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뭐라도 해봐!
설마... 설마...
안타깝지만, 이미...
소리가 사방에서 무작위로 울려 퍼졌고, 오블리크는 공허 속에서 몸부림쳤다.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했어. 더는 구할 수 없어. 이미 잃었어.
대체 왜, 왜 오블리크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을까? 늙은 재봉사, 로즈워터...
블라터, 아이시스, 리라코... 그리고 엘리너까지. 모두 그녀를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오블리크는 현실의 냉혹한 선고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리치고 싶었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 고통은, 화려한 전구가 연속해서 터져나가듯 폭발을 멈추지 않았다.
…방법이 없나.
마인드 표식이 오염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성갑충 소대로 보낸 게, 실수였던 건가…
성갑충 소대 휴게실
성갑충 소대 휴게실
Ⅴ, 내 생각엔 오블리크는 성갑충 소대와 맞지 않아.
성갑충 소대 휴게실로 성큼성큼 들어선 헤바가 의자를 힘껏 끌어당겨 큰 소리를 내며 앉았다.
팔지는 만화를 보고 있었고, 바렐리아는 단말기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헤바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죽으러 가는 건데, 정작 본인은 전혀 자각을 못 해.
...
팔지.
응.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성갑충 소대가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해체 위기야...
내가 본 만화들은 전혀 참고가 안 되네…
긴급회의 호출을 받고 갑작스레 자리를 떠야 했던 바렐리아는 떠나기 전, 팔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팔지는 씩씩대는 헤바를 억지로 자리에 앉히고, 냉장고에서 음료를 하나 꺼내 휙 던졌다.
이게 뭐야? 나, 유사 알코올은 안 마셔.
한정판, 박하 맛 발효 주스 전해액.
헤바는 대답하기도 전에, 탁하고 캔을 땄다. 팔지는 그걸 단숨에 들이키는 헤바를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그래, 이제 말해봐. 너와 오블리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잖아. 걔, 죽으려고 작정했다고.
성갑충 소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쓰이는 비장의 수단이자 숨겨둔 카드야.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대원과는 같이 임무 못 해.
걔는 죽으려고 작정했어. 언제든지 자신을 포기하고, 버리고, 사라질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
그래도 넌 오블리크에게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줬잖아.
...
미리 말해 두지만, 이번 상황이 다시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많은 이합 생물 사이를 혼자 뚫고 나가더니, 내 지시를 마치… 마치 기계처럼 정확히 수행했어.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좋다고? 걔는 망설임도 없었어. 의심도, 두려움도, 피로도, 아무것도. 내가 직접 알아보지 않았으면, 기체가 AI에게 잠식됐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니까.
예상치 못한 적이 튀어나와서 철수하라고 했는데, 오블리크는 소탕이 임무라고 하면서...
잠깐만, 평범한 지원 임무 아니었어? 언제 그렇게 많은 이합 생물이 나타난 거야?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수송기에 탑승했는데, 조종사가 자기는 죽기 싫다면서 우리를 이합생물들 속에 버리고 가려 했다니까.
팔지가 쓴웃음을 지었고, 헤바는 곧장 말을 이어갔다.
정신 상태가 완전 불안정해. 방금 전까진 터질 듯한 용암 같더니, 금세 아무 기척도 없는 사해처럼 고요해져.
그럴 리가… 네 말대로라면 오블리크는 진작에 의식 바다에서 편차 증상이 나타났어야 해.
헤바는 진지한 얼굴로 캔을 찌그러뜨리고, 기술을 쓰기 위한 준비 동작을 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
성갑충 소대 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큰 위기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V에게 주의하라고 할게.
그리고 헤바가 말했던 상황은, 이후 성갑충 소대 임무 중에 또다시 발생했다.
야! 오블리크! 일단 복귀해. 우린 특화 기체를 가진 그레이 레이븐이 아니라고!
팔지는 멀어져 가는 오블리크의 푸른 뒷모습을 바라보다, 옆에 남아 있던 헤바와 눈이 마주쳤다. 헤바는 저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먼저 뛰쳐나갔네.
Ⅴ, 이제 어떡하지?
적이 너무 많아. 나랑 헤바가 여기 막을 테니까, 넌 가서 오블리크를 데리고 와.
팔지, 조심해.
