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몬자노 저택은 도금된 감옥에 불과했다. 거울처럼 빛나는 대리석 바닥은, 수감자의 쓸쓸한 그림자만 비추었다.
서류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던 오블리크는 가슴이 미어졌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이 고통이 단순한 통증이 아닌, 원한이라는 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 원한은 불길 속에서 태어났고, 과거에 자기 이름을 불러주던 따뜻한 사랑 속에서도 자라났다.
탁. 탁. 탁.
네가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들이 네 눈앞에, 바로 그 자리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겠지.
엘리너는 오블리크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았다. 대충 넘기다가 사진에서 멈추더니, 티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다.
넌 그 공방이 오래전에 불타 화재 보험금만 받고 끝났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실제로는 동양의 갱단에게 비밀리에 팔렸어. 지하에는 무기 공장이 세워졌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무기들이 사방으로 흘러갔지.
고모의 사업은, 그렇게 악의 둥지를 달콤하게 키워내고, 벌과 나비, 그리고 온갖 벌레들을 끌어들였어.
그때 그 가난한 재봉사들은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고, 새 신분과 이름을 얻은 후, 상류층이 되어 로프라도스의 카지노를 드나들며 돈을 물 쓰듯 했어.
악명 높은 밀수범이 된다고 해도, 재봉사 시절보다는 훨씬 더 체면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하녀가 손가락에 힘을 꽉 주자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폴라드 기관에서 배운 거 기억하지? 모든 단서는, 한 올 한 올 풀어내야 한다는 거…
이게 최종으로 얻은 결론이야.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진실이지.
난 네 능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블리크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엘리너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블리크의 복잡한 시선을 못 느낀 듯, 우아하게 반 바퀴 돌며 치맛주름을 고르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가느다란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췄다.
"멜로디아"라… 난 네가 남을 돕는 연주자가 되길 바라지 않아. 이 왜곡된 세상에서 왜곡된 곡만 낼 수밖에 없다 해도, 네 인생이라는 곡을 스스로 연주했으면 좋겠어.
오블리크의 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넘쳐흐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마침 고모도 불청객을 싫어하시거든. 그들에게 예의가 뭔지 가르쳐 주는 게 어때.
보랏빛 실루엣이 몸을 일으켜, 오블리크를 집안 곳곳에 있는 감시기로부터 가려 주었다.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의 넌, 선택의 자유가 있어.
그래서, 네 선택은?
럭키 38, 많은 도박꾼이 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이름을 좋아했다.
공기에는 달콤하면서도 역겨운 향수가 섞여 있었고, 시가 연기가 휘감겨 도박꾼들을 감쌌다.
룰렛은 돌고, 주사위는 부딪히고, 카드와 칩은 운명을 바꾸며 흘러갔다. 손님들의 희로애락은 찰나에 피고 졌다.
눈부신 조명과 웃음소리는 여전히 눈과 귀를 거슬리게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압박이 서서히 죄어왔다.
카드 테이블 위의 여자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 그녀는 행운의 여신에게 선택받은 듯 보였다. 쉴 새 없는 환호와 아첨은 그녀를 욕망의 중심에 세웠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었다.
여자는 잘생긴 바텐더가 내민 샴페인을 마시며, 이 호사로운 순간이야말로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엘리너 님 맞으시죠? 오늘도 정말 빛나시네요. 드레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데… 혹시 그걸 만든 재봉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항상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봉사의 이름 정도야,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이쪽으로 오시죠.
엘리너의 완벽한 얼굴이 혼란스러운 카지노를 환히 밝혔다. 술에 취한 바늘은, 그 미소를 잠시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금화를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기서 번 돈, 여기서 쓰면 그만이니까.
엘리너의 짧은 눈짓에, 보디가드들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처음엔 의례적인 인사라 여겼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바늘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엘리너 님, 이게 무슨 의미죠? 전 속임수 따윈 쓰지 않았어요. 오늘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
전자 벨벳 커튼이 내려오며 환상이 걷혔다. 아름다운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옛 친구를 만나는 건데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
그 재봉사의 이름은... 오블리크예요.
바늘은 더듬거리며 변명하다가 멈췄다. 본능적으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지만, 곧 벽 구석에 등이 부딪혔다.
풍족한 생활도, 재봉 공방에서 새겨진 본능을 지우지 못했다. 안전을 찾아 비좁은 곳으로 몸을 몰아넣는 그 본능 말이다.
