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체 중 일부는 평범한 가정을 잃고, 더 이상 선택지가 없어 이 길을 걷게 되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무기나 소모품으로 여겼고, 누군가는 폐허가 된 전장에서 버티기 위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오블리크는 효율적인 정화 기계처럼 묵묵히 일했다. 성실하고 능력도 뛰어났으며,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동료까지 처리해야 하는 정화 부대임에도 그녀는 한 번도 흔들리거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오블리크는 별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간단해. 쿠로노 쪽은 이제 폴라드와 관련된 일에는 더 이상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아, 너도 그중 하나인 거고.
세계 정부 앞에서 간신히 혐의를 벗었는데, 또다시 문제가 될 만한 빌미를 남기고 싶겠어?
정리하면, 지금부터 네 고용주가 바뀐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동료.
오블리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핵심 임무와 비밀 임무, 그리고 중대한 임무는 대개 도구나 조연과는 무관했다.
하지만 밀려난 조연에게도 불협화음 같은 사건은 언제든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보급품 받으러 왔어?
이름하고 번호.
...
어디 부서야?
정화 부대입니다.
아... 정화 부대 신입이구나?
야… 너 또 왜 그래…
잡지 마! 막지 말라고! XXX이 저들에게 처형당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텼으면, 지원이 도착했을 텐데...
XXX는 심하게 침식되어서, 치료 방법이 없었어. 넌 계속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잖아...
XXX이 누구인지, 오블리크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XXX은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잘했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정화 부대는 모두 도살자야. 피도 눈물도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도구들이라고!
미안. 얘가 XXX와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던 친구라… 상심이 커서 그래…
XXX라는 이름이 다시 들렸지만, 오블리크는 이번에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 이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구조체의 비난이 정당한 것인지, 또 자신을 향한 말인지는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기에,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블리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분노한 구조체는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가와, 오블리크의 멱살을 잡은 뒤, 그녀의 가면을 벗기며 소리쳤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 도구야!
너희한텐 소중한 존재가 없으니, 남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거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
말해 봐! 이 세상에, 너한테 소중한 게 있기는 하냐고?!
——이 세상에,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거야?
오블리크의 눈빛이 잠깐 흔들리더니, 이내 다시 공허함으로 가라앉았다.
그런 거... 없어요.
로즈워터는 늘 아이들을 이렇게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아이들을 구하고 선별했지만, 결국 아이들은 굶주림과 방랑보다 더 참혹한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실험이 끝난 흰쥐들은 대부분 처분되었다. 실험 대상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도살자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그들을 마무리했다.
이런 동물들은 온순하고 순응적이어서, 마지막 순간에도 그저 무의미한 몸부림과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보육원 아이들은 이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어요. 그 길을 끊어낸 건 당신입니다!
그저 아이들의 순진함과 무지를 이용해, 그들의 미래를 짓밟아버리는 위선자라고요.
로즈워터는 자신이 이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하던 일로 돌아오자, 로즈워터의 마음은 오히려 한결 가벼워졌다. 어쩌면 파란고스키가 비웃었던 것처럼, 애초에 이 일에 어울리지 않았던 걸지도 몰랐다.
오블리크는 로즈워터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두 손에 묻은 죄를 상기시켜 주면서도, 동시에 속죄의 기회를 주는 그런 존재였다.
로즈워터는 순간의 선의로, 장갑을 낀 채 흰쥐 한 마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쥐는 잠시나마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는지 로즈워터의 손바닥 아래에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 온순함과 순종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표정을 그대로 비췄다.
로즈워터와 오블리크는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존재가 익숙하게 느꼈다. 식탁 양 끝에 말없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마무리하는 조용한 의식이 될 수 있었다.
정보국에서의 날들은 예전과 비교하면 놀라울 만큼 평범했다.
그들의 역할은 물고기가 물속에 녹아들 듯, 양복점을 로프라도스에 자연스럽게 녹이는 것이었다.
편하게 있어도 돼. 예를 들면 음… 좀 웃어보는 건 어때?
명령인가요?
훈련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오블리크는 처음에 일상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매사에 딱딱하고 규칙적으로 살아온 그녀는 수업 시간이 아니면 하루 종일 재봉 연습에만 몰두했다.
폴라드 교관과 달리, 로즈워터는 매우 인내심이 깊었고, 재봉에 관해서 박식했다.
그는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의 체형만 보고도 직업을 추측하고, 취향까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교사는 늘 목이 앞으로 굽어 있고, 운동선수는 보통 가슴과 팔다리가 발달해 있어. 몸이 매끈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면, 아군인지 적인지 잘 살펴봐야 해.
