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후... 윽...
엄청난 열기가 루시아의 기체에서 뿜어져 나왔다. 옆에 있던 휴머노이드 구조체가 접촉하려다가 재빨리 손을 움츠렸다.
괜찮아? 윽! 너무 뜨거워!
일반 구조체였다면 이 정도의 고온에서는 과열 보호로 진작에 다운 상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건 기체 내 각종 안전 잠금을 강제로 뚫어서, 이 기체의 성능이 이론상의 상한선을 돌파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승격자의 힘?
귓가의 속삭임은 사라졌다. 하지만 루시아는 자신의 의식의 바다가 무언가와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던 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라미아의 시점에서 본다면, 자신을 구해준 백발의 구조체 몸에서 공기가 뒤틀리는 고온 외에도, 붉은색 불꽃이 끊임없이 튕기고 있었다.
나한테서 떨어져!
루시아의 호통 소리에 라미아는 놀란 개구리처럼 튀어 오른 뒤, 10미터 떨어진 폐허의 벽 뒤에 빠르게 숨었다. 그리고 루시아 방향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 관찰했다.
루시아의 의식은 비바람에 흔들리는 한 척의 고독한 배 같았다. 잡음 같은 속삭임은 사라졌지만, 관측할 수도, 구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데이터 스트림이 루시아의 의식의 바닷속에서 해일을 일으켰다.
파도 위에 비친 희미한 영상이 "루시아"라는 고독한 배를 덮쳐서, 루시아를 바다 밑으로 빨아들이려 했다.
하, 거의 다 손에 넣을 수 있었어. 미꾸라지 같은 인어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고!
방금 그 여자 지난번 임무에서 대원과 지휘관을 모두 잃고, 공중 정원에서 대기 중이라는 그 루시아 아닌가?
상부에서 비밀 임무를 내렸거나 정화 부대에 들어간 게 아닐까?
이럴 리가 없는데, 군복의 소대 로고가 아직 그레이 레이븐인 거 못 봤어?
왜 우린 운 나쁘게 그녀와 딱 마주치게 됐을까? 마지막에 그녀의 기체 상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우린 죽었을 거야.
이제 어떡해? 공중 정원은 돌아갈 수 없고, 승격자의 임무도 완료하지 못했잖아.
다른 기회를 찾아보자. 어차피 보라색 머리 구조체의 흔적을 찾아도 승격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고 했잖아.
윌이 이런 일은 잘하는데, 따라오지 않아서 아쉽네.
그 녀석은 바보야. 평소에 공중 정원을 제일 심하게 욕했는데, 기회가 찾아왔을 땐 되려 움츠러들면서 본부에 보고하려고 했잖아. 겁쟁이가 따로 없어.
그래도 옛 대원인데 그렇게 말하지 마.
가식 떨지 마. 맨 처음으로 총 쏜 게 바로 당신이잖아?
난 그냥 고통 없이 가게 해주려고 그랬어. 누구는 윌의 역원 장치를 꺾어서 침식체로 죽게 내버려 둔 거야?
그냥 화풀이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윌이...
닥쳐!
워커의 말이 클라렌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허리춤에서 바로 총을 뽑아 들었다. 워커도 이에 질세라 총을 꺼내 대치했다.
그만해! 언제까지 소란을 피울 거야?
채드가 호통쳤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대장으로서의 권위는 채드가 배신을 결정하고, 윌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면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지 못하는 청산에 대한 공포,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초조, 일을 망친 루시아에 대한 원망...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마음속에 천천히 쌓이면서 이성의 가는 실타래를 흔들었다.
모든 이가 서로에게 더 많은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고, 상대방의 아픈 곳을 콕콕 찌르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결백이 증명되는 듯했다.
아직은 쌩쌩한가 보네. 중간에 승리의 열매를 빼앗겨서 선택받은 용사들이 기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때아닌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어느새 한 구조체가 옆에 있는 폐허 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오셨어요? 아직 약속된 시간이 아니잖아요?
눈앞에 자신을 "롤랑"이라고 말하는 구조체가 궁지에 몰린 그들을 찾아왔다. 침식체가 롤랑의 손에서 꼭두각시처럼 명령에 따르는 걸 보고, 그들은 "승격자"에 관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게 됐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난 너희들이 걱정돼서 온 건데.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부름받은 용사들도 인도자가 필요하잖아? 아니야?
저희를 도와주시려고요?
너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어. 너희가 찾아야 하는 그 구조체는 이미 이곳을 떠난 것 같아.
그게 무슨 좋은 소식이에요?
더 이상 헛수고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럼, 좋은 소식 아니야?
저희를 갖고 노시는 건가요?
상대의 여유롭고 덤덤한 태도를 본 채드는 롤랑에게 무기를 겨누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침식체를 제어하는 롤랑의 능력에 겁을 먹고는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원한과 증오로 가득 찬 마음으로 동료에 대한 학살을 묵인했을 때의 색다른 쾌감과 롤랑이 말한 "1차 선별"을 통과한 이상, 채드는 롤랑과의 충돌 때문에 이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희가 뭘 하면 될까요?
간단해. 전처럼 그 인어를 처리하기만 하면, 마지막 단계를 진행할 수 있는 이에게 데려다줄게.
알겠어요.
하지만...
입 다물어요! 다른 일 없으시면 저흰 먼저 가도 되죠?
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손짓했다.
채드, 워커, 클라렌스는 곧 롤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롤랑은 이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귓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잠시 후, 롤랑은 웃으면서 혼잣말했다.
앞에 강한 적이 있다고 움츠러들어서 적진에 배신한 용사는 결국 bad ending을 맞이하게 되지.
롤랑은 품에 손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막을 내릴 때가 됐으니, 너희에게 성대한 폭죽 쇼를 선물할게.
작동하지 않는 스파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고, 굉음 때문에 불편한 소리 감지 장치를 몇 번 두드린 롤랑은 가뿐히 폐허에서 내려왔다.
다음은 그곳의 상황이나 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