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가 시몬을 데리고 안전 구역으로 이동한 것을 알아차린 노안은 미리 준비해 둔 섬광탄과 수류탄을 던졌다.
미리 시각 모듈과 청각 모듈의 감도를 낮춘 덕에, 노안은 좁은 감옥 통로에서 탈출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베테가 있는 곳으로 혼자 가려고 한 그때, 그 리더가 떨어뜨린 단말기에서 급작스러운 통신 알림음이 울렸다.
음. 베테 어르신. 이 지휘관은 내 쪽에 있어.
그래? 내 복제체도 이쪽에 왔구나.
?
알겠어. 여기서 연락 기다릴게.
노안과 닮은 청년이 자신의 단말기를 내려놓았다.
노안은 카메라 각도를 조정하여 방 안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을 봤다.
지휘관... 지휘관! [player name]!!
암호화된 채널로 계속 지휘관을 불러봤지만, 답이 없었다.
화면도 바로 끊겼다.
단말기를 빼앗긴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인 것일까? 불안이 칠흑 같은 심해와 같이 노안의 이성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건 고독한 항쟁이어야 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의 과거사에 말려들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노안은 베테가 어떤 놈인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거절하지 못해서 약속까지 하게 되었지만, 파르마의 성격을 믿은 노안은 파르마가 두 지휘관을 함께 데리고 돌아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왜지? 가까스로 시몬을 안전하게 내보냈는데, 왜 피해자가 한 명 더 늘어나게 된 거지?
[player name]! [player name]!!
쥐 죽은 듯 조용하던 단말기에 마침내 새로운 화면이 떴다.
오랜만이야.
베테의 목소리는 긴 고문으로 목이 쉰 듯 예전보다 훨씬 걸걸했다.
오래전부터 레이첼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불행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 지휘관은 협조적이었고, "다른 너"에게 더 관심이 있어 보였으니까.
바로 이게 네 계획이었어?
베테. "우연히" 만난 사람을 협상 카드로 사용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건가?
……
이 카드의 유무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널 정화 구역 밖으로 유인하고, 승격자가 올 때까지 여기에 묶어두기만 하면 내 임무는 끝이야.
이곳에 묶어둘 실력은 있고?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단말기를 조금 더 높게 든 노안이 뒤에 누워 있는 조용한 사람들을 카메라로 찍을 수 있게 했다.
몇 명 남았어?
쳇.
맞아. 그는 내가 모아둔 사람과 물자를 모두 망가뜨렸지. 남은 건 모두 오합지졸들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녀석의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본인만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냈음에도 승격자를 부르지 않고 날 불러내서 직접 의식의 바다를 복제하려고 하는 거야?
……
"다른 나"에게 자신이 나라고 믿게 한 것도 네 계획의 일부인 건가?
난 혹사의 지시대로 그의 "감시자" 역할을 맡은 것뿐이야!
네가 모아놓은 "물건"을 혹사가 파괴했다고 했었지? 그 안에 물건으로 취급받는 사람도 포함되나?
더 이상 묻지 마! 그리고 예의를 지켜! 레이첼가의 자식아! 내 손에 그 지휘관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
사람을 보낼 테니, 몸에 숨겨둔 무기와 도구는 다 그에게 건네줘라. 그리고 얌전히 따라오도록 해.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새벽 2시, 노안은 몇 시간의 이동 끝에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익숙한 해안 마을에 다시 발을 디뎠다.
(또 여기야...)
공중 정원에 가기 전, 혹사는 이곳의 거점을 이용해 노안의 기억을 여러 차례 수정했었다.
공중 정원의 심문을 받을 때, 이 위치를 정화 부대에 알려줘서 조사하게 했었다. 지금 보니... 여전히 놓친 곳이 있었던 거 같았다.
큰길을 피해 폐허 속에 난 작은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30분 뒤, 나무 상자와 쓰레기로 덮인 입구에 도착했다.
"안내자"의 뒤를 따라, 노안은 어두컴컴하고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피와 고기의 썩은 냄새, 그리고 양쪽으로 격리된 변이 식물들이 승격자의 구역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근처에... 시체가 쌓여있는 곳이 있을 거야.)
노안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양쪽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이 건물의 재질과 접합 방식을 확인했다.
(버려진 지하 건물에 오래된 재료를 사용해 임시로 만든 거점인 것 같아.)
(혹사는 구조체의 잔해를 회수해 재활용하기도 했고, 시체를 쌓아 적조를 배양하기도 했어. 그럼, 여기도 혹사의 그런 "창고"일까?)
뚝뚝.
붉은색 액체가 천장 틈새로 흘러내려 발밑 배수판으로 떨어졌다.
(위쪽에?)
핏자국을 따라 사방을 둘러보던 노안은 비로소 구석에 던져진 피 묻은 옷 두 벌을 발견했다. 사이즈로 볼 때 어린아이의 옷인 거 같았다.
……
거기 서서 뭐 해? 베테가 기다리고 있어!
