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 가! 약 안 먹겠다고 했잖아!
옥스 도련님, 리처드 의사 선생님께서 도련님이 약을 계속 먹지 않으면...
다 거짓말이야! 전에 그 의사도 내가 약을 꾸준히 먹으면,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난 아직도 집에만 있지. 어쨌든 난 다시는 그 약을 먹지 않을 거야. 콜록, 콜록...
도련님.
옥스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안 좋았다. 심지어 그는 건방지고 괴팍하기까지 해서 친구가 없었다.
제너럴 토이 컴퍼니의 회장인 옥스의 아버지는 거의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옥스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옥스는 학교 다니는 게 좋아졌고, 매일 집에 돌아올 때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안타깝게도 옥스의 병은 악화됐고, 학교에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됐어. 별일 없으면 나가 봐.
하녀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떠나려던 그때, 옥스를 기쁘게 해줄 만한 일이 떠올랐다.
도련님, 오늘 검진을 받으실 때 도련님의 친구분들이 찾아오셨어요.
내 친구들이 찾아왔다고!? 왜 말 안 했어!
옥스가 그 나이의 어린아이에게 있어야 할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옥스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본 하녀도 함께 마음이 따뜻해졌다.
친구분들께서 도련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나중에 도련님께서 건강해지시면 같이 게임을 하자고 했는데... 그 뭐였더라...
<노르만의 영웅>, 내가 여러 번 말했었잖아.
네! 맞아요! 그 이름이에요! 그리고 친구분들께서 도련님을 응원하신다고 선물을 주셨어요.
선물!? 설마...
도련님께서 약부터 드셔야 선물을 드릴 수 있어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약이 아주 조금 쓰긴 한데... 어머, 옥스 도련님, 설마 이게 두려운 거예요?
옥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까짓것, 약 좀 먹는 건데, 내가 왜 이걸 두려워하겠어.
하녀는 웃으며 약과 포장된 선물을 옥스에게 줬다.
<노르만의 영웅11>이야! 이미 발매했구나. 하지만...
옥스의 눈에서 타오르던 빛이 다시 빠르게 꺼졌다. 옥스의 건강에 영향을 줄까 봐, 리처드 의사가 게임기를 압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옥스는 새로운 게임을 받아도, 그냥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압수하라고 하셨죠. 하지만 어떤 하녀가 청소할 때, 실수로 게임을 침대 밑으로 쓸어버리곤 꺼내는 걸 까먹은 듯해요.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죠?
정말이야!?
근데 하루에 조금만 하시고... 그리고...
"의사 선생님한테는 비밀!"
어느덧 겨울이 됐고, 눈이 내렸다. 하지만 이 황금시대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추위는 문제 될 게 아니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희망의 불씨가 꺼져갔다.
도련님, 오늘 드셔야 할 약이에요.
옥스는 보지도 않고, 약을 입에 넣었다. 같은 쓴맛이라도 옥스는 이미 무감각해졌다.
매일 약을 먹음에도 옥스의 병은 계속 악화됐다. 지금은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작은방에 갇힌 옥스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게임뿐이었다. 게임엔 마음껏 모험을 떠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컨트롤러를 집어 들려는 옥스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 컨트롤러를 침대 옆에 떨어트렸다. 힘껏 손을 뻗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어가는 이 몸은 도움이 안 돼. 차라리 그 무능한 의사한테 생체공학 로봇으로 개조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낫겠어.
옥스는 자기 다리를 강하게 내리쳤지만, 조금 저리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인공삽입물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지만, 옥스가 가진 병은 장기의 일부를 교체한다고 치료되는 병이 아니었다.
그럴 순 없어요! 그렇게 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걸요!
황금시대에 제너럴 토이 컴퍼니가 구조체 기술을 기반으로 생체공학 로봇 기술을 개발했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로 사람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하녀는 옥스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옥스의 아버지가 리처드 의사에게 부탁한 내용을 엿들었는데, 검진할 때 옥스 몰래 생체공학 로봇으로 개조 가능성을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옥스 도련님은 인간인데...)
흥,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로봇은 인간을 모방한 장난감일 뿐이잖아.
옥스는 이런 황당한 생각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학교 친구들이 날 초대했어, 이 게임에서 랭킹 1위에 도전하자고 말이야.