이... 이게 누구야? 악몽이 아니라, 드디어 현실이 됐네.
바늘은 수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악몽을 보았다. 식은땀이 났지만,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표정을 가다듬게 해주었다.
왜 또 내 앞에 나타났어? 왜 귀신처럼 따라다니는 건데...
...
내가 예전부터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고 했잖아… 왜 그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던 거야?!
그때 그 비천한 고아가 지금은 몬자노 부인의 충성스러운 개가 됐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하하하, 하하하하!
로프라도스 전체가 몇 번 주인이 바뀌었어도, 결국은 싱클레어라는 이름을 달고 있잖아!
결국 너도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하하하하!
공방에 불 지른 게, 이모였어요?
난 거기에 속한 적 없어, 그 먼지투성이 우리에 있은 적이 없다고!
아빠를 죽인 사람이, 이모였어요?
바늘은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멈췄다. 그녀는 대답을 피했고, 짙게 칠한 화장 너머로도 감출 수 없는 증오가 얼굴에 드러났다.
난… 난 그렇게 믿었어. 화려한 옷을 입고, 값비싼 백을 들고, 우아한 말투를 흉내 내고, 날씨나 음식 같은 사소한 것에 불평하면… 나도 그녀들처럼 상류층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더 이상 굽신거리지 않아도, 먼지투성이로 진흙탕에 굴러다니지 않아도 될 거라고…
악몽이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은 바늘에게 이것이 현실이고, 도망칠 길은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하지만 소용없었어...! 클럽은 신분 없는 자를 거부했고, 나한테 천문학적으로 보였던 돈도, 진짜 부자들 눈에는 하찮은 잔돈일 뿐이었어. 그들의 말투, 그들의 눈빛…!
여전히 경멸과 거부감으로 가득했어… 왜… 왜 난 안 되는 건데?!
왜! 나! 는! 안! 되! 냐! 고?!
바늘은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등 뒤의 벽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손가락 관절은 피로 물들었고, 정갈히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도 한 가닥씩 흩어져 내렸다.
왕관을 쓰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왜 내가 아닌거냐고?!
넌 이해 못 해. 절대 이해 못 해. 카드 위 숫자들이 속삭였어. 그것들이 날 주인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고…
바늘은 기다랗고 흉측한 손톱으로 머리를 긁어댔다.
바늘은 혐오했다. 룰렛 테이블에 묶인 심장을, 벨벳 장갑 아래에 박힌 굳은살, 어두운 지하에서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무엇보다, 자신도 황금빛 계급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어리석음을 말이다.
이모는 늘 가난한 사람을 멸시했어요. 자기 자신을 멸시하듯이 말이에요.
난 내 욕망을 숨기지 않아. 그걸 위해 한 짓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
남을 짓밟아야만 이룰 수 있는 욕망은… 결국 스스로를 짓밟게 된다는 걸, 이모도 알잖아요.
난 곧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야. 곧 걱정 없는 미래를 손에 넣게 될 거라고. 바로 다음 판에서… 바로 다음—
오블리크는 바늘 곁을 무심히 지나쳐, 문 인증을 통과해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이미 늦은 건가.
난 예전부터 말렸어. 하지만 그녀는 결국, 미래를 걸고 내일을 거는 걸 선택했어…
무슨 의미가 있어. 우리는 결국 굽신거려야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
남자의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 동안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어. 질 때마다 욕을 퍼붓고 돌아섰지만, 결국엔 또다시 그 도박판에 발을 들였어.
딜러는 우리 같은 놈이 제일 쉬운 먹잇감이란 걸 알고, 늘 그녀를 유혹했어. '한 걸음만 더 가면 인생이 뒤집힌다, 행운의 여신이 널 도와줄 거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은, 언제나 다음 판이었어.
그럼, 삼촌이 아빠를 죽였어요?
바늘은 상관없어. 나 혼자 한 짓이야.
넌 그녀 마음속의 병이었어. 그래서 우린 계속 널 찾아 헤맸지.
가위는 테이블 밑에서 총을 꺼내 들더니,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호흡은 거칠었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총알이 오블리크의 어깨를 스치며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재빨리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겼고, 사방에서 총성이 메아리쳤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고, 지지대 파이프가 부러져 바닥에 쏟아졌다. 오블리크는 떨어진 부품 하나하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품 제조창에서 불꽃이 튀며 외벽이 찌그러졌다.