오블리크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슷한 풍경 속에서 눈앞의 적을 쫓다가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혼란과 막막함이 잦아들자, 그녀는 더 이상 임무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주기적으로 덮쳐 오는 우울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오블리크는 모래 늪에 빠진 것처럼, 저항할 틈도 없이 천천히 잠식됐다.
오블리크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이건 흔한 경험이 아니었고, 지상에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불안해할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희미해진 기억의 조각이라 치부하거나, 영적인 교감 같은 신비한 체험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건 기시감이었다.
오블리크는 이곳의 적들을 이미 여러 번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침식 구조체는 오블리크의 강력한 일격에 쓰러지면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어를 중얼거렸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해.
거대한 속임수였던 에덴 Ⅲ형 식민 함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편과 잔해들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 더 이상 그 위장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블리크는 먼지가 가라앉은 안쪽 공간을 빠르게 지나가다, 무너진 돌무더기 속에서 익숙한 황금빛이 스치는 걸 발견했다.
널 속박하고 있던 게… 드디어 사라졌어.
오블리크는 자신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표 사망 확인. 이제 자료만 가지고 철수하면 돼.
그때 갑자기 거대한 파편이 위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던 홀로그램 프로젝터에 부딪치며 수많은 잔해로 흩어졌다.
오블리크가 움직이려는 순간, 뒤쪽에서 보랏빛 월산이 날아와 오블리크를 대신해 쏟아지는 파편들을 막은 뒤, 다시 회전하며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
이상주의에 눈이 먼 그 세대는 낙관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인간의 기술 발전이 곧 인간 도덕성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이어질 거라 믿었어.
하지만 우리 같은 소모품들을 보면, 입에 달고 살던 "평화와 발전"이라는 말도 언젠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찬미하듯 비꼬는 말투는 오블리크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그 지식을 냉소적이고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누구나 포탄 한 방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겠지. 난 죽지 않을 거고, 좋은 이야기들을 놓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만약 내가 그 포탄을 직접 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짜릿한 게 있을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얼굴을 감싼 릴리스는 광기에 젖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늘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자랑했다.
엘리너...
익숙한 한숨 소리에 눈앞의 구조체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과거의 연약하고 우아하며 부드러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둘은 이것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단순한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나 관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장갑을 벗어 던진 승격자는 격식과 형식을 내려놓은 채, 달빛처럼 희고 고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 위로 기계의 관절과 단단히 맞물린 톱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럼, 넌 엘리너를 위해 내 편에 서줄 거야?
오블리크는 떨림을 억누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의 생각들은 더 크고 날카로운 가위에 잘려 나가듯 무참히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영원히 내 협력자가 되면 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좋잖아?
괴로움? 슬픔? 죄책감? 불만? 절망? 분노? 실망? 질책? 막막함? 희망? 결별? 선택?
선택?
선택?
선택?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남은 건 정리되지 않은 혼란, 뒤엉킨 실타래 같은 공허함뿐이었다.
오블리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에덴"의 가상 하늘도 어둠을 충실히 재현했다. 그림자 하나가 다른 그림자에게로 다가와, 마치 포옹하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동료든 적이든 관계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무 의미가 없게 됐네.
맞아요. 우리는 이미... 작별을 고했었어요.
아무 생각하지 않고, 날 따라왔으면 좋았을 텐데.
식물이나 곤충이 빛을 쫓는 건 당연한 거야.
넌 애초에 명령이 없으면 뭘 해야 할지 모르잖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전 줄곧 엘리너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누구의 명령도 아닌, 그저 제가 원해서!
넌 그저 네 안의 나약함과 다시 마주하기 싫었던 거야.
내면의... 나약함. 마음속 깊은 곳, 찔리듯 아팠던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나더니, 조용히 오블리크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어?
...
전 제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당신을 따라가기로 했던 거예요.
어릴 적에 심연과 어둠 속에서 저를 끌어준 것도, 바로 당신이었잖아요.
그 말을 내뱉자, 오블리크의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오랫동안 눌려 있던 짐이 내려간 것처럼, 그녀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 몸이 어떤 의지를 지녔는지, 너도 잘 모르잖아.
남의 뜻을 따르는 데만 익숙해진 나머지, 네가 스스로 선택해 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거야.
넌 결국 돌연변이일 뿐이야. 조화로운 멜로디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 불협화음이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신분은 낮고, 과거는 더러워. 넌 쿠로노의 수많은 그림자 속 암살자들과 다를 바 없어.
