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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좌표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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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정원

제3 중앙함교

거대한 창 아래, 지휘 센터의 대원 몇 명이 한 구조체 주위를 둘러싸고, 그녀가 조작 콘솔 앞의 가상 화면을 조작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갱신되는 좌표 파라미터 수십 개가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 아래에서 떠올랐고, 구조체는 이 데이터들을 면밀히 대조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머리 위 역원 장치가 축 처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가상 화면을 닫은 뒤, 긴장한 표정을 짓는 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음... 좌표 데이터 계산에 확실히 이상이 있어. 그래서 매번 관측한 값을 거리로 환산할 때, 킬로미터 단위의 편차가 발생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건, 우리의 별자리 관측기기에 심각한 고장이 발생해서 전술 배치와 실시간 지상 감시에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거야.

이... 이건 큰일이네요.

지휘 센터의 담당자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함교 중앙엔 거대한 구형 홀로그램 이미지가 투사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다채로운 빛의 점들이 빼곡하게 퍼져 있었다.

이것은 지구를 본떠서 만든 작전 지도로, 지휘 센터는 이 지도를 기준으로 지상의 집행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평소 지휘 센터의 대원들은 작전 지도에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파라미터를 기록한 뒤, 이 파라미터들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렸다. 이렇게 내린 각 판단은 전쟁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만일 집행 부대에 잘못된 명령을 내린다면, 그 대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여기서 대원들의 판단 근거는 정확하고 즉각적인 지상 좌표 정보인데, 공중 정원의 별자리 관측기기가 바로 이를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장치가 고장이 난다면, 지휘 센터와 집행 부대의 운영은 곧바로 마비 위기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카레니나, 정비 부대가 관측기기를 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 043번 도시의 공격전이 결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어요. 이를 위해 우린 엘리트 소대 다섯을 투입했고, 모든 명령엔 절대로 실수가 있어선 안 돼요.

이건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라고, 게다가 난 고장 난 원인도 파악해야 해. 관측기기에 내장된 광학 원자시계는 정밀한 장비라서, 수리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대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걱정하고 있던 카레니나도 주먹을 꽉 쥐며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이를 악문 카레니나는 자존심을 담아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흥, 날 못 믿는 거야? 그냥 좀 큰 GPS 장비인 거잖아. 우리 쪽 인턴만 있어도 이런 장비쯤은 금방 고칠 수 있어.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지상 전투 상황을 고려한다면, 최대 48시간밖에...

24시간, 내가 24시간 안에 해결해 줄게.

정말인가요? 카레니나씨. 정말 고마워요! 지휘를 정상적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043번 도시에서 거뒀던 모든 전투 성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 시간 없으니까, 일단 정비 부대에 가서 필요한 장비 좀 챙겨 올게.

감수성이 풍부한 대원이 짜증이 나기 시작한 카레니나는 급히 함교를 떠나 복도로 내달렸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기체의 통신 장치를 열었다.

야! 테디베어, 들리냐? 지금 공중 정원에 남아있는 인원이 몇이야?

무슨 일인데,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지금 공장 창고에 24명이 근무 중이야. 아주 새로운 걸 시험하는 중이거든.

이봐, 인턴. 연료를 너무 많이 넣었잖아. 우리 다 날려버리고 싶으면 그냥 말로 해.

통신의 다른 한쪽에 있는 테디베어는 정비 부대의 대원과 함께 있었고, 그들이 작업하는 것을 감독하는 중인 것 같았다.

휴가 중인 대원들까지 다 집합시켜. 그리고 너도 함께 와.

급한 거 같은데,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물론 긴급한 일이지! 내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는 거 봤어?

공중 정원의 별자리 관측기기에 문제가 생겨서, 즉시 수리해야 해. 지상 부대의 작전 배치와 관련이 있는 거라, 부대원 전원이 힘을 모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부대원 전원이라니, 과장이 좀 심한 거 같은데. 그냥 혼자선 절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지?

응... 나 혼자 안 되는 거 인정해 뭐! 그리고 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트집이냐?

아니. 난 그냥 5분 전에 저쪽 담당자한테 "이런 장비는 내가 졸면서도 고칠 수 있어"라고 큰소리치진 않았는지 궁금해서 그랬지.

테-디-베-어!