철컥. 탄창이 삽입되고, 사신의 등장이 임박했다.
급조된 총기가 모든 조명을 정확히 파괴하자, 쏟아지던 총성이 순간 방향을 잃었다.
단 한 발이면 충분했다.
오블리크는 발소리를 죽인 채, 가위의 등 뒤로 다가갔다.
임무는 정확하고 신속하게...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건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교육받았었다.
가위의 손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총이 오른손에서 미끄러졌고, 왼손으로 잡으려는 순간 또 한 번 피가 튀었다. 총은 결국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크윽… 우린 높은 곳에 오르고 싶었어. 낮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미래를 팔았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전 그런 적 없어요!
오블리크는 그림자처럼 달려들어 총을 빼앗은 뒤, 가위에게 겨눴다.
아처 스승님이 내 옷을 기워주신 적이 있어… 그건 내가 받은, 가장 따뜻하고 세심한 선물이었어.
함께 살면서… 함께 연주한다라…
하지만, 그 소원은 모두 바람에 흩어져 과거에 묻혀버렸지. 넌 이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갈 수 없다라…
적막 속에서, 그녀는 뜨겁게 달궈진 총구를 천천히 내렸다.
세 번째 방.
이러지 마…
우리... 어렸을 때 잘 지냈잖아? 봐, 난 여전히 널 기억하고 있어.
짧은 시간 안에 그 도구들과 쌓여 있던 천들을 옮기고 사고로 위장하려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답은 자명했다.
무겁고 거대한 천이 모든 흔적을 덮어버렸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났다.
난 강요받은 거야! 걔네가 날 협박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당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어요!!!!!!!!
격분한 오블리크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고, 덩치 큰 남자는 그 모습에 놀라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고급 정장 바지는 완전히 젖어 얼룩졌고, 방울진 액체가 콘크리트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 그는... 자기 딸은 언제나 최상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
안 돼! 그러지 마! 넌 날 죽일 수 없어! 네 친부모 소식이 궁금하지 않아? 그건 나만 알아! 나만 알고 있어!
언젠가는 네가 돌아올 거라 생각했어... 진짜 부모와 자신의 출생에 대해 궁금해할 거라 생각했어…
날 죽이면… 넌 그걸 영영 알 수 없게 돼!
제발… 제발 살려줘…!
오블리크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천이 절망적인 울부짖음과 함께 반격했다. 그는 주변의 선반들을 모조리 밀어 넘어뜨렸다.
좁은 공간에서 피할 길은 없었다. 오블리크의 등 위로 무거운 충격이 내려앉았고, 이미 총상 입은 어깨가 더 깊이 벌어졌다. 하지만 오블리크에게 이런 상황은, 그저 반복된 훈련의 연장일 뿐이었다.
과녁이 클수록 맞히기 쉬운 법, 바닥에 엎드려서도 조준은 가능했다.
곧, 표적이 비명을 터뜨렸다.
오블리크는 깊게 숨을 고른 뒤, 자신을 덮친 잔해들을 밀어내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친부모요?
제 친부모는 네빌 아치볼드 호러스뿐이에요. 당신들의 스승님. 그리고… 당신들 손에 죽은 바로 그분이요.
마지막 방은 넓고, 새하얬다. 차가운 금속 감촉과, 자극적인 오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쪽 벽은 거울로 덮여 있어 공간이 두 배로 커 보였다. 지하 같지 않은 낯선 이질감이 감돌았다.
진열대에는 조립 중인 무기 부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천과 먼지가 쌓여 있던 따스한 옛 공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이 공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림자, 거울의 대칭, 세월의 낯섦이 공간을 실제보다 넓어 보이게 했을 뿐이다.
오블리크는 실망했다. 옛날의 흔적, 냄새… 더 이상 단 하나도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블... 리크.
넷 중에서, 세월이 흘러도 가장 변하지 않은 얼굴은 실이었다. 그 얼굴은 오블리크에게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여자의 실루엣은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오블리크는 아직 늦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실 이모.
이모도 그들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르신 거죠. 아니면 그때 절 놓아주셨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네가 믿는 진실이니?
넌 여전히 그때처럼 순진하고 멍청하구나.
그땐, 네가 아직 쓸모가 있었으니까.