좋은 정장은 모든 걸 드러내는 동시에, 모든 걸 감출 수 있어야 한다.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재봉을 좋아하게 된 건, 떠돌기 전의 삶 때문이야?
로즈워터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가벼운 말투로 오랫동안 열지 않은 그의 보물창고를 뒤적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최고의 재봉사였고,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만 옷을 만들어 줬어.
세계는 진정으로 변화를 만들 힘이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 우리처럼 직업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 중심에 가까워지려 노력하지.
대답이 없었다.
혹시 너만의 재봉틀이나 좋은 천, 고급 자수 실 같은 게 갖고 싶지 않아?
오블리크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쳐줄게. 혼자 디자인하는 법도 가르쳐줄 수 있어…
그는 잠시 오블리크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오블리크는 지금의 삶과, 과거에 잃고 얻었던 것들을 비교하며 혼란스러워했다. 한참 동안 가게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지나가는 한 부녀에게 시선이 멈췄다.
다섯,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은 피곤한 듯 눈을 비볐고, 듬직해 보이는 아버지가 딸을 안아 올렸다. 둘은 웃으며 잠시 마주보다가, 이내 곧 아버지가 딸을 등에 업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로즈워터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로즈워터는 "암묵적인 규칙"을 떠올렸다. 보육원에서 온 아이들에게 새 음식이나 옷, 장난감, 책 같은 것들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포옹은 금지였다.
로즈워터는 애써 위로하듯,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안아주는 건 안 돼.)
(안아주는 것만은... 절대 안 돼.)
상처받고 버려진 아이들에게, 단 한 번의 포옹도 감정적 의존을 불러올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원장"으로 살아온 로즈워터는, 아이들을 위한 옳은 규칙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오블리크는 그런 원장의 회피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평범한 인사말을 남기고 담담하게 자리를 떠났다.
원장님, 저 이제 자야 할 시간이에요.
로즈워터는 깊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오블리크가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가자, 그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로즈워터는 오블리크의 과거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그녀에게 집이라는 것을 다시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고, 마치 피로 얼룩진 날카로운 가위처럼,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드러냈다.
그가 지금까지 쏟아온 노력과 희생, 불평등한 토대 위의 성과, 씻을 수 없는 잘못들이 모두 얽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만들어버렸다.
정보국 역시 서툴고, 우스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오블리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
예전이라면, 구시가지는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잃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들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계엄령 때문에 그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블리크는 원장이 최근 며칠 동안 무슨 일로 바쁜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지시받은 대로 복도의 스탠드 조명을 켜고, 평소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그들은 벌써 일주일째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 오블리크는 식탁 맞은편의 빈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곧 시선을 돌렸다.
풍령 소리가 울리고, 로즈워터가 눈발을 맞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상자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리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오블리크, 이리 와보렴.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선물이라는 말에 오블리크는 어리둥절했다.
오늘 네 생일이지?
생일. 한때 익숙했지만 이제는 낯선 단어였다. 오블리크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지 혼란스러웠다.
네 파일을 보고 기억해 둔 거야.
로즈워터는 오블리크를 작업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중앙 마네킹에 씌워진 모자를 벗기고, 마지막 장식을 직접 바느질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리본이 우아하게 드리워졌다. 로즈워터는 자신의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느끼며, 이 정도 광택이라면 어디서든 감탄을 자아낼 것이라 확신했다.
쇼윈도의 정장과 같은 최고급 원단을 사용했어.
로즈워터는 완성된 마네킹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가게 자랑인 쇼윈도 앞으로 당당히 옮겼다.
너무 예뻐요…
오블리크는 눈앞에 놓인 우아한 드레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유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드레스는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부드러운 원단은 은은한 광택을 띠었고, 목선과 소매에는 섬세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정교한 입체 재단이 더해졌고, 치맛자락은 새벽에 막 핀 푸른 장미처럼 겹겹이 퍼져 있었다. 각 층마다 은실로 테두리를 수놓아 우아함이 한층 더 돋보였다.
쇼윈도 안의 정장은 위엄과 품격을 지닌 왕의 상징 같았다. 오블리크는 공방 시절, 어떤 귀빈에게서도 이처럼 고급스러운 옷을 본 적이 없었다.
오블리크는 점장이 평소에 손님을 쇼윈도로 거의 안내하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입어보고 싶어?
둘은 나란히 서 있었다. 쇼윈도에 비치는 반사광에, 완벽히 차려입은 둘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그러나 오블리크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저었고, 유리에 비친 모습도 금세 흩어졌다.
