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3 연주로 엮인 서문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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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3-7 곧 다가올 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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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스는 어둠과 먼지 속에서 웅크리고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는 쉬는 순간에도 침묵을 지켜야 했다.

작은 소리 하나조차도 천하고 상스러운 행동이라 배웠다.

창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멀리 있는 창백한 벽지를 비추면

아이시스 몬자노 부인이 곧 그녀를 찾으러 올 터였다.

아이시스는 부인에게 충성스럽고, 쓸모 있는 하녀여야 했다.

발이 바닥에 닿고,

몸의 어느 부분이라도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

아이시스는 미소를 띠고 기꺼이 봉사해야만 했다.

그것이 몬자노 가문에서 인정받는 하녀의 모습이었다.

오직 해가 뜨기 전, 잠에서 덜 깬 그 짧은 순간만이

그녀가 자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쇠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이시스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명상 시간을 방해했다.

야!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아이시스, 또 여기 숨어 있었네. 곧 손님이 오실 거야.

아이시스는 입안까지 차오르는 불평을 꾹 삼킨 채, 황급히 일어섰다.

이기적인 계집애, 이제야 나타나는구나. 어서 준비해.

앞치마는 왜 이렇게 더러워.

에헤헤~

웃지 마!

아이시스, 오블리크 하는 것 좀 보고 배워!

하녀장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금방이라도 막대기를 휘두를 기세였다.

이곳 하녀들은 웃음을 억제하도록 훈련받았기에, 결코 크게 웃지 않는다.

주인이나 손님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못은 곧바로 무자비한 벌로 이어진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끝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고문이었다.

아이시스는 비웃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둘 중 착한 아이는 늘 오블리크였고, 자신은 그저 비교 대상이 되는 나쁜 쪽이었다.

손님 명단 잘 확인하고, 지금 바로 몬자노 부인께 먼저 인사드리러 가.

하녀들은 식기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가구와 바닥을 오가며 쉼 없이 청소했다.

식탁에는 몬자노 부인 혼자 앉아 있었고, 엘리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과 엘리너는 늘 가문 일로 바빴기에, 둘이 함께 식사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몬자노 부인은 자신만의 고귀한 이상을 위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하나로 움직이길 원했다.

이번 연회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해.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고, 모든 손님이 만족할 수 있도록.

하녀들

알겠습니다, 부인.

항상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내 체면을 깎아내리는 게 누군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

하녀들

알겠습니다, 부인.

여주인의 잔 속 얼음이 녹아내리며 달그락거렸고, 하녀들은 일제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추었다.

곧 성대한 연회가 시작된다.

저택의 웅장한 홀은 샹들리에 불빛 아래 찬란히 빛났다. 그 빛이 굴절되어 무지갯빛을 흩뿌리며, 정교한 금박 가구들을 더욱 눈부시게 했다. 이것은 가상 현실이 아닌, 손끝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진짜 사치였다.

현재 이 저택의 이름은 에이드리언느·몬자노이다.

이름을 더욱 빛내기 위해, 저택의 모든 하녀들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검은 제복과 흰 레이스는 흠잡을 데 없이 단정했고, 윤이 나는 구두는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그녀들은 일렬로 들어와 수정 잔이 올려진 은빛 쟁반을 내려놓았고, 잔 속에는 황금빛 샴페인이 넘칠 듯 차올라 있었다.

손님들이 레드 카펫을 밟으며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동안, 오블리크는 차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 또한 연출의 일부였다.

어서 오십시오.

모든 것은 정교하게 짜인 발레 공연처럼 완벽한 질서 속에서 움직였다.

훈련된 몸짓과 섬세한 디테일은, 몬자노 부인이 약속한 찬란한 미래가 결코 허상만은 아님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몬자노 부인의 손끝에 칠해진 금빛 네일이 반짝였다. 그 빛은 이 자리에 모인 손님들의 부와 사치를 넘어,아름다움과 복종마저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환상을 비추고 있었다.

오블리크와 아이시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들은 그저 부인의 게임 속 미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거짓된 포장 속에 전시된 상품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갔다. 미각을 자극하는 향과 맛이 손님들의 흥을 돋우었고, 잔을 비울수록 취기도 점점 더 짙어져 갔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세상의 중대한 결정은 공개된 의회장에서, 혹은 국제회의 석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처럼 은밀하고 고요한 저택에서 신중한 논의를 거쳐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곧 이루어질 저희의 위대한 성과를, 여러분께 미리 선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순간, 긴 테이블 위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시대를 초월한 듯 거대한 함선이 서서히 나타나 회전하며, 세부가 확대되어 모든 손님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에덴 III형이었다.