실은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온몸을 떨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웃어댔다.
복수는 언제나 보는 이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지. 그래서 최고의 오락거리인 거야.
여기 무기 공장으로 바뀐 거, 너도 알지?
무기를 조립하는 게 옷을 만드는 것만큼 쉽더라.
오블리크는 혼란스러웠다. 늘 조용하고 다정했던 실이, 어떻게 이 모든 파국의 불씨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실 뒤에서 회전하던 구형 로봇이 명령을 받자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만약 스승님이 살아 계셨다면… 평생 가장 아끼시던 두 제자가 "기계 사고"로 죽는 걸 바라진 않으셨을 텐데.
있잖아. 스승님을 보내드린 게, 어쩌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들지 않니?
이모였어...!
오블리크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확장됐다. 가슴속에 분노가 들끓었지만, 터뜨릴 틈조차 없었다.
다음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려졌다.
오블리크는 실만 경계하느라 거울처럼 보이던 양쪽 벽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벽 속에서 두 대의 구형 기계가 회전하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 재봉사는 어쨌든 내 스승님이셨어. 나는 그분이 가장 믿고 아끼던 제자였지. 그래서 화재 후에 남은 유골도, 나에게 맡겨졌어. 스승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다던 멜로디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네가 사랑받았던 그 시간은... 전부 환각이라 할 수 있겠지?
레이저가 날아오는 순간, 시간이 끝없이 늘어났다. 귀를 때리는 굉음은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변했고, 오블리크는 다가오는 광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렬한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눈이 멀 듯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순간, 겹겹이 반사된 거울 속에서 오블리크는 문득 공방 안의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일곱, 여덟 살 무렵, 재봉사의 품에 안겨, 높이 들어 올려지던 작고 순수한 소녀.
빛으로 가득 찬 세계의 저편에서 순수하고 천진무구했던 여자아이는, 지금 피와 먼지 속에서 회색빛 세계로 쓰러져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한기가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곧 머릿속을 태워버릴 듯한 작열감, 그리고 시각과 감각이 뒤틀리는 괴이한 느낌이 몰려왔다.
시야가 무너지고, 세계는 찢어진 천처럼 갈라졌다.
이건 한 세력에서 대량 주문한 물건이야. 재봉할 때 이런 걸 썼었더라면 훨씬 편했을 텐데.
실은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 차갑게 말했다.
구형 기계가 다가오더니 가압기처럼 천천히 내려앉으며, 부품을 누르듯 압박하기 시작했다.
윽!!
오블리크의 오른손 관절이 산산이 부서졌다. 저항할 힘이 사라지자, 기계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실이든 천이든… 심지어 인간의 몸도 깔끔하게 잘라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다니. 참 훌륭한 도구야. 안 그래?
레이저에 절단된 두 다리의 단면은 매끈하고 매서울 만큼 완벽했다.
살짝 굽혀진 무릎은 마치 누군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뼈와 살이 완벽한 절단면을 이루었지만, 열로 인해 빠르게 응고되었다. 혈관 밖으로 흘러나온 피는 마치 밤바다의 적조가 소리 없이 밀려와 암초를 삼키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블리크는 아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이 광경을 감상했을 것이다.
미안, 늦었네. 공장 전체의 자동 보안 시스템을 꺼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렸어.
엘리너는 특수 제작된 우산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 있던 구형 기계를 단숨에 날려버린 뒤, 교란용 EMP를 던졌다.
남아 있던 로봇들은 동시에 제어를 잃고, 파직이는 불꽃을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 같았다.
아직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대퇴직근은 실험대 위의 동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기계는 분해하고 교체할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나 쉽게 부서지고 연약하기만 했다. 엘리너는 시선을 거두고 안타깝다는 듯 얘기했다.
이래서야... 복수할 수 있겠어?
피로 물든 한가운데에서, 오블리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과 과거의 훈련을 바탕으로 아드레날린을 끌어 올렸다. 과다 출혈로 쓰러지지 않도록 의식을 붙잡기 위해서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블리크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절규를 미친 듯이 내질렀다. 차라리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손을 뻗어 구원받고 싶었지만, 그 행복한 환상만큼은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b><size=50>강아지야, 강아지야, 어디로 갔니?</size></b>
<b><size=50>방금 나무 뒤에 있었는데</size></b>
<b><size=50>지금은 왜 안 보일까?</size></b>
이젠 의료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이렇게 단면이 선명한 상처는 몇 시간 안에 완전히 접합할 수 있어…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야?