드레스와 모자를 걸친 마네킹은, 오블리크가 생전에 가장 의지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제 자신의 곁에 있지 않았고, 다정하게 가르쳐주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오블리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옷은 날개야.
재봉사로서, 나는 늘 몸에 잘 맞는 아름다운 옷이,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거라 믿어왔어.
그는 오블리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고, 다른 사람과 동등한 삶을 누리길 바랐다.
그래서 이 옷이, 어쩌면 자신을 대신해 오블리크를 안아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삶 같은 건 없어요…
이 감금된 듯한 삶 속에서, 그들은 단지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은 결국 첩보 활동의 연장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이 가면이 반드시 벗겨질 순간이 올 것이다.
어떻게 입든 상관없어요.
로즈워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거야?
오블리크는 꼿꼿이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이전 교관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처벌을 기다리는 듯했다.
소중한 것? 그녀가 임무와 목표에만 신경 쓰도록 만든 건, 바로 로즈워터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는 방금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평소 깔끔하게 정리해 둔 책상 앞으로 달려가 서랍 속 물건을 모조리 쏟아냈다.
늘 무표정이었던 오블리크의 얼굴에도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즈워터는 서랍 깊숙이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 잠금장치를 한참 동안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열쇠를 찾아내, 미친 듯이 유리 쇼윈도로 달려가, 마네킹에 걸린 화려한 정장을 단숨에 벗겨냈다.
이건 내가 만든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자, 이 세상의 유일한 보물이야!
이게 얼마나 특별한 건지 알기나 해?
긴 재단용 가위를 든 로즈워터는 유일무이한 걸작인 정장과, 온 정성을 쏟아 만든 드레스를 단숨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찢어진 천 조각과 풀려버린 실, 솜이 사방으로 날렸고, 묵직한 금색 단추가 바닥에 떨어져 카펫 위를 굴러가다 멈췄다. 양복점 안은 마치 눈보라가 휘몰아친 것처럼 난장판이 되었다.
벗겨진 마네킹은 홀로 덩그러니 남아, 마치 무언극 속 광대처럼 조용히 비웃고 있었다.
얼어붙어 있던 오블리크의 머리와 어깨 위로 실오라기와 천 조각이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들이 포크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입술이 살짝 떨렸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
이 정장을 보면서, 인간은 더 나아지고 있고, 더 좋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었어…
일 년에 단 23미터만 생산되는 원단, 전 세계에서 모은 700여 가지 최고급 천, 백금 바늘로 바느질한 이 정장은, 과거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황실만이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로즈워터는 이제 그런 무의미한 명칭을 일일이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붉어진 눈으로, 손에 남은 끊어진 실과 찢긴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오블리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로즈워터를 향하지 않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나도... 모르겠다.
오블리크는 아무런 감정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착한 아이답게, 오늘 밤 일은 전부 잊어버려.
아이답게...
주여... 부디 저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로즈워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블리크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서둘러, 더 빨리.
눈 내리는 날은 언제나 고요했다. 번화함과는 거리가 먼 구도시 구역의 거리에서 운명의 풍령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어떤 일이 발생하든, 수많은 해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적어도...)
피 섞인 거품이 목을 채워 숨이 막혔고, 생명은 그 틈으로 서서히 빠져나갔다. 로즈워터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블리크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제 드레스까지 더럽히시려고요? 치사하게 그러지 마세요.
(현실은… 결국… 가위와 같구나… )
로즈워터 사장님, 메리 크리스마스.
구도시 유명한 양복점 주인이 자신의 피 웅덩이 위에 쓰러졌다. 인과응보, 그와 함께 각종 인간 실험 프로젝트도 막을 내렸다.
로즈워터가 평생을 바쳐 온 노력은 죄악으로 물든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커다란 가위가 머리 위에 드리워지며...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자수가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길이 오블리크의 피부를 달구고, 타버린 천의 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선고의 울림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오블리크는 눈앞에서 구조체가 주먹을 휘두르려는 모습을 보았다.
오블리크는 눈을 내리깔고, 그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다고 때리려고? 하긴, 괜히 입을 놀렸다가 화를 불러오느니, 입 다무는 게 낫긴 하지.
슈트롤, 넌 원래 말이 많잖아.
어, 말 많은 게 죄야?
슈트롤은 주먹에서 힘을 빼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구조체를 익숙하게 막아 세웠다. 구조체는 잘못을 깨달았는지 사과하며, 슈트롤을 밀치고 자리를 떴다.
가볍게 넘기지 말고, 꼭 생명의 별로 데리고 가 봐.