고개를 숙인 노안은 피비린내 나는 속삭임 속에서 상대방의 발걸음을 따라잡았다.
오랜만이야. 레이첼가의 자식.
혹사 말로는 내 막내딸이 너랑 있다가 죽었다며? 큰딸도 일벌 부대에서...
나와 아딜레 사이에 원한이 참 많아.
입을 벌린 베테가 걸걸한 목소리로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좀 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서 막내딸한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24살이 될 때까지 집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정화 부대가 지휘관이 실종된 강가에서 너와 혹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고 했어.
그 말을 들은 베테가 웃음을 멈췄다.
혹사는 왜 지휘관을 네게 먼저 넘겼지?
그땐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그 기계도 내가 구한 거야. 왜? 이것에 흥미가 있나?
그럼, 16일 동안 네가 계속 지키고 있었던 거야?
네가 좋아하는 이 화제는 네 복제체들이 그 캡슐에서 줄줄이 기어 나온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
베테가 손짓하자 음침한 표정의 두 연구원이 몸을 돌려 책상 단말기로 어떤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순간 강렬한 압박이 모든 행동 능력을 빼앗아 간 듯한 느낌을 받은 노안은 기체를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
움직이기 힘들지?
혹사가 가져온 기계에 노안을 올려놔. 그리고 나머지 작업은 너희한테 맡기지.
……
알았어.
미친개 같은 수송 부대와 거래하다 보면, 숨이 붙어 있는 한 적을 물어뜯는 게 너희들이라는 걸 알게 되지.
…………
어때? 내가 한 수를 남겨둘 줄은 몰랐지? 아직도 그 분한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지어봐.
노안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노인은 의기양양하게 몸을 숙여 청년의 얼굴을 두드렸다.
……
이런 종류의 장치들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요?
어.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런 정보를 찾았는데, 실내에서 구조체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장치인 것 같아.
맞아요. 이것은 모두 정화 부대가 예전에 사용했던 장치들이에요.
실내에 설치해야 하는 이 장치는 실전에서 사용하기 불편했기 때문에 점차 도태됐어요. 일부 보육 구역에만 비상 방어용으로 남아 있어요.
블랙 램 소대의 현재 임무 구역에서 이런 걸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왜 물어보시는 거죠?
어쩔 수 없이 너에게 비밀을 말해줘야겠네.
……
리. 사실 블랙 램 소대는...
노안이 신비롭고 낮은 목소리로 미리 준비해 둔 말을 쏟아냈다.
……
논리적인 헛소리를 들은 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노안이 "비밀"을 말하고 싶어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반제어장치를 만들어 줄 수도 있고, 가능한 한 팔찌 크기로 줄여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에 쓰지는 마세요.
걱정하지마. 절대로...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겠어!
노안은 볼 옆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붙잡고, 실험 정비대에서 굴러떨어져 그 손의 주인과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노인이 첫 비명소리를 내지르기도 전에, 노안은 노인을 들어 올린 뒤, 달려드는 구조체들을 향해 던져버렸다.
그 혼란을 틈타 맨손으로 싸우던 청년은 실험실을 빠져나와 좁고 긴 복도의 끝까지 단숨에 도망쳤다.
몸을 돌리자, 한 번에 몰려들던 적들이 추격 속도의 차이 때문에 일렬로 늘어서는 게 보였다
뒤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자마자, 가장 먼저 쫓아온 구조체와 맞닥뜨리게 됐다.
상대방이 검으로 베려 하자, 노안은 옆에 있던 소화기를 집어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이어서 두 번째로 추격해 오는 적에게 들고 있던 소화기를 던졌다.
쓰러진 적에게서 총과 검을 빼앗은 청년은 다시 한번 후퇴하는 척하며 총알을 피하고 나서, 세 번째 적 앞으로 다시 뛰어올랐다.
양쪽의 장검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는 순간, 총소리가 갑자기 상대방의 가슴 앞에서 울려 퍼졌다.
이 자식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 어서 녀석을 막아!
그들이 대형을 조정하는 틈을 타서 노안은 구석에 아직 치우지 않은 자갈들을 주웠다. 그 후, 총알을 피하며 최전방에 서 있는 이를 향해 던졌다.
조준했던 대상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바닥에 맞고 튄 자갈이 노안을 조준하고 있던 이를 맞췄다.
기뻐할 새도 없이, 죽어 가던 배신자가 뒤에서 노안의 망토를 꽉 잡아당겼다. 게다가 앞쪽에서도 적 둘이 달려들고 있었다.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판단한 청년은 몸을 숙여 왼쪽의 공격을 겨우 피한 뒤, 몸을 돌려 검으로 오른쪽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후, 몸을 일으키는 틈을 타서 연속 사격을 했다.
노안을 쫓아오던 마지막 적이 그의 민첩한 행동을 보자, 황급히 물러났다.
교란 장치를 최대로 가동해! 어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안의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실험실로 재빨리 돌아온 노안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에너지 방출 검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시야가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