 제복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장비를 확인한 후에야 인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베라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그때, 베라가 몸을 숙여 이번 작전의 기밀 사항을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었다.

잘 들어, 이번엔 그레이 레이븐 멤버가 너랑 같이 가지 않을 거야. 임무 등급이 그리 높지 않아서 "보모"들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어.

쿠로노의 비밀 임무라고는 해도, 핵심 목표는 그저 "열쇠"를 찾는 거야. 그리고 거래를 성사해서 "보물 상자"의 위치를 알아내면 돼.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는데, 네 임무는 얌전히 미끼 노릇을 하는 거야.

고기를 잡으려면 미끼를 버려야 하듯이, 계획대로 너 자신을 "팔아넘기기만" 하면 나머지는 술술 풀릴 거야. 알겠어?

당연히 없지.

베라는 인간이 무표정한 얼굴로 전혀 겁먹지 않은 모습을 보고는 시시하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강아지 제법 똑똑해졌네? 됐어, 더는 안 놀릴게.

자, 아~ 해봐.

베라는 인간의 양 볼을 잡고 반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뒤, 치아 뒤쪽에 아주 작은 위치 추적기를 심었다.

으응, 됐어... 됐어, 곧 끝날 거야.

베라는 쓸데없이 "달래는" 척하며, 인간의 송곳니를 살짝 긁어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치아 상태가 좋네.

그렇게 물어뜯을 것처럼 쳐다보지 마. 이건 꼭 필요한 절차라고.

전에 너한테 준 호루라기는 아마 쓸 일이 없을 거야. 연습했던 휘파람 신호는 기억하고 있지?

좋아. 때가 되면, 네가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판단될 때 날 부르면 돼.

바로 나타날 테니까.

인간은 겨우 해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대로 서기도 전에 멀리서 몇 명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오로라 부대의 휘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해변에 홀로 서 있던 인간은 동료들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끝내 그 충동을 참아냈다.

바닷바람이 부는 가운데, 온몸이 흠뻑 젖은 인간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자신에게 그들을 위협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로라 부대 멤버들은 아무 말 없이 아직 허약한 상태인 지휘관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린 뒤, 그대로 끌고 갔다.

철썩...

다시 한번 더 큰 파도가 밀려와 모든 사람의 발자국을 지워버렸고, 모든 행적의 흔적을 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