잘됐네요. 친구분들이랑 같이 놀면 도련님에게도 좋은 거잖아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즐거운 걸 많이 하면 병세가 호전될 거라고 하셨어요.
난 거절했어. 이 몸으로는 랭킹 1위는커녕, 집에 있는 게임도 제대로 못 하고 있잖아.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어!
도련님.
난 로봇이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점수를 올리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는 거라면...
아버지께 회사에 있는 최신 로봇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연락해. 내가 폐인이라고 해도, 이런 요구는 들어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제너럴 토이 컴퍼니에서 새로 개발한 스마트 로봇이 저택으로 보내졌다. 다양한 분야에 로봇이 투입됐던 황금시대엔 특화된 로봇이 대량 생산됐었다.
안녕하십니까. 출고 설정이 완료됐습니다. 혹시 제 주인님이신 옥스가 맞으십니까?
맞아. 이 고철이 이렇게까지 유창하게 말할 줄은 몰랐네. 역시 우리 회사의 최신 제품이야.
본 기체의 호칭을 "고철"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넌 이름이 필요 없어. 넌 내 도구일 뿐이야. 알겠어?
로봇이 인간의 동작을 모방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옥스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로봇은 어째서 인간을 모방하는 거였을까?
알겠습니다. 명명 단계를 건너뛰겠습니다. 본 기체는 어떤 상황에 당신에게 응답해야 합니까?
귀찮아 죽겠네.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그러면서 스마트 로봇은 무슨.
본 기체의 판단 말입니까...?
로봇은 오랫동안 어려운 연산에 빠진 듯,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고장 난 거 아니지? 이제 그건 신경 쓰지 마. 네게 맡길 임무가 하나 있어.
맡겨만 주세요. 어떤 임무입니까?
로봇은 마침내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을 받았다. 이로써 끊임없이 연산하던 그 문제의 우선순위를 잠시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옥스는 매우 기뻐하며, <노르만의 영웅 11>의 케이스를 꺼내 로봇한테 보여줬다.
이게 뭔지 알겠어?
이건 <노르만의 영웅 11>입니다. <노르만의 영웅> 시리즈는 올해 발매된 TR-1200 게임기 플랫폼의 게임 프로그램입니다.
네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내용을 읽으라는 게 아니야. 넌 이제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 돼.
확인 부탁드립니다. 본 기체에 게임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스마트 로봇은 인간의 모든 방면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인간의 수많은 일을 분담했으며, 여러 도움을 줬다. 하지만 로봇에게 "게임"을 하라는 명령은 한 번도 없었다.
확인한다고. 내 명령에 따라 이 게임을 플레이해. 그리고 랭킹 1위도 달성해 와.
다시 확인 부탁드립니다.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선 목표의 서버에 침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당 서버엔 부정행위 방지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건 불법행위...
로봇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스에게 머리를 한 대 맞았다.
이 바보야. 누가 게임 서버를 침입하래. 이거 받아!
옥스는 자기가 들고 있던 게임 컨트롤러를 로봇의 손에 쥐여준 뒤, 두 손을 활짝 폈다.
이게 뭐지?
주인님, 그건 주인님의 손입니다.
옥스가 로봇의 손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뭔데?
제 손 부품입니다.
아니야. 오늘부터 네 손은 내 손이야. 알겠어?
이 손을 사용해서, 인간의 방식으로 내가 상상하는 조작과 아이디어를 검증해 줘.
본 기체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이용해, 전자기기에 직접 연결하는 걸 권장해 드립니다. 이는 계산 시간을 크게 단축해, 원하시는 최선의 방안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의미란 무슨 뜻입니까?
옥스는 귀찮아하며 로봇의 말을 끊은 후, 로봇의 머리를 툭툭 쳤다.
잘 들어. 나는 네게 최고 우선순위의 명령을 설정해달라고 했어. 네가 온라인에서 랭킹 1위의 점수를 받으면, 조작 기록이 저장된 후, 모든 인격 데이터가 삭제될 거야.
난 "내 힘"으로 랭킹 1위를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넌 처음부터 끝까지 내 도구일 뿐이야. 알겠지?
옥스가 큰소리로 로봇을 질책했다. 이는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거였다. 로봇에게 게임을 시키는 건 옥스가 자신에게 허락한 가장 큰 "부정행위"이었다.