설령 바깥세상에 재난이 닥친다 해도, 우리의 안락한 삶을 지켜주는 이 견고한 벽을 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 너머의 세계가 무너진다 한들, 공중에 떠 있는 우리의 에덴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부와 삶은 이 안에서 언제나 보존될 것입니다.

단지 유언장의 세부 사항만 보완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여러분과 후손들 모두, 영원히 안심하며 풍요로운 노후를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도 새로운 전쟁과 격변이 일어날 거라 믿지 않았다. 이성과 우주 탐사의 시대에 그런 심각한 폭력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여겼다.

이 말은 손님들을 설득해 방주에 오르게 만드는, 몬자노 부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저 재산의 일부와 충성의 맹세를 바치기만 하면, 승선권이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연회의 절정 속으로, 한 인물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이게 누구신가, 하우스먼 남작 아니십니까. 조금 늦으셨군요. 하지만 보십시오, 남작님의 자리는 여전히 비워 두었답니다.

몬자노! 네가 나한테 독을 먹였지! 이 술을 마시지 마시오! 모두들, 이건 독이 든 술이오!

달아오른 연회의 열기가 그 무례한 외침에 순간 얼어붙었다. 모든 시선은 연회의 주인에게 쏠렸다.

그러나 몬자노 부인은 태연하게 머리칼을 매만지며, 쏟아지는 시선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며칠 새에 어쩌다 그렇게 수척해지셨는지요? 혹시 심장 발작 때문에, 이제 더는 술을 즐기지 못하시는 건가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오블리크, 하우스먼 남작님을 귀빈실로 모셔 드려. 충분히 쉬신 뒤 안색이 돌아오면, 다시 연회에 참석하시라고 해.

알겠습니다, 부인.

하녀가 손님을 부축해 조용히 퇴장시켰다. 몬자노는 태연한 얼굴로 빈자리에 다가가,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잔을 들어 올렸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플루트 잔에 담긴 샴페인이 액체 황금처럼 반짝였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신분과 능력을 갖춘 분들입니다. 독살 같은 저속한 흉계라니… 혹시 피해망상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겠지요?

몇몇은 귓속말을 나눴고, 또 몇몇은 시종을 조용히 물러나게 했다.

우리의 황홀하고 끝없는 연회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에덴을 위하여, 건배합시다.

몬자노는 조금 전의 일은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를 띤 채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손짓으로 하녀에게 새로운 샴페인 타워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황금빛 거품과 함께, 굳어 있던 손님들의 얼굴에도 다시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건 나이트로글리세린 주사액입니다. 남작님의 협심증 증상을 즉시 완화해 드릴 수 있습니다.

남작은 검은 벨벳 안락의자에 눕혀져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우아한 하녀를 바라보며, 마치 죽음을 본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부인께서는 남작님이 좀 더 신중히 고려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쿨럭쿨럭... 신중히 생각하라니, 뭘? 구멍투성이에 언제 가라앉을지 모를 낡은 배 말인가?

남작이 힘껏 휘두른 금장 장미목 지팡이가 오블리크의 다리에 부딪히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문의 유산을 가로채려 꾸며낸 이 집단 환각극을 찬양하라는 건가? 아니면 싱클레어라는 고귀한 성을 버린 걸 자랑스러워하라는 건가?

그리고 너... 대체 뭐야?! 몬자노가 길러낸... 기계 괴물인가?!

남작은 마지막 힘을 짜내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숨은 이미 거칠어졌고, 가슴에서는 고장 난 풀무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번 수세에 몰리면,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저는… 일개 하녀일 뿐입니다. 몬자노 부인에게 속한 하나의… 자산이죠.

하녀는 고통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그저 기계처럼, 거스를 수 없는 교훈을 읊조릴 뿐이었다.

무색의 투명한 주사액이 바늘 끝에서 흘러내리자, 남작의 불거진 눈동자가 좌우로 요동쳤고, 그의 몸은 도마 위에서 발버둥 치는 물고기처럼 격렬히 움직였다.

몬자노 따위가 뭣이란 말이냐!! 근본 없는 떠돌이 망령일 뿐… 교활한 술수와 집착으로 연명해 온 존재일 뿐이야!