외롭게 서 있던 엘리너는 앞에 있는 실과 바닥에 널브러진 살인 기계들을 지나, 오블리크에게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무를 완수하려면, 활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써야 해.」
머릿속에 과거 폴라드 기관에서의 훈련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오블리크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다리가 없어도... 괜... 찮아요.
오블리크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꿰매는 걸 잊은 두 조각의 천 같았다. 그리고 곧,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b><size=50>짧은 귀에 긴 꼬리~</size></b>
바늘과 실로 낡은 천을 이어서 인형과 옷을 만들 수 있듯이…
너도 네 인생을 원하는 대로 꿰맬 수 있단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건 뭘까?)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 선택받는 것?
사랑받는 것? 소중히 여겨지는 것?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단지 존재하는 것.
그런데 왜 난 이렇게, 복수조차 할 수 없는 실패자가 되어 버린 걸까?
<b><size=50>귀여운 우리 강아지</size></b>
<b><size=50>쓰다듬어 주고</size></b>
<b><size=50>안아주고 뽀뽀도 해줄 거야</size></b>
실은 그림자 속에 숨어 경계하고 있었다. 새로 온 인물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후, 피투성이가 된 몸을 꿈틀거리는 오블리크를 연민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낙성 구시가지의 양복점들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전부 불타 잿더미가 됐어. 그때 살아남은 건…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 한 명뿐이었다고 들었는데.
넌 왜 우리만 범인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목하지 않는 거지?
그녀의 말은 무명실처럼 가벼웠지만, 어떤 무기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소리 없이 급소를 찔러, 꿰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입, 다물어요!
오블리크가 마지막 의식을 붙잡은 채 흉기를 던졌고, 실은 왼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그것을 피했다.
근데 난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실은 창백하고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그림자 밖으로 뻗으며 말했다.
인식표에 네 이름을, 조금 더 어울리게 새긴 것 말고는.
오블리크... 대책 없고 믿음도 가지 않는 이름. 지금 네 처참한 꼴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지, 안 그래? 우린 이렇게 닮았는데…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걸 갖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점점 부풀어 뒤틀려진 질투는 세월 속에서 더욱 깊어만 갔다. 실은 타인의 숨겨진 본성을 파헤치는 것이 취미였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이 마지막 뒷수습을 하는 동안, 엘리너는 콘솔 위 자폭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어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진실, 만족스러워?
피비린내와 끈적한 공기에 지친 실은 늘어져 있는 실들을 정리하며,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미련 하나 없이,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과다 출혈로 인한 저체온증이 몰려오자, 오블리크는 의식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엘리너 싱클레어는 마치 장식용 식물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져 가는 차량 소리, 전원이 끊기는 소리, 자폭 카운트다운이 끝나가는 소리. 이곳은 곧 사람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버려질 것이다.
<size=50>난 네가 남을 돕는 연주자가 되길 바라지 않아...</size>
기절하면 안 돼!
<size=50>이 왜곡된 세상에서 왜곡된 곡만 낼 수밖에 없다 해도....</size>
본능적으로 떨리는 몸을 억누르려 애쓰던 오블리크는, 가까이 있던 가늘고 긴 쇠막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높이 치켜든 뒤, 힘껏...
왼쪽 허벅지와 잘려 나간 다리 사이에 비스듬히 꽂아 넣었다.
푹.
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쇠막대의 날카로운 끝이 다리에서 기이한 형태로 튀어나왔고, 끈적한 붉은 피가 그 쇠막대를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지혈되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자,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고, 피비린내가 탄내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날카로운 고통이 다시 뇌를 잠식했다.
움, 움직여...!
하지만 다리의 신경은 완전히 끊어져 버렸고, 남은 것은 잔열과 그을린 살냄새뿐이었다.
아무리 힘을 쏟아도 왼쪽 다리는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다리를 흉하게 질질 끌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지만, 지금 고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다리는 수천 개의 달궈진 바늘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었고, 그런 상황에서 바늘 하나 더해진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시야는 점점 붉게 물들어갔고, 오블리크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
아... 아직 하나 더 남아있어. 움직여! 제발, 움직이라고!