그들이 희생을 요구하면, 넌 그저 거대한 기념비에 새겨질 이름 중 하나가 될 것이고, 그들이 헌신을 원하면, 넌 네 스스로를 묻어야겠지. 아무도 네 감정을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아.
넌 영원히 자아가 없는 협력자로 남을 뿐이야. 소속도 목적도 없는 떠돌이 개처럼 말이지.
전 당신을 소중히 여겼어요...!
하지만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제 눈앞에서 사라졌잖아요...
오블리크는 두 다리를 다시 얻었으니, 이제 상대방에게 앞으로 나아갈 자유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블리크는 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치 바느질하듯 영혼의 형상을 한 땀 한 땀 그려 내려 했다.
하지만 릴리스의 제비꽃 같은 눈동자에는 단 한 번도 오블리크가 비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전 아무 쓸모도 없는 떠돌이 개가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에게 가장 먼저 버림받을 존재도 아니었어요!
오블리크의 분노와 절규 속에서, 릴리스가 펼쳤던 두 팔은 마치 무도회의 마지막 동작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그렇구나.
하지만, 세계의 탑 꼭대기는, 애초에 신발 뒤꿈치 하나조차 간신히 올릴 수 있을 만큼 좁아.
릴리스는 오블리크를 스쳐 지나가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순간, 오블리크는 마술로 인해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오블리크는 우산 끝이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오는 걸 보았다. 조금 전 눈앞에서 산산조각 났던 구조체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오블리크가 절망 속에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의식의 바다에 쓰나미와 산사태가 한꺼번에 덮쳐왔고, 감각 시스템은 경보음을 쏟아내며, 그녀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너에게 주는 이별 선물이자,
마지막 명령이야. 다신 날 찾지 마.
그녀의 실이 촉수처럼 뻗어 나와, 부서진 기억과 조작된 환영을 잠시 이어 붙였다.
하지만 그 힘은 곧 사라졌고, 실은 눈처럼 녹아내리며 붉은 만주사화마냥 흩어졌다.
그때 이런 말을 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다시는… 후회를 남기지 마.
이름 모를 소녀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장면은 물결처럼 밀려 나가며 서서히 희미해졌다. 오블리크는 문득 이 모든 경험이 머지않아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좋은 꿈 꾸길…
오블리크, 일어나. 이제 깨어날 때가 됐어.
오블리크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수국꽃으로 가득한 인공섬이 아닌, 끝없는 황량한 모래바람이었다.
팔지는 기계 팔로 그녀를 부축하며, 거센 바람을 뚫고 신호가 가리키는 집결지로 한 발 한 발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임무는요?
하? 이런 상황에서도 임무부터 물어보네? 적 한복판에서 널 구해준 나한테 고맙다는 말이 먼저 아니냐?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방금, 꿈이라도 꿨어?
...
오블리크는 애써 기억해 보려 했지만, 짧은 숨을 고르는 사이 생각은 끊겨 흩어져 버렸다.
꿈이었나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흠… 이게 바로 헤바가 말했던, 방금 전엔 용암, 그다음 순간엔 사해라는 상황인가?
...헤바요?
탄약과 총기가 전부 사라졌다. 오블리크는 본능적으로 몸에 있던 무기를 확인하느라, 팔지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점쟁이... 헤바가 네 걱정 많이 했어.
팔지는 오블리크를 기계 팔에서 내려주고, 깊게 숨을 내쉰 뒤 앞장서서 걸었다.
오블리크는 헤바가 화난 듯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헤바의 이마에 있는 "눈"에서 은은한 녹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걱정하는 표현이었을까? 오블리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임무에서 성갑충 소대는 그냥 보험일 뿐이야. 케르베로스 소대가 이미 진짜 목표를 포착했어.
Ⅴ와 합류하러 가자.
둘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팔지는 오블리크 앞에서 걸으며, 바람을 일부 막아주고 있었다.
내 기체엔 모래 필터 장치가 탑재돼 있어. 예전에 공중 정원 군부가 지상 임무에서 겪은 고생 덕분이지.
게다가 발에 감압 기능이 있어서, 네 기체처럼 무게 때문에 모래에 파묻힐 일은 없어. 물론 적응하려고 훈련할 땐 꽤 고생했지만 말이야.
짧은 머리의 구조체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리다가, 결국 참아왔던 말을 꺼냈다.
네가 어떤 지옥 훈련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네 행동 때문에 다른 대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
죄송해요. 누군가가 절 구하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뭐?