남작에게는 피해자로만 남기를 거부하는 기개가 있었지만, 사건의 흐름은 이미 그의 의지와 노력 따위와는 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작은 기술을 의심했고, 이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어차피 승선할 뜻이 없다면—

배가 이미 떠난 이상, 갑판 위를 아무리 달려도 소용없었다.

하우스먼 남작

아... 안 돼.

주사액이 정맥으로 흘러들자, 마른 귤껍질처럼 뒤틀려 있던 남작의 얼굴 근육이 천천히 풀어져 갔다.

날카롭게 도드라진 광대뼈와 깊이 움푹 꺼진 눈두덩이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고, 잿빛 수염이 피부를 뚫고 거칠게 자라나 있었다. 남작은 너무 쇠약해져서 수염조차 다듬을 힘이 없었다.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모두가 한 줄기 볏짚에 묶였다. 그 묶임을 거부한 자는 힘이 다해, 결국 물속으로 가라앉을 운명이었다.

이제, 편히 잠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귀빈실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오블리크는 멸균 장갑과 앰플을 소각로에 던져 넣었다. 멀리서 아이시스가 옷자락을 매만지며, 지루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블리크! 연회는 끝났어. 손님들도 모두 돌아갔으니, 우리도 이제 쉴 수 있겠다.

그래?

손님이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굳이 부인께 보고해 그의 시간을 빼앗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들은 정해진 자리로 함께 돌아갔다. 하녀들의 휴게실에서는 끊이지 않는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문에 기대어 잠시 귀를 기울였다.

저 애, 밤새 울었어. 지금 다들 달래는 중이야.

부인이 연회장에서 저 애를 리처드 의원한테 보내려 했었어. 근데 저 애는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눈만 간신히 깜빡이는 노인네 집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대.

여기 남아 있는 게... 맞는 걸까?

적어도, 거기 가면 더 이상 혼나진 않을 텐데.

오블리크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거침없이 말하는 아이시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휴게실을 지나, 둘만 알고 있는 은신처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왜 그래, 오블리크?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아이시스는 아픈 손목을 뿌리치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사방이 다 "눈"이야.

맞아. 근데 여긴 없잖아.

아이시스는 깔깔 웃으며 술 선반을 타고 재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오블리크도 한숨을 내쉰 뒤, 그녀를 따라 선반 위로 올라갔다. 선반 꼭대기는 몸을 제대로 펴기 힘들 만큼 비좁았고, 둘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옹기종기 누웠다.

네 앞치마가 이래서 더러워진 거였구나.

이미 깨끗이 닦아놨어~다신 더러워질 일 없을 거야!

아이시스는 오히려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돌아가야 해. 안 그러면, 부인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얼굴과 마음속에 규정을 새겨 넣으려 할 거야.

음, 우리 정말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쓸모없다, "수치스럽다"라는 말들로 가득한 나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까?

오블리크는 침묵에 잠겼다.

넌 꿈 같은 거 없어?

꿈...

오블리크 역시 그 단어가 가진 마력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아니야, 중요해!

아이시스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몬자노의 꿈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느니, 네 꿈을 좇는 건 어때?

난 말이야, 유명한 가수가 되고 싶어!

몬자노의 연회에는 가끔 보석으로 치장한 이들이 초대되곤 했다. 그들은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생수만 마셨다.

오블리크는 회춘 시술로 획일화된 그들의 얼굴을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의복 스타일로 소속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로프라도스는 그들이 필요했고, 그들 역시 로프라도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순간이나마 아이시스의 표정은 만족스러운 다람쥐 같았다. 오블리크는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푸웁…

오블리크의 속마음을 눈치챈 아이시스가 볼을 부풀렸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우리가 여기서 봤던, 잘난 척하는 공작새들 말고!

언제 어디서든, 거리나 골목에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와서 들어 주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

음악은 정말 멋진 것 같아. 도덕적인 설교도 없고, 듣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도 가리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누군가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멜로디 하나로도 모두가 즐겁게 웃고, 희망이 넘쳐나는 거야.

희망. 그 장면을 떠올리자, 오블리크도 마치 그 속에서 웃고 있는 관객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네가 가수가 되면…

유명한 가수!

유명한 가수가 되면, 내가 옆에서 박수로 반주해 줄게.

땡. 너도 올라와서 같이 노래해야지!

