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3 연주로 엮인 서문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

ER13-11 헤바를 기다리며

>

함교에서 다소 좁은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매달린 환형 조명이 켜지며 빛을 뿜었다.

홀로그램 투영이 희미한 푸른빛의 항성도와 데이터를 투사했다. 인간은 하나씩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중요한 내용은 없어 보였다.

저희가 잘못 짚은 것 같아요. 이건 에덴 Ⅲ형 연합 함선이 아니라… 쿠로노의 함선이에요.

한참 조사를 이어가던 오블리크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특정한 누군가 혹은 과거와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보였다.

승격자는 왜 이곳을 드나든 거지?

어쩌면...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비행선 내부의 조명이 갑자기 눈부신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통합 알림 스크린에 데이터 스트림이 무질서하게 깜빡였다.

곧 두꺼운 합금 격벽이 벽 안에서 하나씩 미끄러져 나왔고, 각 구역이 순식간에 자동으로 잠기며 비상 통로만 남게 됐다.

잠...!

앞쪽에서 탐색하던 팔지가 몸을 돌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특수 합금 격벽 뒤로 갇혀버렸다.

인간은 통신이 완전히 차단된 격벽을 두드린 뒤, 통신 채널로 팔지와 헤바를 차례로 호출해 봤지만,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무감각하게 흘러갔다.

지휘관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열 시간, 몇십 시간, 과연 얼마나 지났을까?

자연광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변화 없는 공간이었다. 느껴지는 배고픔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 갇힌 지 하루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쉴 수 없었던 인간은 좁은 회의실을 여러 차례 살펴보았지만, 끝내 함선의 제어 시스템을 불러오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끔 잘못 송출된 영상이 나타났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이 함선은 중대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후 지상 정보기관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이곳은 함선의 중간층이었고, 회의실 인터페이스에서는 수백 시간에 달하는 정례 보고 기록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데이터는 대부분 삭제되거나 외부로 이전된 상태였다.

성과 없이 자리로 돌아온 인간은 오블리크의 특제 가위가 격벽을 뚫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유효한 공격을 가하려면, 날카로운 무기보다는 기계 손이 더 효과적일 것이고, 반대편에 있는 팔지도 분명 같은 생각으로 처음부터 시도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도 아마 외부에 있는 헤바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일 것이다.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이대로 계속하다간 무기가 먼저 망가질 것 같았다.

방법이 없네요.

푸른 머리의 구조체가 미안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괜찮으세요?

...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오블리크는 잠시 생각하더니 안도한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새 기체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헤바를 기다린다고요.

헤바가 올지, 안 올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블리크는 새 임무 내용을 조용히 되새기며 가위를 내려놓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그녀의 몸은 체르노프 가면이 끊임없이 투영되는 영상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빛 사이로 깊은 공허가 드러났다.

그 입체적인 얼굴들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결국 단순한 통계와 실험 데이터의 시각화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고통에 찬 얼굴 군상이 갑자기 자비를 구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일그러지고 오염된 빛의 장막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서로를 추악하다 비웃는 얼굴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 중 하나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머리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가 교란으로 인해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인간이 곧바로 그녀와 연결을 시도했다.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거대한 그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 전의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들 사이로, 오블리크가 몸을 꼭 웅크리고 있었다.

결국 그 기억들이 떠오르게 된다고 해도, 그때의 강렬한 감정들은 정말 제 것이 맞을까요?

이 모든 게 가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행복했던 기억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남의 일처럼 느껴져요…

인간의 위로는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그는 눈앞의 구조체와 단단히 연결된 채, 그녀를 얽매던 과거와 감정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동기화하고 있었다.

지금의... 저를요?

...

과거의 저는, 임무만 수행하며 현실을 외면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겹겹이 쌓여 있던 불완전한 나날들을 지나, 그녀는 마침내 감정 미세 조정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제야 자유롭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임무 이외의 것들이요?

오블리크는 손에 힘을 빼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인간이 굳게 믿고 걸어가는 이상의 길을 떠올려 보았다.