알았어. 농담 이쯤하고, 지금 바로 갈게.

모두, 대장님 명령대로 지정된 장소에 모여.

테디베어가 가볍게 손뼉을 치며, 정비 부대의 멤버들을 소집했다.

5분 후에 내가 갈게. 그리고 그동안 우리한테 어떻게 일을 맡길지 생각해 주세요. 카레니나 대장님.

고마워. 테디베어 그리고 모두.

자신의 지시가 팀 내 멤버들에게 다소 힘든 요구임을 깨달은 카레니나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테디베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기존 규정"은 기억하고 있겠지.

테디베어는 무덤덤하게 미소를 지으며 통신을 끊었다.

공중 정원

예술 협회

음... 찾았다. 예전처럼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거야. 제작진의 친필 사인도 포함되어 있거든.

수집용으로 포장된 영화 디스크를 아이라로부터 받은 비앙카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이라. 공중 정원에서 이 영화가 꽤 인기 있는 것 같던데, 예약하느라 힘드셨겠어요?

괜찮아. 비앙카는 오랜 팬이잖아. 이런 특별 서비스는 당연한 거지. 게다가 임무 때문에 바빠서 발매일에 맞춰서 올 수는 없었잖아.

영화 개봉했을 때 봤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요. 그래서 참지 못하고 수집하고 싶었어요.

영화 제작진에게 꼭 전할게, 분명히 모두 기뻐할 거야.

그런데 매번 부탁만 하는 거 같아서 정말 미안하네요.

괜찮아. 그리고 내가 비앙카에게 부탁했다면, 망설임 없이 도와주셨을 거잖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라면요.

헤헤. 그럼, 말 나온 김에...

아이라는 비앙카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딱 부탁할 만한 일이 있어서 비앙카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해.

아이라는 카운터 아래에서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것은 예술 협회의 상자에 보관된 물품으로 먼지가 꽤 쌓여있는 게 오래된 물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뭐죠?

오래전에 누군가가 예술 협회에 맡긴 물건인데, 보관 기한이 지났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고 있어서 협회 직원들도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어.

절차에 따라 조사해 봤는데, 그 물건을 맡긴 사람은 예전에 공중 정원을 떠난 것 같아.

그 물건 맡긴 사람 찾는 걸 도와달라는 건가요?

굳이 찾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비앙카는 누군지 알고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예전에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군지 너무 궁금해서 시카에게 집행 부대의 권한을 빌려서 공중 정원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봤었거든.

이 사람이 저와 관련이 있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물건을 받아 든 비앙카는 포장 상자 위 바래진 이름을 봤다.

와이어스...

기억나?

비앙카는 마음속으로 낯선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어봤다. 그러자 곧 그 이름과 이어진 몇몇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음,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요.

비앙카의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반사되면서, 옛날의 장면들이 복잡한 감정과 함께 떠올랐다.

와이어스는 한때 세계 엔지니어 연합에 소속돼 있었으며, 공중 정원의 뛰어난 물리학자이자 엔지니어였어요.

그리고... 과거 카레니나의 선생님이기도 했어요.

눈을 다시 떴을 때, 세상은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음...

무한히 낯설고, 차가운 곳이었다.

카레니나

어째서... 내가... 여기...

생명체 상태가 안정됐으며, 역원 장치가 이식에 성공하면서 침식률이 안전 기준치 이하로 낮아졌어요.

수술 끝났어요. 수고하셨어요.

캐논 박사님께서 남긴 기술 덕분에 탄탈-193 공중합체의 적응성이 기준에 도달하면서 구조체 수술의 성공률이 이전에 비해 80%나 높아졌어요.

구조체는 우리가 퍼니싱이라는 재난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에요. 이는 거대한 돌파구이며, 앞으로 우린 더욱 효율적으로 구조체를 생산해 전쟁에 투입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럼,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방어군의 구조체 부대에 편입시켜야 하나요? 수술 성공률이 보장은 됐지만, 탄탈-193 공중합체의 적응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필수 조건이에요.

결국 구조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괜찮아요. 우선 그녀 본인의 의지를 지켜보시죠. 캐논 박사님의 기술 덕을 봤으니, 이제 그에 대해 보답해야 할 차례에요.

할아버지... 거기 있어...?

할아버지... 나... 버리지 마.