아이시스는 고개를 흔들며 즉흥적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오블리크의 두 손을 잡아끌었다.

손바닥이 맞닿자 아이시스로부터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본 오블리크는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

와아— 고마워, 오블리크! 역시 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전야제를 위한 연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몬자노의 손님들은 반짝이는 금장식과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걸친 채 연회장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

오블리크는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고 다시 썼다. 연회장 한쪽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엘리너?)

(겨울 요새에서 돌아온 건가?)

오블리크! 하녀장이 이 접시들 좀… 야, 너 어디 가?!

몬자노는 오블리크가 엘리너와 단둘이 만나는 것을 금지했고, 다른 하녀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던 오블리크는 주방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 한 번이라도,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그림자를 따라간 끝에, 몬자노의 서재 앞에 도착했다. 반쯤 열린 문은 마치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만약 들킨다면 엄한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블리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열어서는 안 될 문을 밀었다.

하지만 서재 안은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짙은 와인빛 벨벳 커튼이 묶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커다란 흑단 목재판이 놓여 있었으며, 펜 거치대에는 금빛 펜촉이 아슬아슬하게 떠 있었다.

그 옆에 활짝 펼쳐진 금테 양장 노트에는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쓴 필기체가 잔뜩 번져 있었다.

오블리크는 멀리서도 그 노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명단 에틸리·반·버몬트·스트럴추, 오토·로티, 웰트·벤자민... 가장 마지막에 추가된 이름은 하우스먼이었다.

그건 전리품 목록이었다. 이름마다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처음 두 명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싱클레어.

오블리크는 이를 악문 채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글자를 읽는 건 여전히 느리고 서툴렀지만, 엘리너 이름 뒤에 붙은 그 성만큼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엘리너에게 새 가족이 생기는 거잖아.

그럼, 좋은 일 아닐까?

질산칼륨, 충분히 희석된 상태에서 정맥 주입 시 인체에 무해하다. 하지만 며칠간 반복 주입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몸이 충분히 대사 활동을 통해 질산칼륨을 배출하기 때문에 검출되지 않는다. 시신이 묻히는 순간까지도 사인은 단순한 신체 쇠약으로 인한 자연사로 기록될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습기 찬 잔디, 줄지어 선 낡은 묘비, 소녀는 명령에 따라 그곳에 놓인 처형 의자에 앉았다.

속이 심하게 뒤틀렸다. 오블리크는 결국 역류하는 위산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토하고 말았다.

오블리크! 얼른 나와! 누가 오고 있어!

급히 달려온 아이시스는 땅에 무릎 꿇은 채 굳어 있는 오블리크를 허둥지둥 일으켜 세웠다.

바닥이... 더러워졌어...

지금 그게 중요해?!

아이시스는 앞치마를 확 벗어 바닥을 대충 닦은 뒤, 책상 위에 있던 향수병을 집어 들고, 공기 중에 마구 분사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음?

걸음을 늦춘 몬자노 부인은 공기 중에 떠도는 수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천천히 서재를 훑어보며 이상한 점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쓱—. 길게 늘어진 손톱이 원목 책상을 훑고, 가죽 안락의자를 스치고, 가지런히 놓인 장식장을 긁었다.

그 손끝은 창턱에 놓인 희귀한 카두풀 꽃 위에서 멈췄다. 밤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 꽃은 어둠 속에서만 꽃을 피우고, 새벽빛을 받으면 시들어 사라진다.

화분에 향수 너무 뿌리지 말라니까. 냄새가 너무 진해서 토할 것 같네.

몬자노 부인은 기적처럼 활짝 핀 꽃들을 모조리 뜯어 바닥에 던졌다. 산산이 흩어진 꽃잎이 발밑에 나뒹굴었다.

이내 책상 위 노트를 챙겨 장식장에 다시 넣으려던 찰나,

차분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가 몬자노 부인을 멈추게 했다.

여기 계셨네요, 고모. 시키신 일은 다 끝냈어요.

목표는 전달했니?

네. 심문은 꽤 재미있었어요. 다행히 제가 흥미를 잃기 전에 모든 걸 털어놓더군요.

잘했어, 엘리너. 오늘 밤은 나랑 카지노에 가자.

네, 고모.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장식장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하녀는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교수대 밧줄에서 방금 풀려난 듯, 심장이 떨리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우리 도망가자.