당연히 구하러 가야지! 너 그때 적조에 삼켜질 뻔했다고!
저를 공격하는 건 괜찮아요. 수류탄이든, 고출력 펄스건이든 상관없어요. 임무를 완수려면, 미끼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
팔지는 조금 분노가 치밀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죽고 싶어 안달 난 거야?!
황사가 매섭게 휘몰아치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하에서 수많은 이합 생물들이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팔지는 땅을 내려치며, 마지막 말을 폭발하듯 토해냈다.
오블리크는 가면을 쓰고 황사 속의 열원을 추적했다. 남은 무기들도 형태를 바꾸며, 전투태세를 단단히 갖추었다.
한 마리의 이합 생물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으나,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두 동강 나고 말았다.
...
왜냐하면… 저는 죽음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으니까요…
단지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이다...
그저 그 목표를 위해 끝없이 베고, 또 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성갑충 소대의 대장은 이 모든 게 사실 오블리크 안에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던 고통의 표출이었음을 깨달았다.
부랑아에서 재봉사, 하녀에서 요원, 정화 부대를 거쳐 성갑충에 이르기까지, 오블리크는 늘 자신을 의미 없는 존재라 여겼었다.
만약 과거의 시대였다면, 의사는 그녀에게 탄산리튬이나 할로페리돌을 처방해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에 생긴 병을 제대로 봐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고, 잊힌 난파선처럼 시간과 어둠에 완전히 삼켜질 날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지난번 수국화 섬 전투에서...
그대로 깨어나지 않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한 적 있잖아요…
환상 속에 사는 건 분명 편해.
하지만 난 그 환상에서 나왔어.
많은 사람들한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현실을 마주하겠다고 약속했거든.
...
모두가 당신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당연하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조금씩의 흠은 있어.
오블리크의 기억이 갑자기 요동쳤다. 전류 신호가 대뇌피질을 간지럽히는 느낌을 재현하자, 그녀는 작은 금속 조각을 떠올렸다. 매끄럽고, 체온까지 전달되는 그 "흠"이었다.
나는 많은 이들의 손길과 지도를 받으며, 한 걸음씩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팔지는 출력 과다로 달아오른 두 손을 가슴 앞에 펼치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내가 계속 환상 속에 머물렀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오블리크는 앞서 걸어가던 팔지가, 모래 폭풍의 울부짖음을 뚫고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 멜로디… 조금 전, 어딘가에서 들었던 노래 같았다.
이제 그만 가. 이번엔 정말로 안녕이야.
어서! 내 용기까지 다 끌어모아서, 한 번에 돌진해!
다행이야… 넌 도망쳐 나왔구나.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자책하지 마.
그 꿈속에서 어떤 이는 장교가 됐고, 어떤 이는 영웅이 됐고, 또 어떤 이는 군복을 벗고 평범한 삶을 살았어.
그런데 넌 정원 고등학교에 남아있었어.
가장 좋은 꿈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어야 해.
가늘게 이어지던 교가의 멜로디는, 계속 나타나는 적들 때문에 뚝 끊겨버렸다.
전갈 형태 이합 생물?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군!
회섬 기체가 내뿜은 암야 돌진의 폭발이, 이곳을 휘감던 회오리바람을 몰아내자, 주변이 번개구름 같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적 무리가 잠시 흩어지며 작은 틈을 보였지만, 곧 다시 몰려들었다.
전투가 길어지자, 둘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합 생물에 휘말려 점점 더 위험해졌다.
안 돼!
거대한 이합 생물들이 휘감고 있는 가운데, 팔지는 곁눈질로 오블리크가 다친 걸 보았다. 그녀의 순환액이 터져 나와 흙 속으로 스며들었고, 움직임은 점점 느려졌다.
더 많은 괴물들이 지하에서 솟구치듯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울부짖으며 오블리크를 에워싸고, 그녀를 모래 지옥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어서... 가세요!
푸른 머리의 구조체가 무기를 힘껏 던졌다. 날은 정확히 팔지를 붙잡고 있던 괴물의 머리에 꽂혔지만, 그와 동시에 오블리크의 몸도 절반쯤 모래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아... 하아...
왜 또... 이렇게 됐지?
기계 팔은 냉각 충전에 들어갔고, 팔지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그때, 전갈형 이합 생물이 꼬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팔지, 집중해.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 지난번에 외우라고 한 회로 개조 방법도 결국 쓸모가 있었잖아.
