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기억의 회랑 / 마음의 항로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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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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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이게 뭐야!

화가 난 듯 실험실의 큰 문을 밀치고 들어간 카레니나는 적색 스탬프가 찍힌 한 묶음의 파일을 책상 위에 내동댕이쳤다.

내 인턴 신청을 반려한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과학 이사회 저 [삐!]들은 머리가 없대?! 내 필기시험 점수가 모든 후보 중에서 제일 높잖아!

카레니나는 불만을 늘어놓으며, 테이블 옆 접이식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뜻을 알 수 없는 불만을 이어가자, 몸도 따라서 축 늘어졌다.

이 모든 걸 지켜본 와이어스는 카레니나의 필기 시험지와 반송된 신청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접은 뒤, 옆에 있는 문서 파쇄기에 넣었다.

네가 푼 네 번째 응용문제에서 천체 운동의 각운동량을 계산할 때 사용한 공식이 잘못됐어. 반 달쯤 전에 내가 케플러의 법칙과 각운동량 보존에 대해 복습시켰었는데.

그거 실수한 건데... 어차피 떨어졌잖아. 만점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이런 쓸데없는 잡일을 하는 건,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리고 과학 이사회는 네게 어떤 가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을 거야.

왜? 혹시 과학 이사회하고 세계 엔지니어 연합하고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네가 구조체이기 때문이지.

퍼니싱 전쟁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지금, 구조체 기술은 과학 이사회의 중점 연구 대상이야.

그들은 절대로 구조체가 그렇게 코어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야.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받은 대우를 보면 알 수 있거든.

……

이 연구 성과의 서면 보고서와 학술 서적은 구조체가 빌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죄송해요. 규정이어서요.

와이어스 박사님 심부름인 건가요?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증명서를 받아놔야 해요.

당신의 견학 신청은 통과하지 못했어요. 사뮤엘 박사님의 연구팀 정원은 이미 다 차버렸다고 하네요.

넌 어느 부대 소속 구조체지? 통행금지 시간에 왜 여기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군법에 의해 처리되는 게 두렵지 않나?

세계 엔지니어 연합의 예비 회원? 그들이 언제부터 구조체에게 가입 권한을 개방했지? 네 신분을 확인해야겠어.

흥, 처음엔 네가 날 공중 정원에 데려가 준다고 했을 때, 땅 위와 여기는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었는데...

결국 사람을 얕보는 무리뿐이잖아. 왜 인간과 구조체를 나눠서 차별하는 거지? 개조되기 전엔 나도 인간이거든.

황금시대 이전에도 인간들은 피부색이나 신체 특징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차별했어. 완전히 다른 신체 구성을 가진 구조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불공정한 환경을 탓하는 건, 자신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받을 필요 없어.

환경을 바꿀 힘이 없다면, 귀를 막고 눈을 감아. 환경이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말이야.

쯧, 네가 이런 식으로 잔소리할 줄이야. 내가 그 정도도 모를 거 같아?

근데 너는?

카레니나는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기분 전환을 위해 동작을 취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와이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과거에 무엇을 연구했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을 거야.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과학 이사회에서도 큰 인물이었겠지!

할아버지를 이렇게 존경하는데, 왜 과학 이사회에 들어가지 않았지? 여기서 밤낮으로 설계도만 그리고 있잖아? 설마 수준이 안돼서 그런 거야?

와이어스는 카레니나의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그의 평온한 표정에 작은 파동이 일었지만, 그 미세한 동요는 이내 사라졌다.

과학 이사회에 들어갔었지만, 나왔어.

그럼, 넌...

이번 주 학습 내용은 다 예습했어? 보름 뒤에 실습 테스트에서 내가 네 공학 분야의 단계 성과를 검증할 거야.

공중 정원이 구조체의 임시 거주권에 새로운 제한을 뒀어. 넌 세계 엔지니어 연합에 계속 있을 수 없어. 그러니 과학 이사회보다는 정비 부대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거야.

정비 부대에만 들어가면, 넌 기술자로서 공중 정원의 영구 거주권을 얻게 될 거야. 그 후에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단련할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도 되는 문제야.

그러면 돼.

와이어스는 무덤덤하게 말을 마치고, 자신의 소지품을 정리한 후 실험실을 떠났다.

역시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아.

와이어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카레니나는 아무런 의미 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레니나와 와이어스가 지상에서 처음 만난 이후, 둘 사이의 관계와 대화 패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와이어스는 모든 사람에게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카레니나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카레니나의 두 번째 선생님이었지만, 캐논과 달리 그녀에게 사사로운 관심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와이어스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 높은 장벽을 세워 뒀고, 그 벽 안에는 남에게 발견되기를 원치 않는 마음이 있었다.