의식의 바닷속에서 그 대답이 들려오자, 꿰매진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도 소중히 여기는 게 많아.

나중에 소중한 걸 찾게 되면… 그때 또 얘기해 줘.

...

예전에 슈트롤이 저한테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슈트롤은…

...반즈.

오블리크가 조용히 그 이름을 읊조렸다.

오블리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수년간 답을 찾지 못한 채 남아있던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네가 아끼고,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결국 어떻게 됐어?

결코 잊히거나 짓밟힌 것이 아니었다.

슈트롤, 반즈, 팔지, 헤바, 바렐리아 그리고 [player name]...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 한 올이었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뻗어 나가면서 결국 모두를 하나로 엮었다.

그 실은 더 이상 얽매이고 가로막는 그물이 아니라, 단단히 연결되어 서로를 지탱하는 끈이 되었다.

어떤 질서 있는 연상의 흐름 속에서,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더는 마인드 표식을 출력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오블리크 곁에 앉았다.

한때 저는, 제가 소중히 여겼던 이들이 모두 저를 버리고, 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어요.

장례도, 마지막 인사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와 내일, 둘 중 무엇이 먼저 찾아올지는 늘 예측하기 어려웠다.

구조체는 인간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저는...

오블리크는 자신만의 답을 가다듬고 있었다.

인간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구조체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 함선이 다시 살아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닫혀 있던 격벽이 미끄러지듯 열리면서, 붉은색이었던 조명도 녹색으로 바뀌었다. 상하층을 연결하던 구조물들이 안으로 접혀 들어가자, 선체 하층의 전모가 드러났다.

...통로 봉쇄가 해제된 것 같아요. 헤바가 성공한 걸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어둠 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건 회색 머리의 승격자였다.

그 녀석들 확실히 끈질기게 따라붙었지.

진짜일까, 분신일까? 살아 있을까, 아니면 소멸했을까?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 없어.

오블리크는 순식간에 자기장을 촘촘히 펼쳤다. 거대한 가위가 천천히 떠올라 예리한 빛을 반사하며,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오랜만이군, [player name]. 네 곁엔 항상 널 지키는 자들이 끊이지 않네.

움직임이 이렇게 빠른 걸 보니,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곳은 너희에게 아무 쓸모도 없어.

이 데이터에 담긴 암살자 명단도, 이젠 나한테 필요 없지.

승격자는 도발 하듯 손에 든 실물 칩을 허공에 투영해, 그것이 이번 임무의 진정한 목표임을 알려주었다.

그냥 한 번 보고 싶었다고 하면, 믿으려나?

...스토커.

...

...복수만 좇는다면, 그 끝은 좋지 않을 거예요.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승격자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주변의 퍼니싱을 조작하자, 의식의 바다에서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퍼졌다. 그 여파가 인간의 의식까지 스며들어 격렬한 고통을 일으켰다.

오염 데이터가 침식을 시도하자, 심층 연결 속에서 오블리크와 관련된 화면과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한 걸음, 조금씩, 오블리크의 음계가 서서히 멜로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 멜로디는 결국 노래가 되어갔다.

너도 한때는 쿠로노가 만든 도구였으니, 우리 사이에 나눌 얘기는 많겠네.

이를테면, 세상의 진실이 어떤 건지, 네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전 이미 충분히 진실을 알고 있어요.

그럼, 어느 쪽에 서야 할지도 알 텐데...

조용히 좀 하지.

승격자가 낫을 휘두르자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자기장이 산산이 부서졌다. 인간은 선체 벽에 강하게 눌린 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

그 순간, 오블리크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사나워졌다. 순환액에 젖은 송곳니가 드러나고, 살기가 서린 기운이 번졌다. 벌어진 가면과 냉각 장치에서 터져 나온 증기가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격이 시작됐다. 구조체의 그림자는 치명적인 사선과 함께 공간을 가르며 번뜩였지만, 승격자의 낫에 의해 모조리 베어졌다.