기다리던 응답은 오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이 그녀의 두 눈을 잠식했고, 남은 건 머릿속 극심한 고통뿐이었다.

쓱... 직!

——!

카레니나가 놀란 듯 꿈에서 깼다.

쳇...

고개를 숙인 카레니나는 아직 적응되지 않는 자신의 "새로운 신체"를 조용히 바라봤다.

수많은 밤을 지새웠으며 가녀린 가슴 속에서 뛰었던 심장 박동 소리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나약한 육체는 단단한 강철로 바뀌었고, 익숙했던 오감은 자신과 멀어졌다.

세상을 느끼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카레니나는 테세우스의 배처럼, 지금의 자신이 과거의 "카레니나"와 어떤 연관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침식체에 의해 침입된 그날 밤, 카레니나는 캐논 할아버지와 함께 죽었어야 했다.

구조체...

카레니나가 깨어난 후, 수술을 담당한 기술자는 사건의 경과와 "구조체"라는 개념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간단히 설명해 줬다.

그 후, 카레니나는 지상 방어군이 세운 거주지에 배치됐고, 그곳의 담당자는 그녀에게 구조체로서의 정체성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카레니나는 자신과 주변의 급박한 변화를 소화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카레니나는 이곳을 빠져나가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빈민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구조체인 그녀의 모든 행동은 주둔 방어군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고, 침식체에 점령당한 포위 지역으로 가는 것을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텐트의 천막을 젖힌 카레니나가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보급소를 세우고 배고픈 난민들에게 무료로 흰죽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 흰죽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려 발걸음을 옮긴 카레니나는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어이, 거기 뭐 하러 와? 구조체는 먹을 필요가 없는데, 왜 우리 것을 뺏으려고 해?

맞아. 맞아. 가뜩이나 음식도 부족한데.

쳇... 누가 너희들 걸 뺏어가는데, 착각하기는.

카레니나는 이 사람들과 싸울 마음이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굶주림"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기술자가 그녀에게 설명해 준 구조체와 인간의 차이였다. 그래서 음식이 필요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으며,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강한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카레니나가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은 이런 생리적인 차이가 아닌 심리적 차이였다.

그것은 과거 케이티와 톰에게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벽"이었다.

……

공터를 정처 없이 배회하던 카레니나는 낯선 영역에 들어온 길 잃은 고양이처럼, 주변을 불안한 시선으로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원인 모를 불안함에 대한 반응은 한층 더 강해진 경계와 방어 기제였다.

엄마. 저 언니 이상해.

쉿, 함부로 말하지 마. 엄마 옆으로 오렴.

다섯 살에서 여섯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카레니나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고, 여자아이의 엄마는 급히 딸을 끌고 갔다.

뭐 쳐다봐. 볼 것도 없는데...

그 젊은 엄마의 시선은 계속해서 카레니나의 노출된 기계 팔과 역원 장치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를 알아챈 카레니나는 짜증을 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뒤,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야, 거기 너희들...

카레니나는 공터에서 놀고 있는 몇 명의 남자아이들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를 본 아이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왜, 왜 그러세요?

뭣 좀 물어보려는 거야.

저, 전 아무것도 몰라요.

잠깐만,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저, 저기 따라오지 마세요!

대장 노릇을 하는 남자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걸음을 재촉해 달아났다. 그러자 카레니나만이 그 자리에 혼자 남게 됐다.

하나같이... 어디를 가든 똑같아.

혀를 찬 카레니나는 모자챙을 내리며, 머리 위 눈에 띄는 "역원 장치"를 가렸다.

카레니나는 이들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야 했는데, 왜냐하면 이전에 당했던 이유 없는 악의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카레니나는 이 세상에 정말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카레니나는 매일 밤 캐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기묘하고 환상적인 동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휴일이 되면 할아버지와 함께 신기한 과학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같은 또래의 비난과 수군거림은 이러한 아름다운 기억들에 비하면 순식간에 잊힐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카레니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난 이제 앞으로...

네가 카레니나야?

다소 초라하게 대충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자가 카레니나 뒤에서 다가왔다.

넌 누구야? 무슨 일이지?

카레니나는 몸을 돌려 그 남자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 남자의 차림새는 카레니나에게 개조 수술을 했던 흰 가운을 떠올리게 했고, 이런 종류의 "연구원들"에게 그녀는 좋은 감정이 없었다.