카레니나도 이런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구조체가 된 후의 수년 동안, 그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시선이 지배하는 이 공중 정원에서 비틀거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얼어붙은 두 마음은 말없이 서로를 살피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카레니나도 조금씩 와이어스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정비 부대라...

듣기에 괜찮은 거 같아.

할아버지. 집에 또 물이 새잖아. 전에 찾아 둔 음식들이 다 젖어서 못 먹게 됐어..

걱정 하지 마. 카레니나야. 음식은 날이 밝으면 다시 함께 찾으러 가면 돼.

하지만 할아버지 몸이...

쿨럭, 쿨럭...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할아버지가 우리 카레니나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어!

여기의 간격을 재고... 한 바퀴 순환에 필요한 시간을 계산한 다음에 구성도를 정하면...

자, 카레니나야. 할아버지랑 같이 우리 집을 더 예쁘게 꾸며보자꾸나!

캐논이 그린 초안대로 카레니나와 캐논은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재료를 이용해, 그들이 사는 오두막에 간단한 배수 시스템을 만들었다.

정말 신기해... 누수가 났던 곳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이걸로 비도 모을 수 있게 됐어.

이건 과학의 힘이란다. 카레니나야. 기억하렴. 과학은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도구란다.

그럼, 할아버지가 예전에 만들었던 엉망진창 폭발물들도 삶의 윤택을 위한 거였어?

하하. 맞아. 하지만 그건 미완성품이야.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그 물건들은 중요한 것들인데, 할아버지는 이젠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쿨럭.

할아버지. 무리하지 마. 할아버지가 만들지 못하는 건 내가 해볼게! 할아버지도 대단하지만, 나중엔 내가 할아버지보다 더 대단해질 거야!

어쨌든 나도 할아버지 손녀니까!

<구조 개념 체계>, <실용 응력 집중 매뉴얼>, <고에너지 물리학 개론>... 그리고 <시간의 역사>...?

마지막 책은 재미로 읽을 거야. 평소대로 이 도서관 카드로 해줘.

……

반납 기한은 15일이고, 기한을 넘기면 3개월간 대출 권한이 정지돼요.

도서관 직원은 눈앞의 구조체를 흘깃 쳐다본 뒤, 별일 없다는 듯 와이어스 이름이 적힌 도서관 카드를 집어 들어, 한번 스캔한 후 카레니나에게 다시 던져줬다.

카레니나는 도서관 직원의 표정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신장의 반만 한 책더미를 안고 카운터를 떠났다.

미안. 지나갈게.

……

책장 앞에 서있는 키 크고 마른 금발의 여성이 카레니나에게 길을 비켜줬다. 그녀는 카레니나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도서관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을 봤다.

방금 저분, 요즘 매일 오시는 거 같네요?

책을 든 금발의 구조체가 카운터로 와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모르겠네요. 별 관심 없어요. 무엇을 대출하시겠어요?

이 책이요.

<살로메>? 구조체가 이런 것도 읽나...

도서관 직원은 멸시 섞인 말을 갑자기 멈추고, 책을 스캔한 뒤 혀를 차며, 그 책을 돌려줬다.

감사해요.

그 구조체의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도서관 직원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공중 정원 도서관

구조체용 공간

넓은 가상의 별하늘 아래에 오직 한 점의 촛불만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점성액이 수평 원형 관에서 층흐름을 할 때, 체적 유량을 어떻게 측정하지…

여기선 그 법칙을 사용해야겠어. 음,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머리가 무겁네. 구조체인데도 피곤함을 느끼다니. 그럼, 이 개조는 도대체 무슨 [삐!] 소용인 거야.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자, 카레니나의 상체가 책상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카레니나가 밤색으로 물든 공중 정원을 바라보자, 오랜 시간 사색에 잠겼던 의식의 바다가 서서히 고요해졌다.

아직 복습해야 할 부분이 40군데가 넘어.

집행 부대에 바로 들어가는 게 더 편할까? 몇 년 동안 봉인했던 내 주먹을 보여주면... 음. 안 돼.

난 이런 구닥다리 장소에 있고 싶어서 정비 부대에 지원한 게 아니야. 난...

과거에 빠져 사는 게 아니라, 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들어간 거야.

좋아. 다음 문제...

얼굴을 두드린 카레니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제대로 앉았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갑자기 진한 향기를 맡았다.