희미하게 보이는 아이시스의 눈빛은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 남아 있으면, 꿈 같은 건 가질 수 없어.

오블리크

...

미쳤어? 부인께서 알면 화내셔.

오블리크는 아직 불타는 듯한 목구멍에서, 간신히 쉰 목소리를 짜냈다.

부인은 모르실 거야.

오블리크

불가능해. 사방에 감시기가 있잖아. 어떻게 피해 갈 건데?

오늘 일도… 부인이 감시기를 보면 다 알게 될 텐데…

방법은 있겠지.

도망,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자유. 이 얼마나 달콤한 샘물이자, 치명적인 독인가.

오블리크에게는 아직 맡은 임무가 있었고, 쿠로노와 몬자노에게 보고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녀"도 이곳에 있다. 오블리크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루 종일 손발을 흔들며 춤추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들이 도구로서 맞이하게 될 운명일까?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든 이유가 머릿속을 끝없이 맴돌았다.

어쩌면… 운명이 정말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지도 몰랐다. 과연 그녀를 놓아줄까?

아이시스의 얼굴이 오블리크의 좁은 시야 속에서 아른거렸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마음은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요동쳤다.

아이시스

약속해 줘. 우리의 계획을 절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거센 바람이 먹구름을 몰아내며, 칠흑 같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폭풍우는 땅 위 모든 것을 세차게 때렸고, 저택 안에서는 빗소리마저 묻어버릴 만큼 분주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녀장은 분주히 움직이는 하녀들에게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정전인가? 괜찮아. 조금 있으면 예비 전원으로 자동 전환될 거야.

창문 누가 다 열어놨어? 어, 어서 전부 닫아!

여기! 손님이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고 있잖아! 대체 누가 미각 자극제를 이렇게 많이 넣은 거야?

연회... 연회는 계속돼야 해!

휴식 시간, 감시기 각도, 호위병 배치, 일정 관리, 모든 세부 사항과 사각지대까지... 오블리크는 아이시스가 이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감시기가 닿지 않는 유일한 곳, 자유로 향하는 문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저택 입구가 아닌, 몬자노의 침실이었다.

사실이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렸죠.

금발의 남자는 술잔을 흔들며, 저택 최고층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유리 위 홀로그램 투영을 끈 뒤, 오랜만에 몰아치는 폭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테라리움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한 번쯤은 본 적 있으실 거예요.

병 속에 갇힌 생물은 그 좁은 세계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이 다할 때까지 번식하고 삶을 이어가죠.

어느 하나 낭비되지 않고, 모두 생명의 순환에 녹아들어요.

폭풍우 치는 밤, 연회에서 하녀 하나가 급하게 자리를 비운 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테라리움 속 모든 생물은 하나의 근원, 즉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죠.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부인, 설마 구시대의 도덕규범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싱클레어라는 이름이 당신에게는 명예보다 아픔으로 더 깊이 남아 있는 듯하군요.

복도에서 붉은 불빛을 내던 감시기들이 하나둘씩 꺼지면서 고개를 떨구는 듯하더니, 몇 초 뒤 다시 불이 들어왔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함께 교육을 받았어요. 오빠는 제왕학을 배웠고, 저는 싱클레어 가문의 명성을 지키는 완벽한 조력자가 되도록 가르침을 받았죠.

사람들은 위대함을 찬양해요. 그건 희생을 의미하고, 이름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뜻하니까요.

현모양처를 천직이라 믿는 것은, 노예의 복종을 미덕이라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타인의 고통에는 민감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은 외면하는 거죠.

하지만 전, 아니에요.

몇몇 호위병이 쓰러졌고, 일부는 엉뚱한 길로 유인되었다.

미로 같은 복도를 가로지르는 건,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 어린 그림자들이었다.

욕망에 걸맞은 야망만이, 그에 상응하는 찬란한 미래를 얻을 수 있어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나요? 귀족은 체계적인 도둑일 뿐이에요. 한 세대의 특권이 왜 그대로 다음 세대에 넘어가겠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추한 건, 정당한 실력이나 노력 없이 상속만으로 부와 권력을 얻는 거예요! 권력은 물려받는 것보다 쟁취하는 편이 훨씬 더 고결한데 말이죠!

호위병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무인기가 곧 고장 날 것 같아!