내 이름은 와이어스야.

캐논 박사님과 얼마나 함께 살았어? 박사님께서 자신의 일을 너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그 남자의 말투는 냉정했지만, 뭔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너... 우리 할아버지를 알아!? 혹시 아직 살아계셔?

캐논 박사님은 이미 돌아가셨어.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그럼, 너와 시간 낭비할 이유도 없겠어.

잠깐!

카레니나는 흥분하면서 떠나려는 와이어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상처받은 들짐승처럼 이를 악물고, 사나운 눈빛으로 와이어스를 바라봤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맞는데, 넌 분명 뭔가 알고 있잖아. 맞지!?

할아버지에 대해 말해줘! 할아버지는 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지? 할아버지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넌 할아버지와 무슨 관계야?

너에게 말해줄 의무가 없어.

하지만 난 알 권리가 있어!

와이어스는 카레니나의 분노에 직면하게 되자, 잠시 침묵한 뒤 이어서 말했다.

그럼, 넌 무슨 수로 내 입을 열게 할 거지?

넌 할 수 없어. 그러니까 권리니, 뭐니, 라는 소리는 하지 마.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야!

할아버지가 대단한 건 나도 알아. 할아버지는 항상 노트에 복잡한 것들을 적으셨고, 절반 이상은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할아버지와 같이 지냈는데,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이젠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다시는 말할 기회도 없어졌어.

난 그냥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을 뿐이야! 너희들은 왜 그렇게 다 인색한 거야!?

방금 네가 말했지. 박사님께서 쓰신 것 중 반 이상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럼, 나머지는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어, 어쩌라고! 할아버지가 가끔 나에게도 뭘 가르쳐주셨어. 그게 그렇게 이상해?

이 손 놔.

너!

이 손 놔. 그리고 깨끗한 흰 종이 몇 장하고 수성펜을 가져와.

뭘 하려고?

테스트.

네가 캐논 박사님께서 몰두했던 그 세상에 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테스트해 볼 거야.

종합 정확도는 47%고, 지식 범위에서 뉴턴 역학과 해석 역학은 꽤 잘 배웠군. 전자기학도 어느 정도 기초가 있고, 열역학과 통계 역학은 아예 모르는 상태군.

그리고 다른 기초 과학 분야는 편중이 심한데.

겨우 합격이야.

와이어스는 카레니나의 답안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고는 접어서 잘 보관했다.

카레니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정리와 공식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논리적 사고를 형성하지 못했고, 논증 방식도 자유롭고 꽤 엉뚱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부분은 학습을 통해 단련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카레니나가 훌륭한 연구자가 되기 위한 잠재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건 캐논 박사님의 영향 때문일 지도 모른다. 혹은 캐논 박사님이 카레니나를 입양한 것이 그녀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와이어스는 고개를 숙인 채, 이 여자아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야, "합격"이 무슨 뜻이야? 이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는 거야?

와이어스의 긴 침묵을 본 카레니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난 알려줄 수 없고, 알려주지도 않을 거야.

그럼, 넌 [삐!] 나 가지고 장난친 거야!?

무엇을 이루고 싶다면, 먼저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해.

캐논 박사님은 뛰어난 과학자셔, 박사님께서 속하신 세상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여자아이와 어울리지 않아.

만약 네가 박사님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세상의 일원이 되어야 해.

난...

카레니나가 알고 있는 캐논 할아버지는 와이어스가 말한 그와 전혀 달랐다.

조금 미친 노인에 불과했던 캐논 할아버지는 가끔 카레니나가 이해할 수 없지만, 깊은 뜻이 있는 듯한 말을 하곤 했다.

그의 머리 위엔 어떤 후광이 없었고, 그의 업적이 무엇인지도 카레니나는 알지 못했다.

지금 카레니나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미지의 길이자, 캐논 할아버지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미래로 이어져 있는 길이었다.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하는 거지?

내가 널 어떤 장소로 데려갈 거야.

그리고 넌 거기서 필요한 것들을 배우게 될 거야.

카레니나에게 손을 뻗은 와이어스는 그들이 속한 "그 세상"에 그녀를 초대하려는 모습이었다.

카레니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 주머니에 숨겨뒀던 얼음처럼 차가운 금속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차가운 손과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