이건 애초에 응급처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오블리크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질질 끌며 몇 미터 앞으로 기어나갔다. 바닥에 피부가 쓸릴 때마다 피가 스며 나왔고, 마치 달팽이의 점액처럼 길고 녹슨 것 같은 핏자국을 만들어냈다.
폴라드의 군견들은 죽기 직전에 온몸이 찢기고 으스러져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까지 명령을 따랐다. 심지어 머리가 없는 상태에서도 말이다... 오블리크는 그런 장면을 셀 수 없이 목격해 왔다.
울부짖음은 무력함만 드러낼 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임무 수행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다.
감정... 임무에 감정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b><size=60>사랑하는 우리 강아지</size></b>
<b><size=60>어디~ 어디~ 어디에 있을까?</size></b>
오블리크의 어린 시절이, 마지막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나타났다. 기억이라는 외투를 걸친 채 작별을 고하고는, 왼쪽 다리에 꽂힌 피 흐르는 강철 바늘 하나만을 남겼다.
윽...!
하아, 하아...
제발… 엘리너… 명령을 내려 주세요! 쫓아가서… 그녀를 죽이게 해 주세요! 제발… 제가 죽이게 해 주세요!
전 쓸모없지 않아요. 아직 가치가 있어요...! 할 수 있어요!
제발... 제발요...
오블리크의 흐느낌은 마치 숨넘어가는 작은 동물의 마지막 울음처럼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오랫동안 텅 비어 있던 눈동자가 마침내 촉촉해졌고, 참아왔던 모든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피와 함께 뒤섞였다.
소녀의 눈매는 날카로운 초승달 같았다.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살짝 눌렀다.
좋아. 명령을 내려줄게.
"하지만 전 다리가 없어요." 여자아이가 말했다.
"다리를 원해?"
"네, 원해요."
"그럼, 밝은 골목길로 날 찾아와. 최후의 심판의 날을 더는 미룰 수 없는 그곳으로 말이야."
——아직 생명의 숨결이 남아 있을 때.
습한 밤, 저택의 가장 높은 창문에서 천둥소리가 우르릉 쾅쾅 울려 퍼졌다.
죄송해요, 고모.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몬자노는 불만스러운 듯 컵 손잡이를 문질렀다. 컵 속의 붉은 액체는 이상하리만치 걸쭉해, 흔들어도 쉽게 출렁이지 않았다.
이 큰 방은 두 사람만 있기엔 지나치게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
어떤 갱단도 이렇게 안정적인 공급망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들의 진짜 고용주는 갱단이 아니라, 군대예요.
음? 그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한테 복수하고 싶었어? 아니면 쿠로노한테 하고 싶었던 거야?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린 몬자노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그 잔을 분노와 함께 조카에게 던져버릴 것 같았다.
오블리크를 위해서예요.
복수, 진부하고 진저리 나는 핑계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호위도 몇 명 없이, 오블리크랑 둘이서 그 소굴에 쳐들어가겠다고?
목숨을 건진다 한들, 오블리크는 의족에 의지한 채 무용지물이 될 뿐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지금 수많은 쿠로노의 눈이 내 실수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몰라?!
로프라도스에서 엘리너·싱클레어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 미묘한 균형 속에서 누군가 먼저 움직이는 순간, 곧바로 표적이 되어 쥐고 있던 패가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난 무모한 조카를 키운 적이 없어. 진짜 목적이 뭐야?
괴물 같은 조카는, 분노하는 고모 앞에서도 조용히 예의를 지킨 채 서 있었다.
성공으로 가르치는 게 항상 옳은 교육은 아니에요.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게 오히려 더 효과적일 때도 있죠.
엘리너의 맑은 목소리는 찬송가처럼 아름다웠지만, 이 긴장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 결함이 있는 노예가 더 환영받곤 해요. 그들은 주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조카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몬자노는 그 진심 속 숨은 무언가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변질되고 부패한 감정인지 판단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몬자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강하게 두드렸다. 계획이 어긋나 치밀어 오르던 감정은 밀려나고, 몇 가지 계산된 생각들이 머릿속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됐어, 괜찮아. 실패하면 다 버리면 되니까.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야.
엘리너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에 비친 미소는 완벽히 쓰여진 가면 같았다.
고모가 시키는 일은 다 할게요. 하녀가 제게 예쁜 옷을 더 많이 만들어 줬으면 좋겠네요.