연회를 위해 준비된 거대한 천 층 케이크가, 조작 미숙으로 추락한 무인기와 부딪치며, 연회장 한가운데 흰 크림 강을 만들어 냈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말 멋지네요! 이게 바로 진정한 파티—아니, 연회죠.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였는데, 축하받는 주인공은 단 한 명뿐이네요. 몬자노 부인, 그리고 당신의 노력.

금발의 남자가 과장되게 무릎을 꿇고 부인에게 인사했다.

저는 당연히 어머니가 될 수 있어요. 보크농 계획이 완료되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의 어머니는 곧 제가 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계속 저를—

몬자노 부인이라 불러주세요.

몬자노는 난장판이 된 연회장을 거만하게 바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왕학의 내용은 아주 간단해요.

우리는 언제나 성공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녀들은 자신이 열어버린 것이 자유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심연으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거기, 길 비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시스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몬자노 부인은 레드 와인 한 병을 들고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수정 와인잔을 꺼내, 가죽 소파에 앉아 앞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 와인을 올려놓았다.

손목과 목, 머리를 화려하게 수놓던 반짝이는 명품 액세서리들이 하나둘 벗겨지며 무심하게 바닥에 내던져졌다. 더 이상 보여주기 위한 쇼는 필요 없다.

짙은 붉은색 와인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와인잔으로 흘러들었다. 잔이 채워지는 소리는, 천천히 울리는 마지막 종소리처럼 공간을 가득 채웠다.

몬자노 부인

내가 여기에 가만히 있으라고,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 노인네들한테 보고하려는 거라면, 굳이 이곳에서 몰래 할 필요가 있을까?

몬자노는 재미있다는 듯이 황금 리볼버를 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끝으로 탄창을 돌리며, 모자챙에 달린 통신기에 명령을 내렸다.

몬자노 부인

이제, 연회는 끝났으니, 손님들 다 내보내.

죽음 같은 적막 속에서 한 번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몬자노 부인

손님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펑.

끝없이 이어지던 연회가 드디어 막을 내릴 준비를 했고, 하녀들도 오랫동안 짊어졌던 임무에서 해방 직전이었다. 뒤틀린 괴물과 복잡한 욕망을 실은 이 배는, 처음이자 마지막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펑펑.

폭풍이 지나간 뒤, 맑고 투명한 밤하늘에 축하의 불꽃이 터졌다.

펑펑펑...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선명한 문양의 대리석 탁자 위에 와인병이 산산이 부서지며, 와인과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녀의 머리밑에서 붉은 와인이 흘러나와, 수제 천연 카펫 위에 기이하고도 뒤틀린 얼룩을 남겼다.

몬자노 부인

더러워, 얼른 치워버려.

몬자노는 진홍빛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 뒤,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몬자노 부인

나를 위해 건배.

오블리크는 힘없이 쓰러져 침묵하게 된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눈부시게 밝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시스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어.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

나는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선택받지 못한, 가치 없는 존재였어.

존재하지 말아야 했고, 희생을 위해 밀려났으며, 이익을 위해 자리를 내줘야 했던… 조연이었어.

오블리크!!!! 그럼, 넌!!!!

넌 그저 운이 좋았던 거 아니야?

넌 원래 소모품으로 태어났고, 척추가 부러져 죽어야 했어.

하지만 넌 굴복하고, 도망쳤어! 대체 왜!!!

예정된 결말보다 조금이라도 나으면, 넌 만족하면서 시체인 척, 쇳덩어리인 척했잖아.

이딴 삶은 좋은 게 단 하나도 없어.

아이시스

넌 소리조차 내지 못해.

하녀의 얼굴은 마지막 순간의 일그러짐에 멈춰 있었다. 오블리크의 눈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살아난 그녀는, 모든 것을 직접 마주해야만 했다.

왜 멈추지 않았어, 왜 모르는 척했어.

이것도 고모가 네 머릿속에서 내린 명령이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와아— 고마워, 오블리크! 역시 넌 내 가장 소중한 친구야~

아이시스는 오블리크의 손을 잡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술 창고에서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약속해 줘. 우리의 계획을 절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방금 누구와 얘기한 거야?

무슨 게임을 하고 있었어?

왜 내가 모르는 표정을 지었어?

릴리스는 하녀가 뒤로 물러서는 걸 개의치 않아 했다. 독사가 사냥감을 꽉 감아 놓치지 않듯, 그녀의 손은 단단히 오블리크의 손을 움켜쥐었다.

안 돼.