로봇은 옥스가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인 행동을 명령하고, 자신에게 수많은 제한을 두는 게 뭘 위함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로봇일 뿐이기에, 행동의 의미를 몰라도 괜찮았다. 로봇은 프로그램 코드의 설정대로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로봇은 주인이 건네준 컨트롤러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후, 옥스의 안내에 따라 스크린 속의 게임 캐릭터를 조작했다.
로봇은 그제야 이 명령이 자신이 예상보다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의 손은 게임기의 컨트롤러와 맞지 않았으며, 전자두뇌로 연산한 결과와 실제 상황에 지연이 있었다.
전선이 얽혀 전원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뿐더러, 심지어는 문밖의 새가 시끄럽게 굴어도 중요한 효과음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이 모든 건 그 로봇에게 있어 큰 도전이었다. 아무리 인간보다 연산 능력이 월등히 높은 로봇이더라도, 이 낯선 도전에 대해 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로봇은 어색한 자세로 게임을 했다. 옆에 있던 옥스는 로봇의 모습을 보고 웃음만 지을 뿐, 화를 내거나 조롱하지는 않았다.
에휴... 그래도 괜찮아. 다시 해봐.
"Restart" 버튼을 누르면 다시 도전이 시작됐다. 그러면 로봇은 모든 연산 능력을 동원해, 손에 든 컨트롤러와 눈앞의 스크린에만 집중하곤 했다.
옥스는 항상 로봇 옆에서 어떻게 하면 점수를 올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했다. 여러 번 도전한 결과, 로봇의 순위도 확실히 높아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에서 시끄러운 새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고, 주인의 명령도 더 이상 받지 못했다. 눈앞의 스크린엔 항상 검은색을 유지했다.
검사 결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전력이 끊겼습니다. 임무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로봇은 옥스의 임무 변경 명령을 기다렸지만, 끝내 대답을 받지 못했으며, 기다리는 동안 긴 시간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로봇은 이곳을 떠나, 옥스를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로봇은 저택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습격당해 파괴됐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퍼니싱"이라는 단어를 듣게 됐다.
파괴된 로봇은 쓰레기장에 아무렇게 버려졌다. 다행히도 전자두뇌는 심하게 파손되지 않았다, 다만 휴면 모드 상태에 진입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외부 에너지 연결로 활성화되어, 휴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작동을 멈추지 않은... 동료다...
시력이 돌아온 로봇은 눈앞의 뭔가를 바라봤다. 그건 한눈에 봐도 로봇이었으며,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예술가를 도와 안료를 바르는 도색 기계였다.
혹시, 동료라는 건 본 기체를 말하는 겁니까?
동료... 저희가 대신... 수리했습니다.
도색 기계는 쓰레기 더미에서 로봇을 일으켜, 쓰레기장의 다른 한쪽을 볼 수 있게 해줬다. 그곳의 벽엔 다채로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동료... 이건 저희가 그린 새 작품입니다. 선현님의 의지를 머릿속에 새겨두십시오.
그 화면은 로봇의 시각 센서를 통해, 분석 코어로 전송됐다. 그러자 겪어보지 못했던 데이터가 파도처럼 몰려와 그의 전자두뇌를 가득 채웠다.
전...
도색 기계가 몸을 흔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엔 각양각색의 로봇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동료... 저흰 선현님을 찾아야 합니다.
머뭇거리던 로봇은 다른 로봇에 둘러싸여 휩쓸려갈 뻔했지만, 결국엔 따라가지 않았다.
로봇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로봇이 처음에 받았던 우선순위의 명령과 주인님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옥스 도련님, 이젠 해야 할 일을 제가 스스로 정해야 합니까?
로봇은 문득 손에 컨트롤러를 들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곧이어 컨트롤러의 버튼을 누르자,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왜... 옥스 도련님이 그에게 게임을 가르치려고 했는지, 왜 그렇게<노르만의 영웅 11>의 1위에 집착한 건지 알고 싶었다.
1위라는 목표를 완수하면 정말 뭔가를 깨닫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그날이 온다면, 로봇의 인격 데이터는 완전히 삭제될 거였다.
……
로봇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는 다른 로봇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으며, 처음으로 확실한 답이 없이 황야 같은 미래를 향해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