???

정말 피곤하다면, 이거 한번 마셔봐요.

길고 가느다란 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색 액체가 담긴 컵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손을 따라 위를 올려다본 카레니나는 금발의 여성이 그녀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지?

인공 카페인 전해액이에요. 진짜 커피랑 효과가 비슷해서, 어느 정도는 기운을 북돋워 줄 수 있어요.

고마워...? 근데... 넌 누구야?

비앙카라고 해요.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당신처럼 구조체예요.

비앙카는 자기 장갑을 벗었고, 기계 구조의 손바닥을 드러냈으며 카레니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냥 혼자 여기에 늦게까지 있는 걸 보니까 말 한마디 걸고 싶었어요. 일 외에 다른 곳에서 구조체를 만나는 경우가 그렇게 흔하지 않거든요.

괜찮으시다면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음... 어. 상관없어.

비앙카는 카레니나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양장본 책이 펼쳐져 있었고, 카레니나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문학 쪽 서적이라는 걸 표지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후... 후... 퉤! 아우 써.

카레니나는 비앙카가 건넨 음료를 한 모금 마셔봤다. 진한 향기에 속아 넘어간 카레니나는 강한 쓴맛이 입안에 번지자,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며 퉤 소리를 냈다.

아, 죄송해요. 당신이 익숙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가 설탕 시럽이나 우유를 갖다줄게요.

아니. 괜찮아!

카레니나는 고개를 흔들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입으로 확 쏟아부었다.

꿀꺽... 꿀꺽... 하.

쓴맛에 자극받은 카레니나는 이를 악물고 혀에 남은 맛을 억지로 삼킨 뒤, 비앙카를 향해 뿌듯한 듯 미소를 지었다.

어때? 다 마신 거 보이지!

왜 그렇게 뿌듯해하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마시는 건 조금 아까운 거 같은데요.

음... 왜 아무런 느낌이 없지. 이거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거야?

효과가 나타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그동안 이야기 좀 나누는 건 어때요? 그러면 당신의 신경도 조금은 풀릴 수도 있어요.

음...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근데 우린 모르는 사이잖아.

그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되는 거 아닐까요?

여긴 도서관이야. 떠들면 안 돼.

카레니나는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뒤에야 이곳에 자신과 비앙카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따뜻한 불빛이 제공되는 도서관 내부와 달리 이 공간은 유난히 적막했다.

구조체를 위한 공간으로 특별히 마련됐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곳을 이용하는 구조체는 많지 않았다.

공중 정원에 머무는 대다수의 구조체는 집행 부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최전선에 투입됐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정비 부대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는 카레니나에게 이곳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만의 피난처가 돼줬다.

마치 캐논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 빈민가로 돌아간 것 같아서 여기에 있으면 안심이 됐다.

알았어. 잠시만 너랑 대화해 줄게. 잠깐만이다.

고마워요.

그렇군요. 당신은 지금 정비 부대에 들어가려고...

당신을 입양한 그 어르신이 당신이 선택한 길을 보시게 되면,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이걸 하는 게 아니야.

처음에 그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온 건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였어. 하지만 지금은 나 자신만의 목표를 찾고 싶어.

공부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오래 걸리긴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기술"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 같아.

카레니나는 자신의 책상 앞에 높게 쌓인 노트 더미를 한번 바라봤다. 이건 카레니나가 체계적으로 학습을 시작한 후 작성한 학습 노트와 깨달음이었다.

처음엔 글씨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고, 베껴 적은 공식도 삐뚤빼뚤했다. 그리고 배운 지식은 뒤죽박죽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기초부터 정리하는 데만 해도 카레니나는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레니나는 포기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과학"에 대해 가진 인상은 캐논 할아버지가 주신 것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세상엔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과학은 인류에게 복을 주는 도구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와서 할아버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말이야.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기술을 습득한 후에야 내가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간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 같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거라고 전 믿어요.

너는? 넌 집행 부대의 구조체인 거 같은데? 게다가 퍼니싱과 자주 전투하는 것처럼 보여.

내가 정비 부대에 들어가게 되면, 집행 부대와 함께 임무에 투입될 거고, 그러면 언젠가 같은 팀을 이루게 될 수도 있겠다.

음... 그때가 되면, 내 기술로 널 도와줄 수도 있겠지?

저요?

네가 음료수 사줬잖아. 맛은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어. 작은 은혜라도 크게 갚아야 한다고 말이야.

제가 군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업무 중에 절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면...

그땐, 꼭 도와주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