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드디어 깼네.
내 말 들려?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고, 머릿속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처럼 숨이 막히는 질식감이 여전히 맴돌았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침 햇살을 등진 긴 머리의 소녀였다.
빛이 스며든 머리카락 끝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 얼마나 잔 거죠?
한순간의 전율과 함께, 그녀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죄송해요. 일에 방해가 됐네요.
일?
어디선가 본 듯한 소녀는 우스운 농담을 들은 듯 깔깔 웃었다. 오블리크가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뽑으려 하자 소녀가 가볍게 막으며 그녀를 눕혔다.
여긴 공중 정원이야. 네가 할 일은 없어.
?
공중 정원... 제가 복무하고 있는 곳이에요.
복무?
소녀도 오블리크 만큼이나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의 베이지 커튼을 젖혀 햇살을 더 들이고, 오블리크의 등에 포근한 쿠션을 받쳐주었다.
할 일을 마친 소녀는 다시 침대 옆으로 돌아왔다.
언니, 이미 오래전에 전역했잖아.
네?!
"언니"라는 호칭에 가슴을 저며 온 건지, "전역"이라는 단어가 심장을 찌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이내 슬픈 기색을 감추고, 그녀의 반응이 익숙한 듯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 이제 아침을 먹을 시간이야, 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보온 용기에 음식을 하나하나 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트밀 위에 계핏가루가 살짝 흩뿌려져, 부드럽게 삼키기 좋은 완벽한 영양식이었다. 잘게 썬 당근과 구운 채소는 균형 잡힌 조합으로 곁들여졌다.
한쪽에는 연노란 그레이비소스를 곁들인 매쉬드 포테이토가, 다른 한쪽에는 체리로 장식된 작은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하얗고 기름진 생크림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이렇게 달콤한 건 이제 더 이상 먹으면 안 돼. 이 체리 케이크는 내가 특별히 남겨둔 거야.
소녀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색과 향이 감각을 자극했다. 오블리크는 뇌를 간질이는 그 느낌에 눈을 가늘게 뜨고, 누군가와 이런 음식을 수도 없이 나눠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체리 케이크 너머로 날짜 계기판의 숫자가 쉼 없이 올라갔다.
곧 크림이 녹고, 붉은 과실이 떨어져 썩은 향을 풍겼다.
설마... 내 이름을 또 잊은 건 아니겠지? 나, 릴리스야.
소녀는 오블리크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주며,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환자를 대하는 온화한 얼굴로 바뀌었다.
낯선 안정감에 혼란을 느낀 오블리크는 크림을 뜬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다 멈췄다.
입맛이 없어? 그래도 조금은 먹어야 해.
아, 아닌 것 같아요. 당신 이름은...
(엘리너.)
왜 그래?
오블리크는 허탈한 마음에 지금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거울을 찾았다. 혹시 중병인가, 불치병? 아니면, 쓸모없어진 자신이 다시 버려진 건가?
이제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 못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네.
난 네 딸, 릴리스야.
거... 거짓말하지 마요! 조금 전까진 분명히 저를 언니라고 불렀잖아요…
몸을 일으킨 오블리크는 진실로 가는 길, 가짜를 깨뜨려줄 거울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벽에는 고요한 전원 풍경화 한 점뿐, 그 안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너무나 매끈하게 칠해져, 하나의 색 덩어리로 뭉개져 있었다.
오블리크는 그 그림을 계속 바라보았다. 색 덩어리가 녹아 물감이 바닥에 흘러내리더니, 주름지고 갈라진 그녀의 손 위로 떨어졌다.
커튼은 미풍에 흔들리며 빛과 그림자를 흩뿌렸다. 공기에는 은은한 향기와 소독약의 날카로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이곳도 공중 정원일까? 짙게 깔린 정적은 그녀의 불안을 비웃듯 차갑기만 했다.
에휴,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한텐 기억력 감퇴와 인지 장애가 있어. 그래서 기억이 뒤섞이고, 몇 분 전 일조차 기억 못 하는 거야.
이런 대화를 매일 아침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해.
기억력 감퇴... 인지 장애...
이 중추신경계 퇴행성 질환을 어떻게 늦출 수 있는지 다시 말해줄까?
좋은 생활 습관, 규칙적인 식사, 적당한 운동은 필수야. 공중 정원의 최고 요양원조차도 이 병을 치료하지 못해. 실어증, 운동 장애, 인지 장애 같은 증상들은 결국 계속 나타날 거야.