그건 허락할 수 없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여린 날개가 끈적한 실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날개를 움직일수록 그물은 더욱 단단히 얽혀,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녀의 연약한 심장은 가느다란 실에 짓눌려, 눈앞에서 반짝이는 이상적 환상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숨 막히는 속박은 그녀를 끝없는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원하는 게 자유야? 좋아. 보내주지. 이제 네 행동에 더는 개입하지 않을 거야. 쿠로노에게 돌아가서 보고해. 새로운 기술을 실험 중이라던데, 네게 새로운 다리도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조건이 있어. 내 끄나풀이 돼라.

난 도구를 벌하지 않아. 도구는 서툰 장인의 손에서만 잘못될 뿐이니까.

눈앞의 하녀는 텅 빈 눈빛으로 "도구"와 "서툰 장인"이라는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봐.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더 예리해진 감각, 강력해진 신체와 전투 능력, 향상된 정보 처리 능력… 물론 나중에 큰 유지비도 따라오겠지. 네가 짐이 아닌 가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해 봐.

넌... 엘리너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잖아.

몬자노 부인은 늘 입에 달고 살던 "함께 성장하자"라는 말을 억지로 삼킨 채, 하녀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오블리크의 얼굴에 잠깐 흔들림이 스치더니, 금세 사라졌다.

독수리 같은 날카로운 시선 아래, 오블리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들어 예를 표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몬자노 부인.

몬자노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연회가 시작되기 전, 오블리크는 명령받은 대로 완성된 드레스를 릴리스에게 전달했다.

손으로 수놓은 금색 넝쿨과 날아오를 듯한 꽃무늬 레이스는 고정된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뻗어나갔다.

그 한 땀 한 땀에는, 오블리크가 의자에 웅크린 채 밤낮없이 바느질하며 흘린 속삭임과 절망, 한숨,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연약한 꿈이 담겨 있었다.

창의력은 확실히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보물이야. 하지만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점점 더 높이 날아 태양에 닿으려다…

결국 그를 날게 해준 깃털 사이로 떨어져 죽고 말았지.

그의 추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니까.

고모가 원하는 건 간단해. 장님도 그녀의 열정적인 말투만 듣고 알 수 있을 거야.

릴리스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가 드러나지 않게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폴라드에서 했던 얘기, 기억나?

릴리스의 티 테이블 맞은편은 텅 비어 있었고, 푸른 머리의 하녀는 문 뒤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이제 더는 아무도 그녀를 위해 노래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자신을 삼키려고 기다리는 바다를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쿠로노 지상 연구개발 기지

쿠로노 지상 연구개발 기지

신경 반사가 뛰어나고, 탄탈-193 공중합체의 적응성도 우수하지만...

의식의 바다... 의식의 바다의 안정도가 너무 낮아요. 개조가 언제 실패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실패는 안 돼... 지상 기관에 남겨둔 실험 샘플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하, 하지만...

이 데이터와 계획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어요.

땀이 비처럼 흐르는 연구원은 몸에 달라붙은 흰 가운이 불편한 듯 계속 잡아당겼다.

지금 검증 중이잖아.

성과를 내지 못하면, 쿠로노에 뭘 보고할 수 있겠어?

거기! 통각 출력을 더 높이고 의식의 바다와 본인의 의식을 동기화해. 다른 부분은... 전부 잘라버려.

결단을 내린 연구 주임을 제외한 나머지 연구원들은 더 이상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뒤에도, 본래의 영혼과 예전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모든 기기가 무자비하게 돌아가며, 그녀에게 죽음의 평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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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45>>>>>「수술이 종료되었습니다. 번호...」</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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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40>>>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size>

<size=40>>>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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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리크는 대기실의 단말기를 끄고, 파란 유령처럼 자신의 휴게실로 돌아갔다. 출입문이 그녀의 구조체 번호를 인식하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단조롭고 소박한 방, 어차피 어디서 자든 다를 바 없었다. 오블리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낯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 알려준 계획 속에 이 과정은 포함되지 않았던 걸까?

임무와 명령들이 끝없이 쌓여만 갔다. 이제 그녀는 그토록 익숙했던 단어마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너는 어디로 간 걸까? 왜 연락하지 않는 걸까? 설마... 또 버려진 걸까?

오블리크는 홀로 공중 정원의 낮과 밤이 교차하는 가상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의문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혼란 속에서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답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