말을 마친 슈트롤은 오블리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손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다.
다들 구경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지.
하, 정화 부대 따위가 뭐라고. 성갑충 소대 애들 만났으면, 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거야.
...
뭐? 너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됐어, 됐어. 다들 얼른 가.
슈트롤은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주워, 오블리크에게 건넸다.
오블리크는 눈앞의 낯선 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기회를 놓쳐 버렸다.
오블리크가 슈트롤을 두 번째로 마주친 건, 임무를 마친 뒤, 황폐해진 전장에서였다. 오블리크는 무언가를 잃어버려 찾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구조체 잔해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구조체는... 무기이자 소모품, 인간이 지구를 되찾기 위한 희망이기도 해...
새로 입력된 규정과 제도들이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 너구나?
뭘 잃어버렸어? 내가 같이 찾아줄게.
무거운 표정의 슈트롤은, 잔해들을 쓰레기 더미처럼 함부로 다루지 않고, 대신 전우를 대하듯 조심스레 자신의 넓은 어깨에 걸쳐 일으켜 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블리크는 거의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슈트롤을 따라 걸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끝없이 이어지는 처참한 잔해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애들이 시비 걸었을 때 왜 가만히 있었어? 너 사람 맞아?
난 정화 부대 소속 구조체야.
그게 아니라, 구조체가 되기 전 얘기를 하는 거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기계 팔, 기계 다리를 가진 건 아니잖아.
...
너도 이름은 있겠지, 인간이었을 때 쓰던 이름 말이야.
…오블리크.
난 슈트롤이라고 해. 우린 다 인간이야. 이름도 있고, 별반 다르지도 않아.
우린 무기가 아니야, 소모품은 더더욱 아니고.
슈트롤은 두 손을 모아 정리된 명패를 조심스럽게 챙기더니, 오블리크의 손바닥 위에 얇은 금속 조각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봐. 너도 소중한 게 있잖아.
오블리크는 그 작은 쇳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표면은 닦여 있었지만, 매달던 끈은 이미 끊어져 있었고, 홈 사이엔 세월이 흘러 검게 굳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기엔 분명,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슈트롤은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건 알아. 각자 사정이 있을 테니까. 근데 넌… 음… 내가 그저께 아이스크림을 먹었거든. 네 상태가 딱 그거 같아, 꽁꽁 언 아이스크림.
혹시 쿠로노 출신 구조체야?
...
경계할 거 없어. 원한 그런 건 없으니까.
내가 예전에 경찰이었거든. 그냥 직업병 같은 거야.
대답이 없자 그는 머쓱한 듯, 듬성듬성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나도 소중한 게 많아... Ⅴ가 준 사탕이 어딨더라?
슈트롤이 주머니를 뒤적이다 찢어진 사탕 포장지를 꺼내더니, 당황한 듯 얼른 다시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학육 구역에서 꼬맹이 무리를 만났었는데, 사흘에 한 번은 말썽을 부리더라.
하… 그런데 모르는 사이 정이 들어버렸지, 뭐야.
...
나는… 예전에… 재봉사였어.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며, 슈트롤은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 둘게. 언젠가 네가 소중한 걸 찾게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 줘.
오블리크가 슈트롤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니콜라 사령관의 전근 명령에서였다.
그는 "소중한 것들"을 모두 남겨둔 채,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그럼 넌? 네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결국 어떻게 됐어?
로프라도스 지상 임무에서 돌아온 뒤, "꽁꽁 언 아이스크림"은 더 단단히 굳어버린 듯했다.
기체는 말끔히 수리되어 흠 하나 없었지만, 갑자기 통각 신호가 몰려오거나, 때로는 순환액이 멋대로 흘러내렸다.
환각, 환취에 환상통까지.
전근 명령에 따라 성갑충 소대에 들어가야 할까? 아니면 정화 부대에 남아야 할까?
그토록 집착하던 목표가 사라져 버린 지금, 오블리크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인가?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돼. 선택하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데, 감당할 자신 있어?
임무는… 완수해야 해.
임무를 완수하는 건, 간단하고 효율적이면 그걸로 충분해.
지금처럼 그대로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을 때도 있거든. 그림자 속에 숨어, 괜히 눈에 띄지 마. 그게 가장 오래 살아남는 길이야.
하지만 리라코의 생존 건의와는 반대로, 오블리크는 강력한 무기를 가슴에 겨누거나, 일부러 기체 정비를 중단하는 등,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충동에 자주 사로잡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중 정원 안에서 그런 행동은 쉽게 실현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더 위험한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