오블리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시트에는 방금 그녀가 필사적으로 움켜쥔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엄마는 가끔 이유 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환각을 보거나 과거를 잊어버리기도 해. 심지어 날 적으로 착각할 때도 있어.
하지만 괜찮아. 내가 모든 걸 잘 준비해 놓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너의 █▅█▊, 릴리스니까.
그... 그럴 리 없어요. 제가 어떻게 당신의...
우린 동료예요. 당신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제…
...
...
끊기듯 반짝이는 화면 때문에, 그녀도 덩달아 반쯤 꿈에 잠긴 것처럼 멍해졌다.
혹시 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뇌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
영화 속에서 고위 장교들이 전사들에게 끊임없이 조작된 기억을 주입하잖아. 어릴 적부터 함께한 친구와의 시간, 형제자매 사이의 깊은 유대, 평생을 걸고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것들 말이야.
그런 아름다운 환상이, 백 일 동안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이었어.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전사들의 표정도, 지금 네 얼굴처럼 텅 비어 있었지.
설마 꿈속에서 날 지키려고 목숨 걸고 싸운 거야?
명령을 따를 때마다, 오블리크는 하늘에서 거칠게 추락했다.
쇠사슬이 목을 조여 숨이 막혔고, 손에는 피비린내 나는 미끈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몰려드는 군견들의 송곳니에 맞서 무기를 끝없이 휘둘렀다.
총성이 빗발치고, 화약 연기가 오블리크의 그림자를 끝까지 따라붙었다. 그녀는 어두운 콘크리트 바닥 위를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기어갔다. 거친 숨소리가 흩어졌고, 불과 몇 걸음 앞에서 생과 사가 교차했다.
초승달 아래에 드리운 뒷모습은,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넌 무엇을 위해 싸웠던 거야?
…명령 때문이었어요. 언제나 그랬듯, 늘 명령에 따라 움직였어요.
명령이라고? 그건 아닐 거야. 우린 모녀이자 자매야. 우리 사이의 감정은 훨씬 더 깊고, 끈끈해. 차갑고 무정한 명령 따위로는 이어질 수 없는 관계야.
아니요. 단지… 제가 원했을 뿐이에요.
우린 함께 아름다운 삶을 나누며 서로의 옆에서 점차 성장했어. 넌 재봉 공방에서 일하다가 내 전담 재봉사가 되었고, 함께 공중 정원에서 나이 들어갔지. 전에 네가 늘 하던 말이 있잖아.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
당신... 역시나 가짜였어요.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럼, 뭐가 진짜인데?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보는 것? 그건 모두 전자 신호로 처리된 것일 뿐이야.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지.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뒷머리에 꽂은 관을 통해, 가상 세계 속 위안을 탐닉하고 있어.
넌 옷과 인형 그리고 개 인식표에도 진짜 감정이 담길 수 있다고 믿잖아. 그런데 왜 네 "뇌" 속엔 그 감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난 네 상처를 알아.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있어. 그들은 하나같이 널 버렸어. 어떤 이는 일찍 떠난 연인의 대체품으로, 어떤 이는 이상을 위한 희생물로, 또 다른 이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면죄부로 널 이용했어.
그들은 절 구해줬어요. 하지만, 전…
그들은 널 이용했어.
하지만 난 달라. 난 널 하나의 인격으로 대할 거야. 사랑받길 원한다면, 내가…
엘리너는 오블리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녀의 뺨이 어깨에 닿자, 긴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창밖에서 흘러드는 빛은 은은히 반짝이며, 둘을 층층이 겹쳐진 금빛 고치 속에 가두었다.
「영혼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하는 모든 것들은, 기억과 한 존재의 자아 속에 깊이 봉인되어 있다.」
「설령 네가 다 이해를 못 한다고 해도, 난 이 모든 걸 너에게 줄 것이다. 」
저에겐 아직... 임무가 있어요.
이제 임무 따윈 잊어버려. 임무 말고도, 넌 너만의 삶을 가질 수 있어.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 우린 새로운 삶을 시작했잖아.
나는 매일 피아노로 네가 좋아하는 탄호이저 서곡을 연주했고, 너는 곁에서 반주를 해줬지.
넌 곧 나야. 그래서 잘 알아. 손재주로 평온하게 살아가는 게, 네 진짜 바람 아니야?
저의... 바람.
오블리크는 커튼 뒤의 텅 빈 창문을 바라보았다. 유리 위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금이 드리워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