귀찮아. 네가 할 줄 알면 됐지.
뭔가 예감이 안 좋아.
마침 내가 없을 때 문제 생기면 어떡하려고?
말 좀 그만해. 그 점쟁이처럼 예언이라도 하려고?
내가 대장인 이상, 잔소리를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어서 뛰어!
왜 뛰어야 하는 건데?
얼른 안 뛰면, 우리 명성이 자자한 Ⅴ 코치님께서 상단 차기 20세트 더 추가할걸?
팔지는 서둘러 따라갔다.
그게 무슨——!
하얀 선이 그려진 트랙이 황금빛 노을로 물들었다.
팔지는 늘 성갑충 표식이 새겨진 대장의 어깨띠가 볼품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그 순간만큼은, 끝없이 흐르는 맑은 강물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다 슈트롤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의 커다란 몸집이 노을 아래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앞질러 가던 팔지는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팔지는 더는 앞으로 가지 않은 채 제자리걸음 하며, 대장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팔지, 난 여기까지야.
오늘 왜 그래? 벌써 힘들어?
응, 좀 힘드네.
여기까지만 할게.
슈트롤은 육상부의 자존심이자 상징이었던 어깨띠를 천천히 풀어 내렸다.
하지만 팔지, 넌 계속 달려야 해.
슈트롤은 진지한 표정으로 어깨띠를 팔지의 어깨 위에 올렸다.
성갑충 소대의 대장이 되어, 모두를 이끌고 달려가.
나중에 고마우면, 간식 넉넉히 챙겨 오는 거 잊지 말고.
슈트롤의 모습이 서서히 검은 실루엣으로 번지더니, 경계부터 흩어지며 사라졌다.
팔지는 눈앞에 펼쳐진 트랙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유령이 돼서도 내 귀에 잔소리할 줄 알았어.
지금은 그녀를 도와줘야 할 때야.
Ⅴ... 나더러 대장이 되라고 한 이유가 이거야?...
친구야, 달려! 달리는 동안에는 모든 고민을 잊을 수 있으니까!
팔지는 하고 싶은 말도, 쏟아내고 싶은 감정도 많았지만, 입을 다문 채 오직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다.
아아...
으아아아아아!
팔지는 포효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한 번, 또 한 번, 과거의 환영들을 힘껏 몰아냈다.
주먹의 궤적이 바람을 갈랐다. 팔지는 파란 구조체가 사라진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져,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꿈은 깨어날 수 있기에 더 아름다운 거야!
회섬 기체에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고, 주변의 모래들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팔지는 멈추지 않고 출력을 더 높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현실과 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꿈으로 그들의 성장을 놓치게 만드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이번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먼저, 똑바로 눈을 뜨고 걸어가는 사람이 될 거야.
슈트롤, 내가 너만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침내 그녀의 두 손이 오블리크를 붙잡았고, 둘이 함께 가라앉는 걸 막아냈다. 겨우 버티고 있는 동력 팔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게, 내 선택이야!
다시 빛을 보기까지, 그 시간은 짧으면서도 길게 느껴졌다.
푸른 머리의 구조체는 부서진 몸을 겨우 일으켰다.
습격은... 끝난 건가요?
사방은 적의 잔해로 가득했다. 가까운 곳에는 짧은 머리의 구조체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고, 그의 기계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오블리크를 향해 Ⅴ를 그렸다.
난 더 이상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아. 오블리크, 너도 마찬가지야.
한 번, 두 번...
몇 번이라도 반드시 널 구하러 갈 거야.
눈앞의 문이 굳게 닫혔고, 모든 사람이 문 너머의 냉혹한 기다림 속에 갇혀 버렸다.
한 번, 두 번,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인간의 뇌사 상태와 증상이 비슷합니다. 성갑충 소대 대원 오블리크는... 이미...
그럴 리 없어!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팔지를 헤바가 막아섰다.
증상만 비슷한 거죠? 의식의 바다는 어떤가요?
연결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외상은 없잖아요. 새 기체 영향 때문인가요? 기존 기체로 다시 변경할 수는 없나요?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해 볼 게요!
짧은 머리의 구조체는 힘없이 유리창을 두드릴 뿐이었다. 어두운 화면 속, 생명선 대신 곧게 뻗은 직선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야...
오블리크! 일어나!
...
오블리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