돌아온 칼날에는 승격자의 은회색 긴 머리카락 한 올뿐이었다.

실력이 나쁘지 않군.

내 말을 조금 더 들을 의향이 있다면, 이 데이터를 곧바로 넘겨주지. 그럼, 너도 수월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고, 우리 모두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

임무 완수!

신경이 폭주하듯 요동치며, 오블리크를 본능적인 조건반사로 몰아붙였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고개가 꺾일 듯했으나, 그녀는 한때 목을 옥죄던 수많은 속박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구조체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자, 승격자는 아쉬운 듯 칩을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낫을 움켜쥐고는 몸을 비틀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

뛰어내려. 네 목표는 바로 저기에 있어.

임무를 완수하고, 명령을 따라!

아니!

오블리크는 단호하게 환영을 부숴버리고, 새로운 공격에 맞섰다.

임무를 완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둘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좁은 공간에서 충돌했다. 승격자의 낫과 오블리크의 가위가 빠르게 교차하며 수차례 맞부딪혔고, 귓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가위의 날이 강한 저항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낫의 끝부분을 비틀어 부수려 했다.

에피알테스의 눈빛에 놀라움과 감탄이 스쳤다.

좋아. 누가 더 날카로운지 겨뤄보자는 거군.

승격자는 옆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여럿이 하나를 상대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승격자에게 차릴 예의 따위는 없어.

교착 상태가 깨진 것을 확인한 팔지는 전술 위장을 풀고,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뜻밖에도 에피알테스는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치하던 힘이 갑자기 풀리자, 오블리크는 반작용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가위를 땅에 꽂고 몸을 지탱했다.

미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팔지는, 무리하지 않고 재빠르게 몸을 빼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의식의 바다가 침식되고 있던 오블리크는 점차 제어 불능 상태가 되었다. 손에 들려 있던 가위가 힘없이 미끄러져,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인간은 모든 힘을 연결 유지에 쏟아부었다.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인간은 승격자가 아직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의 오블리크는 대답이 없었다.

알겠어!

앞으로 나선 팔지가 주먹에 속도와 힘을 실어 휘두르자, 잔영이 공기를 갈라놓았다.

뜻밖에도, 승격자는 오히려 방어 태세를 취하며 무기를 거두었다.

됐어, 더 이상 얽힐 생각 없다. 곧 네 동료들도 도착하겠지.

시간을 끌려는 의도를 간파한 에피알테스는, 오만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은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새 계획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공중 정원을 적으로 돌릴 생각 없어.

거래는 여기까지야. 이제 또 보지.

잠깐,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승격자가 뒤로 물러서자, 고밀도의 힘이 서서히 응축되기 시작했다. 중심부가 눈에 띄게 일그러지며 빛깔마저 변해갔다.

!

거리가 너무 가까워, 가위를 집어 들어 방어할 시간조차 없었다!

팔지는 손바닥을 아래로 향해 출력이 낮은 섬광을 발동시켰다. 적당한 힘 조절로 오블리크 앞으로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승격자의 광선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강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회섬은, 뒤로 계속 밀려나며 바닥에 두 개의 검은 자국을 남겼다.

뒤에 있던 오블리크가 난간의 가장자리에 부딪히자, 금속이 부러졌다. 여기에 팔지의 충격이 더해져 그녀는 그대로 아래층 깊숙이 추락했다.

당했어…

짧은 머리의 구조체는 일시적인 마비와 합선에서 벗어나자마자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승격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인간 지휘관은 연결이 끊긴 충격으로 심하게 어지러워하며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승격자가 응집한 고농도 퍼니싱을 막기엔, 회섬의 방어가 아직 부족해. 강도를 더 높여야겠어.

그녀는 기체 하반신에 깊이 패인 균열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자유롭게 움직이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 터였다.

완전히 산산조각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다행이야. 그 녀석,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

승격자들은 성격도 참 제각각이네.

짧은 머리의 구조체는 혀를 끌끌 차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오블리크, 괜찮아?

아래쪽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오블리크?

————오블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